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단편소설>
식탐에 대하여
‘점심은 어딜 가서 무엇으로 배를 채우나’
그는 푹신한 안락의자를 뒤로 느긋하게 눕혀서 다리를 책상 위에 척 걸치고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반쯤 누운 채 눈을 감고 머릿속을 굴렸다. 온갖 산해진미가 떠올라도 도대체 먹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든다. ‘한 끼를 무엇으로 채우나’가 하루를 사는 일처럼 되어버렸으니 무엇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느냐가 문제다. 배는 등갓에 붙어 있는데. 그의 배를 채울 음식이 없으니 말이다. 아무리 맛깔스러운 음식이라도 그의 입에만 들어가면 소태 씹은 맛이 난다. 느끼하고, 비릿하고, 퀴퀴한 썩은 냄새가 진동이다. 그렇다고 그가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는 한 자리에 앉아 혼자서 쇠고기 5인분은 너끈히 먹어치우는 대식가다.
‘씨래이 죽이나 먹었으면.’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스스로 놀란 것이다. ‘씨래이 죽이라니.’ 시래기 국밥, 그런 것을 하는 집이 있을까. 언젠가 시래기 국밥을 찾아 재래시장을 온통 뒤지고 다닌 적이 있다. 우거지 탕, 선지 국 등, 시래기를 넣고 푹 끓인 탕이나 얼큰한 해장국은 있어도 어려서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그 시래기죽은 없었다. 시래기죽이란 무청 말린 것을 푹 삶아 물에 담가 놨다가 듬성듬성 썰어 넣고, 쌀이나 보리쌀, 혹은 좁쌀 한 주먹을 넣어 푹 끓인 죽을 말한다. 밥 알갱이보다 시래기가 더 많았던 그런 죽이다.
그때부터 그의 머릿속은 온통 시래기죽으로 가득 채워진다.
그는 책상 위에 놓인 인터폰을 눌러 여비서를 불렀다.
“사장님 부르셨습니까?”
“시래기 국밥집 어디 있나 알아봐. 아니, 무조건 국밥집 유명한 곳은 다 알아봐.”
“네”
여비서는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나갔다.
그는 다시 느긋하게 의자에 누워 눈을 감고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현재 그는 나이 오십에 키 177cm에 몸무게가 45kg이다. 길을 가면 짓궂은 사람들이 ‘저 사람 바람 불면 날아가지 버티겠나.’ 걱정한다. 아무리 헐렁하게 옷을 입어도 영양실조 걸린 사람처럼 ‘빼빼 장구’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다. 뱃속에 아귀가 들어앉아서 자꾸만 먹을 것만 탐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의 병은 식탁에 산해진미를 갖다 놔도 게 눈 감추듯 하지만 여전히 배는 등에 착 붙어 있다는 데 있다.
그렇다고 몸에 병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해마다 종합 건강 검진은 빠짐없이 받는다. 오래전 신혼 재미도 채 가시지 않은 이십 대 후반에 스물여덟이라는 젊은 나이에 아내는 그의 곁을 떠났다. 임신인 줄 알고 좋아했지만 검사 결과 자궁암 말기였다. 자궁 적출 수술을 했지만 그 해를 못 넘기고 이승을 떠났다. 아내가 허무하게 이승을 떠나는 것을 보고 암에 대해 유난히 예민해졌다. 물론 여자도 돌같이 보게 되었다. 그 후, 배는 고픈데 아무리 먹어도 살이 쏙쏙 빠지는 바람에 정말 자신의 몸에 암 덩이라도 자라는가 싶었다. 전국에서 이름난 병원이라면 안 가본 곳이 없다. 온갖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몸 구석구석을 살폈지만 이상은 없었다. 그다음엔 아내 잃은 정신적 충격 때문에 먹는 것에 탐닉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적도 있다.
그러나 정신적인 문제도 아니었다. 다행인 것은 현재 그가 원하는 음식이라면 세계 어느 곳이든지 날아가서 양 것 먹을 수 있을 만큼 재산가라는 것이다. 그 양 것이 아무리 먹어도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고통이지만.
“이놈의 뱃구레를 다 채워 주다가는 지둥 뿌리도 안 남것다. 우짜든지 니 뱃구리나 꽉 채우는 사람이 되거라.”
하면서 그의 아버지가 이름을 원식으로 지은 것도 다 식탐과 관계있다.
오죽하면 원도 한도 없이 배를 채울 수 있는 아이가 되라는 뜻으로 이름에 원할 원, 밥식 자를 써서 원식으로 지었을까. 성이 소 씨니 소의 배를 닮은 아이란 뜻도 있다.
