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단편소설>
나무 그늘 아래서
겨울 햇살이 마당의 금목서 잎에 앉아 반짝거린다. 찰랑거리는 은빛 햇살이 따사롭게 느껴져 마당으로 나간다. 버석버석 밟히는 마당의 서릿발이 날카롭다. 마당 귀퉁이에 만든 작은 텃밭 가장자리에 쪼그리고 앉는다. 짚으로 덮인 긴 밭두둑에 겨울 햇살이 다복하다. 짚을 살그머니 들추어본다. 여리고 고운 푸른 잎이 나풀거린다. 푸른 잎사귀가 경이롭다. 서릿발이 무서운 마당 한 구석에서 겨울나기를 하고 있는 모진 생명을 본다.
쟈한테는 정 붙이지 말거라. 부모 가슴에 대 못을 치고 갈 아이다. 죽든지 말든지 삼시 랑이 알아서 하고로 칠성당 밑에 내쳐 두거라.
할머니의 당찬 목소리가 들린다.
갑아, 이 에미 두고 죽으끼가?
어머니는 나를 업고 저잣거리 한의원을 찾아가는 길이다. 어머니는 자꾸만 어깨를 들썩거렸다. 등에 업힌 나를 추켜올리는 척 엎드려서 치마 말기를 뒤집어 눈물을 닦았다. 희미한 의식 속에서도 어머니가 울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까맣게 탄 입술로 엄마를 불렀지만 마음만 가득할 뿐 말은 내 입 속에서 맴돌기만 했다.
갑아, 눈 좀 떠 봐라.
어머니의 목소리에 의식을 되찾았을 때는 희미한 호롱불이 켜진 낯선 방이었다. 근심이 가득 고인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어머니와 늙은 의사가 있었다. 어머니는 내 머리를 무릎에 받히고, 내 입에 묽은 약물을 떠 넣어 주셨다. 물 몇 모금을 받아먹고 나자 갑자기 똥이 마려웠다.
옴마, 똥
까맣게 탄 입술을 달싹거리자 금세 알아들은 의사는 누런 문종이를 가져와 어머니께 주시면서 마루에 나가서 똥을 누이라 하셨다. 어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방에서 나와 마루의 한 구석에 문종이를 깔고 쪼그리고 앉아 힘들게 변을 봤다. 마루 앞은 훤한 한길이었다. 지나가는 아이들이 흘끔흘끔 쳐다봤다. 나는 부끄러워서 어머니의 치마를 자꾸만 끌어당겼다. 그 아픈 중에도 학교 친구가 볼까 봐서 가장 겁났다.
의사는 먹처럼 검은 똥을 검사하더니 집에 데리고 가도 괜찮겠다며 한약을 한 제 지어 주었다.
어머니 등에 업혀 집에 오니
안 죽고 살았더나? 단명할 팔자 타고난 가스나 안 죽고 살아오니 반갑고나.
할머니는 나를 덥석 안아 아랫목에 뉘이며 가느다란 팔이며 다리를 살살 주물러 주셨다.
나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이야기를 꿈결처럼 들으며 다디단 단잠에 빠졌다.
벌써 수 십 년 전의 기억이다.
이제는 희미한 그림자로 남아 있는 할머니의 빛바랜 흑백 사진 속의 얼굴이 떠오른다. 막내 손녀라고 무던히도 귀애했다. 아니, 내 밑으로 남동생을 둘이나 본 복덩이라 했다. 박 씨 가문의 대를 잇게 한 아들의 원을 풀어준 것도 내가 고추밭에 터를 팔아서 그렇다고 했다. 어쨌든 할머니는 내가 아파 눕기라도 하면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다가 부엌 조왕신께 고하고, 방안에 모신 칠성당에 고하고, 그 아래 개다리소반을 놓고 물 한 그릇과 촛불을 켜 놓고 빌었다.
칠성님, 삼신제왕님, 박 씨 가문 귀한 여식 제발 하고 명 치레하고로 해 주이소. 저것이 맨날 골골하니 안 아푸고로 해 주시고, 명 치레하고로 우짜든지 보살펴 주이소. 비나이다. 비나이다.
