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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뮤지컬, '빨래'

사람 때문에 상처받고, 사람 때문에 치유된다.

by kaei

친구들이랑 가을맞이로 서울로 여행 갔다. 올해 날씨가 종잡을 수 없이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니 은행나무잎들도 들쑥날쑥 노란 물이 들어있었다. 조선시대 중인들이 주로 살았다는 서촌으로 숙소를 잡았다.


우리 여행의 가장 큰 이벤트는 뮤지컬 '빨래'를 보는 것이었다. 이미 여러 번 본 친구들도 있었지만 나는 처음이었다. 대학로의 젊음으로 활기찬 거리를 걸으며 공연장으로 향하는 나의 기분도 무척 신이 나있었다. 공연장은 사람들로 꽉 차있었고 나도 설레는 마음으로 뮤지컬의 시작을 기다렸다.


드디어 6225번째 빨래하는 날, 서울살이 5년 차 나영이의 이사로 막을 열었다. 작가의 꿈을 안고 강원도에서 서울로 상경한 나영이는 서점 직원으로 일하며 집세와 생활비 걱정으로 꿈과는 먼 서울살이를 하고 있다. 빨래를 널다가 우연히 알게 된 몽골에서 온 청년 솔롱고, 몽골에서 대학 졸업하고 돈을 벌려고 온 한국, 불법체류자로 공장에서 일하며 돈을 벌어 고향으로 돌아갈 꿈을 갖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 하지만 밀린 월급에 인종차별까지 당하며 서울에서의 삶이 녹록지 않다. 서로 힘든 서울살이의 아픔을 알고 사랑을 키워가는 이야기, 그리고 서울살이 45년 차 주인 할머니, 팔다리 잘린 딸을 홀로 보살피며 살아가는 엄마, 서울살이 10년 차 희정엄마, 이것저것 안 해본 것 없이 억척스럽게 살아온 이혼녀, 각자의 아픔을 안고 좁은 골목에서 세방살이를 하는 이들이지만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고 공감하며 따뜻한 마음으로 풍진 세방살이에 힘이 되어주는 모습에 가슴이 먹먹해지며 나의 20대와 30대도 함께 오버랩이 되기도 했다.


눈물이 흐를 때쯤이면 어김없이 나타난 구 씨 아저씨, 온몸으로 연기하는 구 씨 아저씨는 나의 웃음 버튼이었다. 나중에는 나오기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는 매력쟁이였다. 나의 원픽은 구 씨를 연기한 한우열 배우님이다. 필모그래피를 찾아보니 영화 몇 편에도 출현했었다. 작은 배역이라 기억에는 없었지만 언젠가는 다른 배우들처럼 드라마에서도 뵐 수 있기를 진심으로 응원했다.


뮤지컬 '빨래'를 보면서 갑자기 추웠다가 더웠다가 비가 내리다가 맑았다가 하는 변덕스러운 제주 날씨가 떠올랐다. 하지만 해가 나는 맑은 날이 오면 흐리고 바람이 세차던 날씨는 잊히듯이 우리의 삶도 단짠단짠이 서로 어울려 더 풍성한 맛을 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속에서 더 단단해지기도 하고 내 옆에 남아준 고마운 사람들을 알아보는 눈도 생기게 되는 것 같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이 세상이라는 파도 위에서 결국 우리는 홀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어 앞으로 나아갈 용기와 힘을 얻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덕분에 오늘도 파도 위에서 출렁이며 삶이라는 여정을 방향을 잃지 않고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내 옆에서 사랑과 용기를 주는 주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함과 소중함을 알게 해 준 뮤지컬 빨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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