“니 놓고 내가 병신 다 됐다 아이가. 무슨 아가 그리 컸는지.”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머니 죄송합니더. 저 때문에 그리 일찍 가셨겠지 예’ 가슴이 아려온다. 그랬다. 그는 태어날 때 이미 우량아였다. 몸무게 4kg이 넘었다. 요즘 태어나는 아이는 4kg이 보통이라지만 1950년 대 후반, 그 시절에 태어난 아이가 4kg이라면 신문에 날만큼 쇼킹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더구나 풀뿌리를 캐 먹고 살만큼 가난한 산간지방에서 태어난 아이 치고는 정상아라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보통 여자보다 큰 덩치에 젖통이 유난히 컸다. 길에 나가면 얼굴은 보이지 않고 젖통만 걸어간다 할 정도로 거대한 젖통 한 쌍을 가졌으니 거대아를 낳은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지만 문제는 거대한 젖통도 그의 배를 채워줄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이 놈이 젖을 빨모 창자까지 목구녕으로 빨려 올라온다니까. 무슨 뱃구리가 황소 뱃구리보다 더 큰지 원, 에미 창자까지 씹어 먹고도 배고프다 할 놈이다.”
어머니는 이를 악물고 가슴에서 아이를 떼어냈지만 아이는 필사적으로 젖꼭지를 물고 떨어지지를 않으려고 해서 어머니의 젖꼭지는 늘 헐어서 진물이 났었다. 덕분에 어머니의 젖을 일찍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억지로 떼 냈다는 말이 옳다. 그는 이유식 시작할 즈음에 벌써 밥그릇을 차고앉았다. 어머니의 젖통 두 개로도 다 채울 수 없는 밥통을 가졌으니 젖은 간식이고, 주식은 밥이 되었다.
그가 6개월이 되었을 때는 아버지의 밥그릇을 차고앉아 먹어야 했고, 좀 더 자랐을 때는 아예 큰 양푼에 밥을 퍼 담아 주어야 했다. 장골 밥 두 세 그릇도 한 자리에 앉아 뚝딱 먹어 치우는 아이였으니 가난한 그의 부모들은 멀 국으로 끼니를 때우기 예사였다. 아이는 먹는 것만큼 쑥쑥 잘 자랐다. 반듯한 이마에, 딱 벌어진 어깨며, 골격이 굵은 아이였지만 늘 배가 고파 허덕이는 것이었다.
“저어, 사장님,”
언제 들어왔는지 여비서가 책상 앞에 다소곳이 서 있다.
그는 눈을 번쩍 뜨며
“어, 그래, 찾았어?”
“국밥집은 여러 곳에 있지만 시래기 국밥 집은 없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김 부장 불러 차 대기시키라고 해. 그리고 며칠 나갔다 올 테니까 모든 업무는 김 부장이 알아서 처리하고 결과는 내가 온 후에 보고하도록.”
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옷걸이에 걸렸던 감청색 점퍼를 내려 어깨에 걸쳤다. 아무래도 그곳에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어린 시절 시래기죽을 먹고 자랐던 그곳, 어머니와 아버지가 묻혀 있는 골짜기, 지금은 펜션과 모텔, 찜질방, 고급 음식점이 즐비한, 관광지로 변해버린 그곳, 부자들 별장지대로 변해버린 그곳, 지리산 천왕봉 주릉 아래 있는 안골이었다.
“행선지라도?”
여비서가 눈치껏 묻는다.
그는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 하며 자신의 입술에 검지를 댔다.
여비서도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그렇게 그는 말없이 날아버리곤 한다. 행선지를 밝히지도 않았고, 회사에 연락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사장실이라는 문패를 달았지만 십오 층짜리 건물 안에 사무실 하나를 내놓고, 여비서와 김 부장이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의 손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이더스 왕의 손이었다. 무엇이든지 그가 만졌다 하면 황금으로 변해서 부를 축적해 주었다. 땅을 사면 땅값이 폭등을 했고, 아파트를 사면 아파트 시세가 몇 년 사이에 몇 곱절로 뛰어올랐다. 그의 재산이 얼마가 되는지 김 부장도 모르고 있을 정도다. 아니 어쩌면 그도 자신이 얼마만큼 부자인지 모른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아주 어려서부터 돈만 생기면 그 돈에 맞는 땅을 사서 전국 여기저기 놔뒀으니 시세로 따질 수 없다. 또한 현재 그는 혈혈단신이니 건물에서 나오는 세만으로도 통장은 현금이 차고 넘쳤다.
그는 승용차를 몰고 서울을 떠났다.