방구석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고 있는 내 눈엔 할머니의 소복이 대나무 가지를 휘어지게 덮은 눈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병치레가 잦았다. 단명이라 했다. 스무 살을 못 넘길 것이라 했다. 갓난쟁이였을 때라 한다. 홍역이 창궐하던 그해 내 위로 일곱 살짜리 언니와 그 아래 오빠, 그리고 갓난쟁이였던 내가 한꺼번에 앓게 되자 집안 식구들은 모두 초긴장을 했다. 아랫집 할머니 손자도 앓아누웠다. 어느 날 아침 삽짝에 나갔던 할머니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집으로 들어왔다. 누군가 울타리의 새끼줄을 낫으로 끊어 놓았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아랫집 할머니가 그랬을 것이라 했다. 일곱 살배기 언니와 동갑이었던 그 집 손자도 아팠다. 액막이라 했다. 저승사자가 오면 삽짝의 새끼줄 끊어진 집의 아이를 데려가고 그 이웃의 아이는 살려 준다는 설이 있었다.
그 설이 맞았던 것일까. 그 아이는 살고, 언니와 오빠는 죽었다. 아버지는 두 아이를 거적 데기에 뚤뚤 말아 애기 장터에 묻었다. 나 역시 죽은 줄 알고 거적에 말아 마당에 놔뒀단다. 애기 장터에 묻으러 가려는데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났단다. 살아 있었다. 아들 죽고 건진 딸이라고 해서 아버지 역시 나를 무척 귀애했다. 부모 가슴에 시퍼런 멍 자국 남기고 죽은 자식은 자식이 아니라 애물단지라며 딸이라도 살아준 것이 고맙다고 했다. 딸 셋 중에 아버지 등에 업혀 다닌 아이는 나뿐이다.
나는 유난히 아버지를 따랐다. 아버지와 겸상을 해서 밥을 먹었고, 아버지 품에서 잠을 잤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며 한 모금씩 남겨 주는 것을 납죽납죽 잘도 받아먹었다니 진작 술꾼 기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처녀 때도 아버지는 내게 술을 권했다. 직장에 출근하는 딸에게 �야야, 해장술 한 잔 하고 가거라.’ 했다. 또한 아버지를 닮아서 황소고집이라 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였다. 한번 떼를 쓰기 시작하면 아무도 말릴 재간이 없었다. 자라면서 두고두고 우스갯거리가 된 이야기 하나를 풀면 이러하다.
우리 집은 늘 농주를 담가놓고 먹었다. 바지런하고, 야무졌던 할머니는 아버지를 위해 동이 두 개를 번갈아 가며 밀주를 빚었다. 술 익는 냄새는 향기롭다. 밤에 자다가도 아랫목에 이불을 둘둘 감고 앉은 술동이에서 뽀글뽀글 술 괴는 냄새가 나면 입맛을 다시곤 했다. 할머니 몰래 술 바가지를 들고 와 슬쩍 전주 한 모금을 마시곤 얼굴이 발그레 익곤 했다. 할머니는 술 익는 냄새가 지게문을 나서면 밀주 단속반이 들이닥친다 하여 화로를 마루에 내놓고 왕겨를 태우기도 하고, 밤이나, 고구마, 감자 등을 구워 주시기도 했다. 하루나 이틀만 지나면 방구들을 지고 있던 술동이가 감쪽같이 사라지곤 했다.
할매, 술 동우가 오데 가삣노?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거기 발이 있어 니가 잠든 새에 걸어 나가삣는 갑다. 인자 클 났다. 너거 아부지 술 찾으모 니가 도가 가서 받아 오거래이.
나는 은근히 걱정되어 울상을 짓곤 했다. 술도가는 시장 통에 있었다. 우리 마을에서 시장 통까지 가려면 제법 먼 길이었다. 못 둑을 지나고 이웃 마을을 지나야 했다. 너덧 살 배기 어린 내 걸음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은근히 걱정되어 한숨을 푹푹 쉬면 할머니와 어머니는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들며 나며 웃었다
발이 달려 집을 나갔다던 술동이는 보이지 않아도 아버지께서 나들이에서 돌아오시면 빠짐없이 술 주전자가 밥상에 올랐다. 아버지는 반주 한 잔을 하시면 꼭 한 모금씩 남겨서 술상 앞에 앉은 나에게 주셨다. 볼이 발그레해지면서 입맛을 쪽쪽 다시는 모양새가 귀여웠던지 번번이 그러다 보니 그것이 버릇이 되었다. 어쩌다 술잔을 싸악 비웠을 때는 주전자에 남은 술이라도 한 모금 부어 주어야 내 억지를 막을 수가 있었다.
