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장(공식적인 명칭은 아장(兒葬))
간밤에 1년쯤 키운 토끼가 저세상으로 떠났다. 잘 먹고 잘 놀았는데 이유를 모르겠다. 겨우 1살의 나이에 그저 이쁨만 받고 자랐는데 무엇이 잘못된 걸까. 은은한 회색빛의 털을 가진 작은 토끼의 이름은 '구름'이다. 옆집 길 고양이와도 친하게 지냈고, 동네사람을 봐도 낯설어하지 않았다. 칡잎을 잘 먹어서 여름 내내 방금 딴 칡잎을 이쁘게 다발을 만들어 선물하듯 구름이에게 바쳤다. 그런 구름이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하얀 광목천으로 여러 겹 구름이의 굳어진 몸을 감싸서 우리 집 가까이 있는 감나무 밭으로 갔다. 그곳에는 이른 봄이면 하얀 꽃을 피우는 목련나무가 있다. 목련나무 아래에 칡덩굴이 지천으로 깔려있다. 바로 구름이가 좋아하던 그 칡덩굴이다. 나는 언 땅을 삽으로 팠다. 깊게 파서 곱게 놓고 춥지 않도록 흙으로 잘 덮었다. 그리고 돌을 얹어 놓았다. 아무도 밟지 못하도록.
1970년대 초, 내가 일곱 살 때 나의 세 번째 동생이 태어났다. 시골이라 가정분만을 했고, 어린 나는 동생의 탄생을 직접 보았다. 피부가 하얗고 예쁜 남자아기였다. 엄마의 젖을 빨던 아기를 나는 신기한 듯 구경을 했다. 점점 자라서 아기는 젖을 빨다가 엄마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 한번 웃고는 또다시 젖을 빨곤 했다. 그런 아기가 너무 귀여워 손가락도 만져보고 발바닥에 입맞춤도 했다. 아기에게서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났다.
병원이 없는 시골에서 아기가 아프면 어떻게 될까? 침을 놓아서 응급상황에 대처하는 어른들이 마을에는 한 사람씩 있었다. 우리 마을도 그랬다. 이때쯤이었을 것이다. 한겨울 바람이 세게 부는 깊은 밤에 아기는 심하게 열이 났다. 아기는 얼굴이 빨개져서 악을 쓰며 울어대고 있었다. 어디가 아픈 것일까 걱정스러웠지만 생각만 하고 부모님께 물어보지 못했다. 엄마와 아버지는 아기를 업고 건넛마을 침놓는 어르신을 찾아갔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엄마는 울고 있었고 아버지는 침통한 얼굴이었다. 물론 아기도 울지 않았다. 그렇게 생후 100일을 미처 채우지 못한 예쁜 아기는 영영 우리의 곁을 떠났다.
아버지는 옆집 아저씨와 함께 아기를 삼베로 겹겹이 싸기 시작했다. 힘없이 축 늘어진,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을 듯한 아기를 싸고 또 싸는 아버지의 손길은 떨고 있었고, 엄마는 그런 아기를 오늘 밤만이라도 함께 하자고 울며 통곡을 했다. 옆집 아저씨는 날이 밝기 전에 보내야 한다며 둥글고 아담한 대소쿠리를 들고 집을 나섰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대소쿠리의 용도는 아기의 시체를 보호하기 위해 덮는 용도로 쓰이며 그 위에 돌을 얹어서 주위로부터 훼손을 막는다고 들었다.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부모님의 슬픔을 내 눈으로 귀로 보고 들었다. 이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엄마를 수시로 보았다. 나는 말없이 보기만 했다. 나의 위로가 아무 소용이 없음을 그때 알았다.
그 당시 땔감나무를 하러 산에 가는 일이 허다했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우리 집 뒷산에 나무를 하러 간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나무를 한 짐 하고 지게 앞에 앉아서 잠시 쉬어 가자고 했다. 아버지 옆에 앉았는데 아버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분명 땀이 아니고 눈물이었다. 내 아버지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어딘가를 보고 있었는데 그 눈빛의 끝에는 작은 돌무덤이 있었다. 나는 알았다. 아버지가 왜 소리 없이 우는지. 나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 아버지 너무 춥다. 얼른 집에 가자"라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그곳에 간 적이 없다. 갈 수가 없었다.
오늘 돌아가신 내 부모님이 너무 그립다. 험한 세상만을 살다가, 살기 좋은 세상이 오자마자 다시 흙으로 돌아가버린 내 부모님, 나란히 누워계신 두 분은 무슨 대화를 나눌까..... 대답 없는 질문을 나 혼자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