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샘

<처음>

by 박래여

< 단편소설>

시샘


병술 년 정초다. 어떤 인터넷 사이트에 이런 글이 올랐다. 오랜 지기가 보낸 문자라면서 ‘그 년이 그 년이겠지만 가는 년보다 오는 년이 좋은 년이길 바랍니다. 오는 년은 개년입니다.’ 그 글을 읽는 순간 개띠 아내 얼굴이 먼저 떠오른 것은 무슨 조화 속인지 모를 일이다. 하필이면 좋은 년이 개년이란 말인가. 개년도 개년 나름인가.

그는 꼼꼼한 사람이다. 소도시의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가붙이를 끈으로 들어갔던 면 소재지 농협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이태 전, 지부장으로 있던 농협에서 명예퇴직을 했다. 그는 남자로서는 키가 작은 축에 속하는 땅딸막한 몸이지만 일처리만은 똑 부러진다는 평을 받던 사람이다. 융통성이 없다는 뒷공론은 들었지만 대신 일처리만은 깔끔해서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는 편이었다.

그가 퇴직을 하고 집에 들어앉자 매달 꼬박꼬박 나오는 연금을 챙기는 아내가 밖으로 나돌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변한 것인지, 아내가 변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가 느끼기로는 아내는 변했다. 아니 몇 년 전부터 변해 있었는지 모른다. 그때 아내는 갱년기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다. 그가 직장 다닌다는 핑계로 아침에 나갔다 저녁이나 밤중에 들어오기 일쑤였으니 아내의 변화를 눈치 못 챘던 것이고, 그만큼 무심했다는 뜻도 된다. 막상 퇴직을 하고 집에 들어앉자 아내의 변한 모습을 확실히 볼 수 있게 된 것뿐이다.

오늘 밤에도 아내는 곱게 분단장하고 외출 준비를 한다. 동창회에 간단다. 12년 만에 돌아온 개 띠 해를 축하해야 한다는 동창들의 성화에 못 이겨 나간다고 하지만 무척이나 들뜬 표정이다.

그는 무심한 듯 텔레비전에 눈을 박고 있었지만 속내는 소태 씹은 맛이다.

“나갔다 올게요.”

아내의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아내의 뒤통수에 눈총을 쏘았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커다란 비게 덩이를 씹지도 않고 꿀꺽 삼킨 것처럼 속이 느글느글한 것이 구역질이 솟으려고 한다.

‘내 언젠가는 조놈의 여편네 다리 몽디를 확 분질러 놀 거다.’

생각 같아서는 ‘무슨 여편네가 밤마다 나가냐’고 한 마디 하고 싶지만 한 마디 했다가는 한 달 정도는 달달 볶여야 하니 속이 부글부글 괴어도 그냥 참아버리는 것에 이력이 붙었다.

현관문이 꽝 닫히는 것을 보고 그는 다시 텔레비전에 눈을 박았다. 자연 다큐멘터리는 언제 봐도 신선하다. 광활한 아프리카의 초원을 어슬렁거리는 표범과 사자 무리는 그에게 힘 있는 자의 여유 같아서 늘 부러움을 자아낸다.

“여봇! 개는 왜 풀어놨어? 강생이들을 못살게 하잖아.”

창문이 드르륵 열리면서 아내의 눈이 세모꼴로 변해 쏘아본다.

“내가 안 풀어줬다.”

그의 목소리에도 화가 묻어나자 아내는 금세 빳빳하게 세웠던 눈꼬리를 살짝 내리깔며

“개가 풀렸으니까 하는 말이지. 저걸 묶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냥 둬도 괜찮을까. 당신이 좀 묵던지. 개밥은 주고 가요.”

그의 눈이 날카롭게 노려보자 머쓱한 듯 창문을 탁 닫고 나간다.

