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그와 35년을 살았다.
그는 주어진 일만 한다.
주어진 일이란 직장생활을 의미하고 그 외 일은 관심이 없다.
직장생활 이외의 일은, 여자 즉 아내가 해야 한다고 알고 있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아버지와 함께 한 일이라고는 목욕탕에 서너 번 간 기억뿐이라고 했다.
그는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한 여자의 남편이다.
그에게 있어 아버지란 개념은, 술 마시고 자녀들에게 수시로 훈계를 하고, 그리고 아내에게 지적질을 하는 그런 사람이다.
그는 은퇴 후 책을 많이 읽는다.
명심보감을 비롯하여 흔히 좋다는 책은 다 읽어댄다.
저토록 많은 책을 읽어대는데도 그의 태도와 행위는 변화가 없다.
정말 얄미운 일관성을 가졌다.
그가 잠시 집을 비웠을 때 나는 그가 읽던 책을 방바닥에 소심하게 던져버렸다.
그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책을 보고 있자면, 책도 그도 가엾다.
그의 강박성과 수많은 지적질에 나는 이상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지 오래되었다.
그는 나의 이상반응에도 지적질을 한다.
그는 어느 날, 아침 준비를 하고 있는 나에게 질문을 했다.
그가 원하는 대답을 나는 하지 못했다.
나의 생각 따위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는 했던 말을 반복 또 반복하면서 30분간을 해결 안 되는 말만 했다.
갑자기 나는 머릿속이 회오리치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 자신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순간 온몸이 화염에 휩싸인 듯 뜨거운 연기에 질식을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곧이어 괴성을 질러댔다.
괴로움 속에서도 살고 싶었는지, 아니면 잠시라도 피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무슨 소리를 질러댔는지 나도 모른다.
나는 두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양 손바닥에 머리카락이 한가득 뽑혀 있었다.
나는 내 손아귀에 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주방 바닥에 툴툴 털고는 입은 옷 그대로 손가방을 들고 나왔다.
차 시동을 걸고 그냥 차가 움직이는 대로 갔다.
어디로 갈 것인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내 차는 막내여동생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1시간 40분을 달렸나 보다.
동생집 대문을 보니 순간 내 마음이 편안해졌다.
도피처인가?
내 손바닥에 아직도 남은 머리카락이 수두룩하다.
마당에 들어섰다.
늘 그렇듯이 연못에는 잉어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물 위로 떠다니고 있었다.
길고양이 3마리는 변함없이 나를 반긴다.
그들에게 밥을 챙겨줬다.
오늘은 참 부럽다. 저들이.
내가 살면서 처음으로 느낀 panic attack은, 가슴이 답답하고 누군가 내 목을 졸라대는 느낌에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미친 듯이 병원 응급실로 뛰어갔다.
난 늘 같은 증상이 오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어느 날은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옷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심장 뛰는 소리는 굵은 빗줄기가 낡은 양철지붕을 때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심장을 끌어안으며 울부짖었다.
또 어느 날은 심장이 갑자기 쿵~~ 하더니 천 길 만 길로 끝없이 추락하는 느낌을 받았다.
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끝이 어딘지 모르는 불안감에 '이렇게 죽는구나'라는 생각에 두 눈을 손바닥으로 누르고 또 눌렀다.
아무것도 볼 수 없도록.
panic attack은 다양하게도 예고 없이 나를 덮친다.
자연이 화가 나면 인간세상을 향해 사정없이 쓸어버리는 것처럼.
실제로 존재하는 불안은 아니지만, 나는 있는 그대로 느낀다.
attack이 온다고 해서 죽지는 않는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하지만 정작 죽을 것 같은, 또는 지금 바로 죽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건 사실이다.
다음에는 또 어떤 attack이 나를 찾아올지 이제는 궁금하다.
피할 수 없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