가을철이었다. 그때는 열다섯 마지기가 넘는 농사를 짓고, 머슴을 둘이나 두고 있을 때였단다. 가을철이면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쁜 철이기도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나락 짐을 져다 나르고 아버지는 막걸리 한 잔으로 허기를 채우시고 어머니는 고구마 삶은 것으로 요기를 하고 있었단다. 할머니 등에 업혀 집에 들어온 나는 술상 앞에 앉은 아버지를 보자 할머니 등에서 억지로 내려 쪼르르 아버지 앞에 달려가더란다.
아이쿠, 우리 갑이 할매하고 잘 놀았나?
하시면서 아버지는 덥석 나를 안아 무릎에 앉혔다. 아버지 무릎에 앉은 나는 술상에 놓인 막걸리 잔을 번갈아 보더니
아부지, 수울.
응? 아이쿠, 이런 아부지가 다 묵어 삐고 없네.
하시며 빈 주전자를 들어 쩔쩔 흔들자 나는 그만 으앙 하고 터진 울음은 저녁때가 되어도 그칠 줄을 몰랐다. 하필이면 집에 담았던 농주도 바닥이 난 데다가 술동이 하나는 방구들에서 괴고 있으니 막걸리가 집안에 남았을 리 없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사탕으로 달래기도 하고, 회초리로 때려 보기도 하고, 울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라고 방치를 해 보아도 내 고랫등 같은 울음소리는 그치지를 않았다. 우리 집은 동네에서 가장 윗집이다. 그러니 마루에 앉아 대성통곡하는 아이 울음소리가 동네를 시끄럽게 했던 모양이다. 우물가에 왔던 아주머니들도, 들에 나가는 어른들도 '애를 왜 저렇게 잡는지 모르겠다.'며 한 마디씩 거드니 기가 찰 사람은 어머니와 할머니였다. 아버지가 업어 준다 해도 막무가내로 ‘술, 술, 술 조오.’하면서 우는데 당할 재간이 없었다.
결국 어머니는 나락 거두어들이는 것을 멈추고 시장 통 술도가에 가서 막걸리 한 주전자를 받아다가 철철 넘치게 한 잔 부어 주었더니 그 술 한 잔을 다 먹고 나서야 울음을 그쳤다 한다.
그 뒤로 내 별명은 황소 고집쟁이가 되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지리산 밑의 작은 마을이다. 고개만 들면 지리산 천왕봉이 늠름한 자태를 드러내 보이고, 천왕봉을 기점으로 크고 작은 산이 빙 둘러 쳐진 골이 깊고, 물이 많아 산세가 수려하고 인심 좋은 고장이다. 옛날에는 지리산 유독 골 하면 낮에도 호랑이가 출몰하던 험하디 험한 심산유곡에 속했다. 남명 조식 선생의 묘소가 있고 세심정이 있고, 덕천 서원이 있는 유서 깊은 고장이다.
나는 덕천 서원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둔 초등학교에 다녔다. 학교 다닐 때는 심심찮게 월담을 해서 덕천 서원의 잔디밭에 들어가 놀았다. 서원 앞 은행나무에 올라가 은행을 따기도 하고, 세심정 아래 맑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나르기도 하고, 철철 흐르는 맑은 덕천강 물에 걸레를 헹구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덕천강은 깊고 푸른 강이었다. 나룻배가 다녔고, 양 갈래 물이 한 곳에 모여 흐르는 곳에 소가 있었다. 덕천 다리에서 내려다보는 소는 늘 내 오금을 저리게 했다. 해마다 사람 서넛은 빠져 죽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물귀신이 머리를 산발하고 나와 덕천 교를 건너는 사람을 빨아들인다고 했다. 그 푸른 물줄기는 늘 내 꿈의 밭이었다.