그는 다시 텔레비전에 눈을 붙인다. 표범이 어린 영양의 목숨을 노리고 달리기 시합을 하고 있다. 덩치 큰 표범이 여리고 예쁜 작은 영양을 쫓아 질주하는 모습이 참으로 날렵하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어린 영양이 ‘매에 애’ 하면서 애처롭게 울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어미조차도 자식을 찾지 않는다. 버림받은 어린 영양은 결국 표범의 밥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는 어린 영양으로 변한 아내를 덮치는 자신을 그려본다. 빙그레 웃음이 번진다. 표범처럼 아내를 날카로운 발톱으로 탁 쳐서 발아래 깔아뭉개 놓고 여유롭게 슬슬 놀리다가 완전히 손발 다 들고 항복하도록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는 현실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을 꿈에서라도 충족시킬 수 있다면 참 행복할 것 같지만 자신은 표범이 될 수 없고, 아내는 어린 영양처럼 나긋나긋할 수 없다는 사실에 다시금 깊은 절망감에 빠진다.

‘저 여편네가 나를 완전히 발톱 빠진 늙은 고양이로 보는 것이 아닌가. 기운도 못 쓰니 집 지킴이나 하고 있어라 이 말이겠다. 괘씸한 것’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심통이 난다.

지난 연말부터 계속 밤 외출이 잦은 아내다. 연말에는 문학회다 동창회다 계모임이다 해서 온갖 모임에 망년회 한다고, 정초에는 신년회 한다고 나가더니 이젠 개띠 해 축하한다고 나간다.

그는 아내가 나가는 것을 말릴 재간이 없다. 적당히 하라고 하면 대뜸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든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이런 낙도 없으면 무슨 낙으로 사냐고 나도 좀 살자고 냅다 쏘아댄다. 힘도 못 쓰는 쭈그렁바가지 영감탱이나 바라보고 살란 말이냐고 대들면 할 말이 없다. 평소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사람이라고 퉁을 주면서 은근히 속 좁은 남정네 취급을 했다. ‘내가 왜 밴댕이 소갈딱지냐 당신이 밴댕이 소갈딱지지’ 하면서 쏘아주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것은 좋은 게 좋은 것이고, 부부 싸움해 봤자 괜히 기운만 빠지는 짓인 줄 아는 까닭이다. 둘이 살면서 따따부따 하는 것도 싫고 심기 불편한 것도 싫은 탓이다.

그는 아내의 변화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내는 나긋나긋했고, 여자다웠다. 하늘 같은 남편을 하늘같이 모시진 않았지만 대들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든지 수굿하게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고 살던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쉰 꽃이 피면서 심하게 갱년기 우울증을 앓았다. 그도 어쩌지 못하는 우울증이었다. 날마다 병원을 들락거리고 약봉지를 달고 살더니 어느 날 이렇게 선언하는 것이었다.

“나 이러다가 내 명대로 살지도 못하고 죽겠어요. 그러니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것이나 실컷 해 보고 죽을래요. 혹 알아요. 밖에 나돌아 다니면 안 아플지. 00 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문학 수강생을 모집한대요. 거기 등록해서 공부 좀 해 보고 싶어요.”

그는 화끈하게 박수를 치며 잘 생각했다고 격려했다.

아내는 문학소녀였다. 연애할 때 주고받은 편지만 봐도 문학적 소양이 다분했다. 그에게 시집와 살면서도 책을 멀리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알만했고, 늘 일기를 쓰는 것 같았다. 가끔 가계부의 빈칸에 긁적거려 놓은 글귀를 보면 문학적 재능이 다분히 있는 걸로 느껴졌다. 다만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고 사는 동물이라 문학에 무지한 남편을 만난 덕에 문학 문자도 입에 올리지 못하고 오랜 세월 타고난 자질을 썩히고 살지 않나 싶다.

두 아이가 학교 다닐 때 심심찮게 글을 써서 상을 타 왔다. 아이들이 문학적 재질을 타고났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흐뭇했다. 아이들이 자신을 닮지 않고 아내를 닮은 것이 고맙고 다행스러웠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내가 문학회다 계모임이다 하면서 밖으로 나돌기 시작하면서 아내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나긋나긋하고 수더분하던 모습이 조금씩 바뀌어 내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평소에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다소곳이 듣고 있을 뿐 말대꾸라곤 모르던 여자가 한 마디도 지지 않는 것부터 달라진 거다. 아내의 기가 살아나니 아픈 것도 덜한 건 사실이었다. 한 동안 아내는 아프다는 소리보다 나갈 일이 있다는 말을 더 많이 하게 되었다. 그는 좋은 일이라 생각했고,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갱년기 잘못 넘기면 부부 사이 이혼장이 오간다는 말도 들었던 터라 내심 걱정했었다.