대진고속도로가 생긴 이래 그곳은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가 되었지만 그는 좀체 고향에 가지 않는다. 부모님 돌아가신 후 고향을 떠난 이래 몇 번이나 고향 땅을 밟았을까. 헤아려 보니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다. 그가 중학교 졸업할 무렵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일가붙이라고 있다 하나 그가 빌붙기에는 너무 가난한 산골이었으니 그는 미련 없이 고향을 떠났던 것이다. 가재도구를 고스란히 그대로 둔 채 도시 속으로 몸만 떠났었다.
그는 대진 고속도로를 달리며 어머니를 생각했다.
지지리 가난한 지리산 아래 안골 동네 소 씨 집안에 아귀 붙은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문이 났다. 그 집에 기둥뿌리도 남아나지 않겠다는 소문이 나 돈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아이를 보면 한숨부터 쉬었다. 죽자 살자 먹을 것만 찾는 아들의 배를 어떻게 채워줘야 할지 무서웠기 때문이다. 아이는 배탈도 하지 않았다. 고구마, 감자, 할 것 없이 밭에 심은 무조차도 날것으로 다 먹어 치워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였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저 놈은 뭐가 씐 놈인 거라.”
어머니는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기에 이르렀고, 점쟁이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소 씨 집안에 마가 끼었다는 것이다. ‘누구 해코지한 일’ 없느냐고 따지는데. 어머니는 간담이 서늘했다. 살다 보면 알게 모르게 남에게 해로운 일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다지 큰 죄짓지 않고 살아오는 것이 농사꾼의 근본이거늘 큰 잘못이 아니고서야 기억날 리 있겠는가마는.
어머니는 뒤가 개운치 않은 점이 있긴 있었다. 대 놓고 말하기 뭣하나 꼭 똥 누고 뒤를 닦지 않은 것 같이 찝찝한 것은 바로 그를 잉태할 때 꾼 꿈이다.
뒷 절의 죽은 그 어린 중이 생시처럼 탁발을 하려 왔다는데. 탁발할 바랑 주머니는 벌리지도 않고 다짜고짜 어머니 치마를 걷어 올리더니 그 속으로 쑥 들어갔던 것이다. 어찌나 민망하고 부끄럽던지 왜 이러냐며 자꾸만 치마 속의 그를 잡아내려 했지만 중은 간 곳 없고, 속곳만 열렸다 닫혔다 하는 것이었다.
그 꿈을 꾸고 달거리가 없었고, 배가 불렀던 것이다. 아무리 태몽이라 하나 어찌나 망신스럽던지 입 밖에 내 말을 해 본 적도 없지만 늘 어머니의 마음 한 구석을 무겁게 짓누르는 꿈이었다.
그 어머니 못지않게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안골 사람들이었다. 그의 어머니 앞에서는 듣기 좋은 말로 아이가 먹성이 좋아 참 튼튼하다고, 장래 장군감이라고 추켜세웠지만 돌아서면
‘먹성 좋은 아는 후제 커도 모지래는 법인데. 저 병신 아를 우짜것노. 저 아가 저리 된 것도 따지고 보모 우리한테 전혀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니. 험한 주검을 거둬 줄 생각도 않고 방치만 했으니. 그 아귀가 저를 거다 준 저 소가네 가서 붙은 거라.’
그렇게 안쓰러워도 하고, 제 집안일처럼 걱정도 했다. 또한 집집마다 부황이 들 정도로 먹을 게 귀한 시절이었지만 고구마 잔챙이든, 호박 속이든, 시래기 다발이든, 뭐든지 보태주면서 허기져 우는 어린것에게 먹이라고 내놓곤 했다.
나중에 알 일이지만 안골 사람들이 어린 원식을 걱정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어쩌면 일말의 가책을 느끼는 탓이었는지 모른다. 오래전에 자기들이 외면한 일을 원식이 아버지가 대신해 냈으니 말이다.
그럭저럭 아이가 예닐곱 살이 되었다.
동네 소문이 요상하게 변해갔다. 소 씨 집안에 먹보 병신 아들이 알고 보니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똘똘한 데다 힘도 천하장사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것이다. 아이는 서너 살이 되도록 살만 더럭더럭 쪄서 잘 걷지도 못하여 십중팔구 모자라는 아이일 것이라는 동네 사람들의 생각이 기우였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아부지 지도 지게 하나 맹글어 주이소. 아부지 따라 댕김서 낭구 해 올랍니더.”
어느 날 대뜸 원식은 제 아비를 붙잡고 자기에게 맞는 지게를 만들어 달라고 떼를 썼다.
처음에 아버지는 말 같지 않은 소리라고 우스개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정색을 하며 조르는 바람에 어찌나 성가신지 회초리를 들고 동네 애들과 사방치기를 하거나 딱지치기나 하면서 나가 놀라고 집 밖으로 쫓아냈지만 원식은 집요하게 매달렸다. 자기를 뚱보에 거북이라고 놀리는 아이들과 놀기보다 아버지 따라다니며 나무라도 해 오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것이었다. 일곱 살짜리가 하는 말이라도 이치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아이의 소원대로 아이 몸에 딱 맞게 지게를 만들어 주었다.
