내 삶은 이게 전부는 아닐 거야
제주에 도착한 나는 나도 모르게 안도의 숨이 쉬어졌다. 공항에 내려 버스틀 타고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한창 꽃이 피는 4월이라 제주는 따뜻하고 온화한 기운으로 반겨주는 듯했다.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3시간을 달려 드디어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주인장으로 보이는 50대 여성분이 나를 반겼다.
“감독님한테서 얘기 들었어요.” 라며 가볍게 인사를 나누더니, 곧 목장갑을 끼고 트럭에 올라타더니 터프하게 후진해 주차했다. 그러고는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과 나를 향해 당당하게 외쳤다.
“어서 벽돌을 옮기세요!”
그 모습이 어찌나 당당하고 카리스마 넘치던지, 나는 한눈에 반해버렸다.
그곳은 제주 중산간에 자리한, 티베트와 인도 풍이 자연스럽게 섞인 듯한 느낌의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게스트하우스였다. 현대식의 깔끔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모든 인테리어와 가구는 주인장이 손수 만든 것이었다. 투박하면서도 따뜻함이 묻어나는 공간이었다. 자연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편안함이 좋았다. 객실 안의 2층 침대도주인장의 손길로 만들어진 것이었고, 제주 전통 천연 염색인 감물로 염색된 이불과 베개는 보기보다 쾌적하고 포근했다.
스태프로 있는 친구들은 대부분 나와 비슷한 또래여서 금세 친해졌다. 매일 새로운 사람들이 모여들고 함께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고 저녁이면 모닥불 앞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각 자의 삶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블랙홀에 빠지듯 그곳 생활에 녹아들었다.
“아! 이렇게 살아도 되는구나.”
나는 지금껏 내가 살아온 길만 있는 줄 알았다. 이곳에서 수많은 다른 길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나도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나도 여기에 살고 싶다!”
가슴속에서 토해내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뜨거운 욕망, 살고 싶다는 그 목소리에 이끌려 나는 제주에서 살아보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된 제주의 삶이 시간이 흘러 어느덧 10년을 넘어 11년 차를 바라보고 있다.
손님으로 오래 머물기엔 경제적인 부담이 커서 나는 스태프로 3개월을 머물기로 했다. 숙식을 제공받는 대신 숙소와 카페 청소, 아침 조식 준비, 카페 운영, 예약 전화 응대, 손님 체크인과 체크아웃 안내 등 여러 일을 도맡았다. 익숙지 않은 육체노동에 몸이 많이 피곤했는지 매일 밤 바로 곯아떨어졌다. 불면증 이런 건 언제 있었나 싶을 정도로 머리만 대면 꿈나라로 가버렸다. 몸을 쓰고 움직이는 것이 불면증 해소에 진실로 도움이 된다는 건 몸소 경험해 보고 나서 확신하게 되었다. 모든 지식이나 이론은 내가 직접 겪어보고 경험해 봐야 진정 내 것이 되는 것임을, 그때 알았다.
제주에서 시작한 한 달이라는 시간은 나에게 천국과도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감은 눈덩이처럼 자꾸 커지더니 마음은 온통 불안과 걱정으로 물들어져 버렸다.
“ 3개월 뒤엔 뭘 해야 하지? 예전에 하던 일은 하기 싫은데, 삼십 대인 내가 새롭게 뭔가를 시작할 수 있을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여기서 이대로 영영 낙오되는 거 아닐까? 친구들은 지금 승승장구하며 잘 나아가고 있는데 나는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거야!”
번뇌가 끊임없이 밀려오는 통에 천국 같던 곳이 순식간에 지옥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제주의 삶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현재의 자연 속에서 누리는 고즈넉한 일상은 번번이 미래의 불안과 걱정으로 잠식되어 혼돈의 나날들을 보냈다. 나의 마음은 불안에 등 떠밀려 계속 미래로 무작정 달려 나가고 있었다.
3개월 뒤, 나는 갈림길에 섰다.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 깊은 고뇌에 빠진 그때, 도덕경과 천부경 해석서 작업을 마치고 우리 게스트하우스에 머무시는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도덕경과 천부경을 선물해 주시며 차한 잔을 사이에 두고 나의 고민에 경청해 주셨다. 그는 묵묵히 듣고 계시다가 뜻밖의 제안을 해주셨다.
“일 년간 마음을 잡고 이곳에서 더 지내봐요. 스님들도 행자 생활 3년 동안은 빗자루질만 한다잖아요. 연이 씨도 행자처럼 일 년을 살아보는 건 어떨까요?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은 막연하게 느껴지더라도 자신에게 집중해서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마음 깊은 곳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를 거예요. 지금은 잠시 멈춰서 쉬어가는 시간이라 생각하고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세요. 그래도 괜찮아요.”
"그래도 괜찮아요... 괜찮아요." 나는 속으로 "괜찮아요"를 수십 번 다시 되뇌었다. 이 말 한마디가 그때 불안에 떨던 나의 가슴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그래도 괜찮아! 너 괜찮아! 누군가 이 말을 해주기만을 기다렸듯이 내 마음의 먹구름이 사라지며 한 줄기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옆에서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주인장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 때가 되면 다 알게 될 것이다. 일 년 뒤 퇴직금으로 내가 티켓을 끊어줄 테니 여행을 떠나봐. 어디든.”
그렇게 나는 마음을 잡고 일 년을 제주에서 보내기로 한다. 게스트하우스 스태프로, 자연 속에서,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나를 찾아가는 삶을 살아가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