그러나 요즘 들어 아내의 외출이 도를 넘는다 싶어 내심 속을 끓인다.

그는 텔레비전을 끄고 창가에 섰다.

아내의 차가 삽짝을 벗어나 골목을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는 아내의 차 뒤꽁무니를 눈으로 좇다가 현관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왔다. 강아지들을 못살게 굴던 수캐가 꼬리를 흔들며 뛰어온다. 아내의 사랑을 듬뿍 받는 녀석이다. 오동통하게 살 오른 두 살짜리 누렁이는 사람 말을 기차게 잘 알아듣는 영리한 녀석이다. 아내의 말을 빌리면 영물이란다.

“너 강생이들 못살게 굴지 마라. 그랬다간 안쥔한테 맞아 죽는다.”

그가 개의 목을 쓰다듬어주자 개는 기분 좋다는 듯이 고개를 쭉 빼더니 뒤로 발랑 드러누워 다리 네 개를 하늘로 향해 쫙 편다. 배를 문질러 달라는 뜻이기도 하고, 개가 배를 드러내고 눕는다는 것은 완전한 항복을 뜻한다고 했다. 수캐의 발그레한 잠지가 삐죽이 내다본다. 그는 장난 끼가 발동해서 그것을 툭툭 건드려본다. 발기된 개의 그것이 제법 삐죽이 나온다. 언젠가 여자들끼리 모인다는 무슨 모임에 갔다 온 아내가 호들갑을 떨면서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여보, 글쎄 과부들 중에 개 키우는 여자들 있잖우. 애완용 개도 개지만 커다란 셰퍼드 수캐를 키우는 이유가 따로 있답디다. 셰퍼드 거시기가 엔간한 남정네보다 더 크답니다. 힘은 또 얼마나 좋아요. 그러니 그 맛을 본 여자는 남자들하고는 재미가 없어 영 못 한대요.’

별 시답잖은 이야기나 들어온다고 퉁을 줬지만 누렁이를 유난히 애지중지하는 아내 생각이 나자 슬그머니 부아가 치민다. 말없이 순종하는 개의 천성이 맘에 든다고 생각하던 좀 전의 생각이 확 바뀌면서 발랑 드러누운 누렁이의 빳빳하게 발기한 그것이 밉살스럽다. 엄지와 금지를 맞잡아 세게 알밤을 먹었다.

깨갱! 누렁이가 발딱 일어나 도망을 친다. 고소해라.

그때였다. 어미 개에게 붙어 젖을 빨던 강아지 다섯 마리가 누렁이를 향해 우르르 몰려온다. 세상에 태어난 지 한 달반 된 아주 사랑스러운 진돗개 강아지다. 누렁이 새끼는 아니다. 암캐가 하얀 진돗갠데 한 집에 사는 누렁이에겐 곁도 주지 않고, 이웃집에 사는 하얀 진돗개 수캐랑 정분이 나서 낳은 강아지들이다. 강아지들이 누렁이에게 달려들자 알밤 한 대에 얼이 빠졌던 누렁이가 사정없이 강아지 한 마리의 목을 물어버린다. 강아지는 죽겠다고 깽깽거리며 바동거리고 다른 강아지들은 슬금슬금 어미 곁으로 도망을 친다. 어미개가 벌떡 일어나 누렁이를 향해 이빨을 드러낸다. 누렁이도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린다. 여차하면 한판 붙을 기세다.

“누렁아, 이리 와라. 하, 이놈 봐라. 주인에게 뺨 맞고 강아지한테 분풀이냐? 너도 참 밴댕이 소갈딱지다. 새가 많은 놈이구나. 이리 온. 너 강생이들 괴롭히면 주인마님한테 직사 하게 터진다. 알겠나?”

누렁이는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이 달려와 그의 바짓가랑이에 대가리를 처박고 그의 손바닥을 핥는다. 사람이 개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무리 구박을 해도 주인에게 복종한다는 거다. 아내가 저 개 같으면 오죽 좋을까.

