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주년이라고....
언제부터인가 결혼기념일이 기다려지지 않았다. 그저 행사 하나 치른다는 느낌으로 외식하고 차 마시고 그랬다. 나라고 원래부터 그랬을까. 결혼 1주년 기념일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참으로 설레었던 기억이 내게도 있었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경력단절을 회복하느라 이런저런 노력을 함께 하다 보니 늘 시간에 허덕였다. 그래서 희미해진 걸까.
나의 두 아이들은 오늘 나와 남편에게 점심을 먹을 수 있도록 평소 내가 좋아하는 곳에 예약을 해줬다. 그래서 알게 된 결혼기념일 35주년, 이제 기억조차 가물거리는 기념일이다. 나를 낳아준 부모님과 함께 산 세월보다, 남편과 살아온 세월이 더 많은데 말이다. 내가 기념일이라던가 뭐 이런 특별한 날에 의미를 두는 사람이 아닌 건 확실하지만, 그래도 이번처럼 깜빡했다는 건 좀 허망하다. 딸아이가 일러준 뇌 비타민을 먹기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뇌 비타민의 필요와 불필요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우리 함께'가 아닌 '나, 오직 나만을 생각하기'를 시작한 결과가 하나씩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함께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나는 우리 가족의 미래를 남편에게 이야기했다. 두 아이들은 결혼은 아직 안 했지만 경제적 독립을 했고, 나와 남편의 미래는 지금과 다르게 조금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원래 우리의 계획은 지금 살고 있는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리라고 마음을 먹고 시골생활을 한 지 5년째이지만, 이제 나는 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내가 태어나 자랐고, 지금도 내 동생들이 그곳에 살고 있고, 부모님의 흔적도 그대로 있는 그곳 말이다. 내 말을 듣고 있던 남편은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잠시 놀랐지만 '그래도 괜찮겠느냐?'라고 물었더니 그러자고 했다. 오랜만에 고마웠다. 그러자면 지금 살고 있는 집을 팔고, 새로 거주할 집을 찾아야 한다고 하니 그렇게 해보자며 최대한 협조?를 하겠다고 했다.
급할 것도 없다. 천천히 하나하나 가벼운 숙제를 하듯 해결해 나가면 된다. 집을 팔고 또 다른 집을 사는 것도 일상의 일부다. 오랜만에 설렌 마음으로 남편에게 커피를 가져다주고 나는 수정과를 마시면서 나의 고향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남동생과 여동생이 살고 있는 중간쯤이 어떻겠냐는 둥, 대지는 250평에서 300평 정도면 좋겠다는 둥, 이제 꽃과 채소를 잘 키우는 방법을 알았는데 꽃밭과 텃밭이 작으면 곤란하다는 둥, 땅을 사서 집을 지을 감각은 없고 그저 지어진 집을 사자는데 합의를 보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고 경쾌했다. 이런 기분이 얼마나 오랜만이던가. 차가운 겨울 공기가 나의 굳어진 폐부 구석구석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양껏 들이마셨다. 공기도 맛이 있음을 오늘 처음 알았다.
나의 사랑스러운 두 아이들은 오늘 우리 부부에게 점심만을 선물한 건 아니었다. 선물 보따리를 풀어보니 저 깊숙이 나와 남편의 새로운 미래가 숨겨져 있었다. 대충 봤으면 몰라볼 정도로 아주 작은 덩어리 하나. 잘 계획해 보라는 암묵적인 느낌이 가득한 빛이 나는 덩어리다.
새로운 미래를 만드는 일은 어쩌면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시간이 오래 걸리면 걸릴수록 내 고향 어딘가에 아주 잘 숙성된 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내 삶의 길에 배우자가 필요한 건 아니다. 다만 서로 다른 길일지라도 배우자의 삶의 길을 함께 서로 바라보며 살아가기를 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