원식은 휘파람을 불며 제 아비를 따라 나무를 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버지가 해 주는 작은 나뭇단에 만족했지만 지게질에 익숙해지자 스스로 나뭇단을 만들어 지게에 져 날랐다. 장골 한 짐은 거뜬히 져다 나르고, 장작을 패도 장골 한몫을 해내니 나중엔 아비도 혀를 내둘렀다.
어린아이가 제 몸뚱이보다 큰 나뭇단을 해 나른다는 소문이 나면서 십리 밖에 있는 시장 통 사람들도 너도나도 그 아이를 한 번 보기 위해 나뭇단을 주문하니 집안 살림은 알게 모르게 날로 달로 펴져 나갔다.
원식은 아비와 함께 솔가리를 해다 집 옆 공터에 집채만큼 쌓아 놓고, 장작은 패서 양지바른 곳에 차곡차곡 쌓아 말렸다. 장작이나 솔가리가 바짝 마르면 달구지에 싣고 시장 통에 내다 팔았다. 그가 소 등에 앉아 달구지에 나뭇단을 가득 싣고 시장 통에 가면 시장 통 사람들은 땔감을 서로 사려고 야단이 났다. 겨우 예닐곱 살 될까 말까 한 어린애가 저보다 큰 나뭇단을 달구지에서 가볍게 내려 지게로 져다 집안으로 나르는 것을 보면
‘아이쿠 귀한 애기 장수님 납시셨네. 배가 출출하것다. 이것 좀 묵고 가거라.’
하면서 국밥집에서는 국밥을 퍼주고, 떡집에서는 떡 덩이를 내주었다.
‘다 제 물 복은 차고 나온다더니 우리 식이를 보모 그 말이 딱 맞는 거라.’
하면서 그의 어미 아비는 흐뭇해하고, 한편으론 집안의 자랑으로 여기게끔 되었다.
신기한 것이 또 있었다. 원식은 나뭇단을 팔면 꼭 제 몫의 돈을 챙겼다. 아비보다 나무를 많이 해 나르고, 나뭇짐도 커다 보니 나무 값도 더 받았다. 가령 나무 한 짐에 백 원을 받으면 십 원을 챙겼다. 그 돈으로 뭘 할 것이냐고 물어도 아이답지 않게 입을 꼭 다물었다. 어미조차도 그 돈의 쓰임새를 알 수가 없었다.
원식도 8살이 되어 면 소재지에 있는 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라 불렀다.)에 들어갔다. 원식이 8살이라고는 하나 키로 보나 덩치로 보나 속 찬 것으로 보나 중 고등학생쯤은 되어 보였다.
그 아들이 어느 날 아버지 앞에 커다란 항아리 하나를 들고 왔다. 땅속에서 파 내 왔는지 항아리 가에 흙이 묻어 있었다.
“아부지, 아부지가 주신 돈을 3년 동안 모운 긴데예. 이걸로 저 우 절 옆에, 골짜구 논이나 밭을 이 돈만큼만 사 주이소.”
아버지는 기함을 할 정도였다. 도대체 8살짜리 입에서 나올 법이나 한 말인가. 안골은 지리산 줄기에 있는 첩첩산중이다. 그때 시세로는 골짝 논밭은 돈으로 치지도 않았다. 평당 10원만 쳐 주어도 돈 벌었다 할 정도로 버리다시피 한 땅들이 수두룩했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이 하도 기특해서 시키는 대로 그 돈으로 땅 천 평을 샀다.
원식은 동네뿐 아니라 학교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공부도 잘하고, 통솔력도 있어서 요즘 젊은 애들 말로 하면 한 마디로 짱이었다.
안골에서 평생을 살아온 토박이 장 노인은 그를 볼 때마다
“허허 저 놈은 필시 그중이 환생 한 거여. 일찌감치 절에 보내 중노릇시키든지 아니면 지 업 갚음이나 하고로 푸줏간에 중노미로 보내는 기 저 놈 신상에 좋을 낀데.”
하면서 혀를 끌끌 차곤 했다.
장 노인의 말대로 라면 그중이 원수 갚음을 하려고 소 원식 씨의 어머니 뱃속을 빌려 환생을 했다는 이야긴데. 요즘 세상에 그런 미신을 믿을 사람이 있겠는가. 더구나 왜 하필이면 소 원식 씨의 어머니란 말인가. 원수를 갚을 요량이면 그 절을 불태우고, 중을 죽게 만든 큰들의 하 씨 집안의 자식으로 태어나야 옳지 않겠는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