다리 위에 올라서서 구비 구비 흐르는 푸른 물을 바라보면 이상하게 온 몸이 저릿저릿해졌다. 저 물이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늘 궁금했다. 진주 남강의 줄기라는 것을 알 리 없는 어린 시절엔 물이 흘러가서 닿는 바다란 곳은 동경의 나라였다. 꿈은 늘 물줄기를 따라 흘러가고, 그 끝에는 늘 여인의 실루엣이 있었다. 중절모를 쓴 남자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내려가던 여인의 모습이었다.
언젠가 어머니께 물어본 적이 있다.
옴마, 어렴풋이 기억나는 게 있어. 내가 할머니의 등에 업혀 있었던 것 같아. 천양 할매집 열녀문 있는 곳에서 산모롱이 돌아 내려가는 곳을 바라보며 울던 기억이 나. 할머니는 어여 가라며 손짓을 하고, 나는 자꾸 울었던 것 같은데. 한 여인이 한복을 곱게 입고, 회색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쓴 사람에게 부축되어 걸어가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며 손짓을 하는 기억이 있어. 내가 몇 살 때지?
아매, 그때가 니가 세 살이나 됐을랑가. 니 동상을 뱄을 땐데. 하혈을 해서 진주 큰 병원에 가던 길이제 싶다.
그럼 옴마랑 아부지였네. 내 기억에는 우리 엄마가 참 예뻤던 것 같은데. 지금 보니 아무리 봐도 예뿐 얼굴이 아닌데. 이상하지?
예뿌다 소리 많이 들었제. 기생 에미가 예뿌장한 가스나들 사로 오는 바람에 너거 아부지한테 시집을 왔던 기라. 쬐깬한 가시나를 징용 안 보낼라꼬. 대동아 전쟁 말기에 처녀 공출을 받았던 기라. 군수품 공장에 보낸다 캤제.
열네 살에 스무 살의 아버지께 시집 온 어머니는 콩 각시처럼 예뻤다. 그 어머니를 딸처럼 치마폭에 싸고돌기도 하고, 아들 사랑을 뺏은 며느리로 구박도 심했던 할머니랑 엄마랑 닮은 점이 있다면 꽃을 좋아하는 마음이었다. 고부간에 꽃 가꾸는 것은 타고났는지 우리 집은 사방에 꽃 천지였다.
지금도 어머니는 꽃을 가꾸신다. 마당가에 사랑초며 채송화, 장미, 접시꽃 등, 계절마다 피는 꽃이 다르다. 꽃을 가꾸는 어머니를 보면 예전 할머니 모습을 보는 듯하다. 의외로 나는 꽃 가꾸는 취미는 없다. 꽃을 보면 좋아하지만 꽃을 심거나 꽃을 아기자기하게 가꿀 줄은 모른다.
우리 동네는 남명 조식 선생 묘소가 있는 곳이다. 큰 못이 동네 옆에 있다 해서 모단 골이라 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모단은 열댓 가구가 사는 작은 양지 뜸이다. 마루에 앉으면 집 앞을 흐르는 덕천 강이 눈에 환히 들어왔다. 어디 그뿐인가 덕천 강 건너편은 평강들이라고 넓디넓은 들이 반반하게 펼쳐진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우리 집은 감나무가 많았다. 삽짝에 들어서는 곳에서부터 울타리의 기둥 역할을 하는 고목이 된 감나무가 줄줄이 서 있었다. 가을이면 아담한 초가지붕엔 늘 박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고, 꽃을 좋아하던 할머님은 장독간이며, 화단이며 온갖 꽃씨를 심어 우리 집은 꽃 속의 집이었다. 삽짝에서부터 마당가엔 감나무, 모과나무, 앵두나무, 석류나무 등, 과실수와 수선화, 장미, 채송화 상사화 등, 계절별 꽃들이 피고 지고를 거듭했다.
할머니는 구수한 이야기꾼이기도 했다.
이바구 좋아하모 후제 가난뱅이로 산단다.