그 사이 놀라 도망갔던 강아지 중에 간 큰 두 놈이 다시 달려온다. 이번에는 그에게 달려들면서 누렁이에게 애교작전도 편다. 누렁이는 다시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고, 강아지는 난 당신의 처분만 따를 거야. 나 좀 예쁘게 봐주세요. 하는 듯이 누렁이 앞에 납작하게 엎드려 꼬리를 살살 흔든다. 한 놈이 누렁이 앞으로 파고들어 녀석의 입을 핥는다. 누렁이가 다시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린다. 한 놈이 그의 손짓에 달려오자 누렁이가 먼저 그의 앞을 턱 가로막고 으르렁거린다.

그는 속으로 뜨끔 한다. 아무래도 누렁이 하는 행동이 예사롭지 않다. 평소 줄에 묶여 있을 때는 강아지들이 달려들어 아무리 괴롭혀도 가만히 있었다. 귀엽다는 듯이 강아지의 털을 핥아주지 않았던가. 꼭 누렁이가 그에게 당한 것을 강아지에게 앙갚음하는 것 같아 기분이 찝찝하다. 저 녀석을 묶어 두는 것이 나을 것인가 말 것인가, 잠깐 머릿속을 굴렸지만 오랜만에 제 스스로 줄을 푼 녀석이라 좀 더 자유를 만끽하도록 두고 보기로 했다.

그 사이 누렁이와 강아지들은 친해졌다. 사이좋게 잔디밭을 뒹굴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면서 장난을 친다. 설마 물어 죽이기나 하려고. 서로 좋다고 저렇게 물고 빠는데. 여편네가 괜한 말을 해 놓고 가니 기분만 찝찝하네. 그렇게 걱정되면 지가 묶어 두고 갈 것이지.

“누렁아 이리 온나.”

그는 누렁이를 불렀다. 누렁이는 그의 곁에 와서 나부죽이 앉는다.

그는 누렁이 목을 살살 어루만지면서 친구에게 하소연하듯 푸념을 늘어놨다.

“누렁아, 올해는 너의 해란다. 개띠 마누라도 암캐니 네가 내 대신 단속 좀 잘해 조야것다. 너도 생각해 봐라. 옆에 있는 암캐 딴 놈한테 뺏기고 남의 강생이 까불랑 거리니 너도 속깨나 썩제. 나도 너 짝 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정답게 누렁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이번에는 옆에 와서 알짱거리는 강아지 한 마리를 안고 일어섰다. 누렁이가 낑낑거리며 그의 다리에 몸을 비빈다. 강아지를 두고 저를 안아 달라는 시늉임을 모를 리 없지만 그는 이제 귀찮다. 너무 오래 밖에 있었더니 으스스 한기도 든다. 강아지를 마당에 내려놨더니 누렁이는 강아지를 덮치고, 강아지는 깽깽거리며 도망치다 다시 어우러져 노는 것을 보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아이들도 없는 집이 너무 썰렁하다. 아들과 딸이 객지에 나가 있으니 한 달에 한두 번도 집에 오지 않아 늘 집은 적적하다. 아내마저 글 쓰네 어쩌네 하면서 구석방 하나를 서재로 꾸미더니 잠자리도 자연스럽게 서재로 옮겨버렸다. 넓은 안방을 혼자 차지하고 자는 그로서는 외로움이 사무쳐 병이 될 조짐이지만 아내는 관심조차 없다. 몸이 좀 안 좋다고 하면 아내는 병원에 안 가고 뭐하느냐고 화부터 낸다. 밤에 자다 보면 슬그머니 아내 생각이 날 때가 있다. 베개를 들고 서재로 가서 아내의 젖가슴이라도 만질라치면 아내는 송충이 떼어내듯 하고는 돌아누워 새우잠을 잔다.

“여자가 달거리 끝나면 여자도 아니라 안 하요. 젊어서도 소 닭 보듯 하고 산 사람이 달거리 끝난 여자랑 잠자리할 생각을 하다니 당신도 참 할 일이 없는 갑소. 할 일 없으면 게이트볼이라도 치러 다니든가. 붓글이라도 쓰로 다니든가. 집에만 있지 말고. 요즘 삼식이 아저씨는 이혼 감이라는 것도 당신은 모르죠? 황혼이혼 안 당하려면 앞으로 처신 잘 하수.”