나는 늘 할머니께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랐다. 할머니의 빈 젖을 만지며 누워 선비가 과거 보려 가는 길에 까치를 구해주고 구렁이에게 죽을 위기에 놓인 이야기를 듣다가 잠이 들거나, 계모의 구박을 받으며 자라는 장화홍련 이야기를 듣다가 훌쩍훌쩍 울다가 잠이 들곤 했다.
초등학교 갖 입학한 때로 기억된다. 코 수건을 앞섶에 달고 다닐 때다. 여름이었다. 덕천 다리 아래 강변에서 동네 사람들과 아버지, 어머니는 삼대를 삶아 껍질을 벗겨 널곤 했다. 강변에 커다란 대롱같이 생긴 쇠 가마솥이 기다랗게 걸려 있었다. 임시로 만든 긴 아궁이에는 굵은 장작이 벌겋게 탔다. 집집마다 대량으로 재배한 삼을 그곳에 모아서 한꺼번에 삶아 내곤 했다. 잎을 다 쳐낸 긴 삼대를 한 다불(묶음)로 묶었다. 남자들은 웃통을 벗어부치고, 영차, 영차 소리를 내며 커다란 갈고리로 삼대를 끓는 물에 넣었다. 삶은 삼대를 건져내어 강물에 담그면 동네 어머니들은 각자의 몫을 받아 삼 껍질을 벗겨 냈다. 삼 껍질을 벗겨내고 나온 줄기를 제럽데기라 했다. 표준말은 겨릅대기라 한다. 그 겨릅대기는 초가집 이엉 올릴 때 꼭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지붕의 썩은 이엉과 겨릅대기를 걷어내고, 새로 엮은 겨릅대기를 얹고, 그 위에 이엉을 올렸다. 남는 겨릅대기는 겨울 불쏘시개 감이었다. 바짝 마르면 아주 가볍고 불도 잘 붙고, 연기도 나지 않아 불땀은 없지만 불쏘시개로는 제격이었다.
나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다 다리 위에서 강변을 살피는 버릇이 있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계시면 쪼르르 다리 밑으로 내려갔다. 어머니는 늘 나를 위해 주먹밥 한 덩이를 남겨 놓거나 고구마나 감자 등, 주전부리 감을 챙겨 놓곤 했다. 배를 채우고 나면 아버지가 만들어 준 겨릅대기 방아로 물레질을 하다가 지치면 물장난을 치며 놀았다. 신발로 고기 잡는 재미는 더 좋았다. 자작한 강변에 돌만 들추면 탱사리나 꺽지, 피리, 지름또디, 피리, 망태 등, 이름도 모르는 고기들이 버글버글 했다. 굵은 다슬기도 주웠다. 어머니는 주로 다슬기(우리 마을에서는 고동이라 했다.)줍기를 바랐다. 다슬기는 어지럼병에 좋다고 했고, 삶아서 파릇한 물은 마시고, 저녁에 탱자 가시나 바늘로 알을 까먹으며 할머니의 구수한 옛날이야기를 들었다. 할머니는 입담이 좋았다. 옛날이야기를 참으로 구수하게 잘 엮어 나가셨다.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저절로 내가 선화 공주도 되고, 바리데기 공주도 되었다.
그날은 덕천교 아래 어머니도 아버지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 동네에서 내 또래 여자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영희는 두 살 위였고, 이웃 마을에 사는 남순이는 한 살 아래였다. 그러니 등굣길은 여럿이 가도 하굣길은 늘 혼자였다. 다리 아래를 살펴보곤 곧장 집으로 왔다. 삽짝을 들어서는데 할머니와 아랫집 할머니가 곰방대를 물고 마루에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마도 부엌에 있었던 듯싶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아랫집 할머니는 거만하고 심술궂은 할머니였다. 바짝 마른 몸매에 눈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간 자그마한 할머니로 기억한다. 입담이 걸어서 요년, 조년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다. 어쩌다 밤에 실례를 해 키를 씌고 소금 얻으려 가면 주걱으로 뺨을 야무지게 때리는 할머니였다. 어찌 좋아하랴. 내가 아주 싫어하는 할머니지만 어쩌겠는가. 마루에 앉아 있으니 인사는 해야겠고.
학교 다녀왔습니다.
내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쇳소리가 나는 아랫집 할머니 목소리가 오금을 저리게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