몇 번 퉁을 맞다 보니 언제부턴가 슬그머니 마음이 동하다가도 오므라들어버렸다. 또한 각방 거처를 하다 보니 남 아닌 남같이 되어버린 탓도 있었다. 물건도 자꾸 써야 길이 나서 반들거리고 힘이 오르지 안 쓰면 녹이 슬어서 못 쓰게 된다는 말이 맞는지, 남자도 갱년기를 앓는다더니 그게 참말인지, 나이 탓인지, 그도 잠자리 생각이 통 없어지고 말았다. 다만 마음으로는 아내랑 자주 외식도 하고, 여행도 다니고 싶어 벼르고 벼르다 슬그머니 둘이 여행이나 하고 오자고 운을 떼면

“당신하고 둘이 무슨 재미로 여행을 가? 젊어서 같이 다니고 싶을 때는 늘 혼자 밖으로 나돌더니 늙어 다리에 힘 빠지니 나랑 같아 가제? 당신하고 가 봤자 당신 챙겨주느라 나만 힘든걸. 당신도 당신 친구들이랑 가세요. 나도 여자들하고 같이 다니는 것이 더 재밌어요. 남자나 여자나 우리 나이쯤 되면 이성보다 동성이 좋다니까. 다들 기가 입으로 올라서 말로 오르가즘 다 느끼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

“당신 언제부터 그렇게 입이 거칠어진 거야, 그것도 달변씩이나.”

“다 늙어서 사람 된 거지. 여태 뭘 하고 살았나 싶어요. 당신하고 산 세월이 억울해서 그런가.”

말을 해 봤자 본전도 못 찾는다. 부부사이에 대화다운 대화가 과연 있기나 한 것인지. 그는 자꾸 말없음표 남자로 바뀌어 부부 사이도 서먹서먹해져 남같이 느껴졌다. 직장에 다닐 때는 몰랐던 부분이다. 늙어가는 부부는 함께 산다 뿐이지 정말 남보다 못할 수도 있는 사이구나 느낄 때가 많다.

그는 거실에 앉아 다시 텔레비전을 켰지만 금세 꺼버렸다. 일간지 S신문을 폈다. 황우석 박사의 이야기가 아직도 톱뉴스다. 이번에는 황우석 박사가 받아 챙긴 거액의 연구비가 문제다. 역시 돈이군. 돈이 개입되지 않으면 논문 조작이란 게 생길 리 없지. 세상이 온통 돈 돈 돈이야, 돈 돈 돈 하다가 돈다더니 돌겠군. 참말로. 하다가 그는 깜짝 놀란다. 혹 아내도 돈에 돌아버린 것은 아닐까.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매달 꼬박꼬박 봉급을 갖다 주던 때와 매달 받는 연금이라고는 하지만 봉급에 미치지는 못하니 돈 때문에 밖으로 나도는 것은 아닐까.

정말 아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저렇게 밖으로 돌도록 방치를 해야 옳은 것인가. 못 나가라 잡아야 옳은 것인가. 젊어서도 안 하던 짓을 하니 문학회란 것이 아내를 돌게 한 것인지, 계모임이 아내를 돌게 한 것인지, 동창회란 것이 아내를 돌게 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어딘가에 돌긴 돈 여잔데.

“깨갱 깽”

마당에서 강아지가 다급하게 짓지만 짐짓 못 들은 척 한다. 컴컴한 밖을 내다보기도 싫다. 저러다 말겠지. 애정표현이겠지. 개들은 원래 저렇게 애정표현을 하면서 커는 것이겠지. 부부도 젊어서는 저렇게 아옹다옹하면서 살지 않는가. 그때가 좋았는데. 싸울 때는 싸우더라도 화해하고 나면 한동안은 깨가 쏟아지도록 좋은 시절도 있었지 않는가. 그 열정이 다 식어버린 것일까. 아직 남자로서 쓸 만한데 왜 아내는 잠자리마저 기피하는 것일까. 아내가 자꾸만 밖으로 도는 것도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속으로만 끙끙 앓지 말고 아내랑 이야기를 나누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무슨 말이든지 해봐야 해결 방안도 마련될 것이 아닌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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