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또다시 불안정한 상태로 돌아왔다. 하지만 전 보단 더 단단해진 상태임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미래에 대한 확신도 없고 '이렇게 사는 게 내가 원하는 삶일까?'라는 의구심을 품는 것도 여전했다. 많은 고민을 하지도 않은 채 전 직장에 사직서를 내고 5년 전 내가 계획했던 곳에 서류를 넣고 면접을 보았다. 하지만 서류를 내면서 나는 이 길로 가고 싶지 않음을 알 수 있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앞으로 가고 싶은 길이 없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보니 쉬는 날 없이 바로 다음 직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여전히 여기서도 적응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교대 근무에서 상근직으로. 남들처럼 나인투식스로 일을 하게 되었다는 점. 이제는 다른 사람들처럼 일요일 저녁 큰 소리로 쿵쿵 뛰는 심장소리와 불안감을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다시 서울로 왔다. 직장을 옮기면서 다시 3년 전처럼 나는 집에서 나와 서울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이 서울은 언제 봐도 화려하고 복잡했다. 그러면서도 나름의 감성을 가지고 있다. 나는 서울을 사랑한다. 그래서 다시 악착같이 서울로 온 것이다. 나름 웃기게도 서울에서 자취해 본 경력직(?)이라고 익숙한 듯이 저녁 어스름이 짙게 젖어들고 있을 때 혼자서 양손 가볍게 휴대폰만 챙겨든 채로 한강공원으로 갔다. 이제는 전과 달리 한강공원에 가려면 지하철을 몇 번 갈아타야 하지만 나는 만족했다.
오랜만에 혼자서 온 한강공원의 밤은 그림처럼 아름답게 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한강 다리에서 나오는 빛이 반사되어 반짝반짝 거리는 그 모습은 언제 봐도 질리지 않았다. 3~5년 전에 봤던 이 똑같은 장면, 똑같은 장소에서의 나는 분명 이제 막 사회로 나와 유약한 상태 그 자체였다. 이제 갓 사회로 나와 온갖 설움과 고통을 견뎌내야만 했을 때 나는 참 많이도 울었다. 그때는 이 아름다운 광경을 보면서도 그와 대비되는 내가 너무나도 초라해 보여서 너무나도 서러웠다. 너무나도 힘들었고 죽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지금도 많이 힘들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배워온 것처럼 견뎌내야만 했다. 다른 방법이 없다. 누가 나를 이끌어주는 것도 아니고, 내 삶은 오롯이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을 그 짧은 기간 동안 터득했기 때문이다. 힘들고 슬퍼서 주저앉는 그 순간마저도 사치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0대 초중반에 처음 서울로 와서 이제는 서른이 코앞이다. 이게 서른인가 싶었다. 어느새 단단해진 나를 보며 뿌듯할 때가 있다. 나는 유약했고 어리기만 했던 예전의 나를 가끔 떠올린다. 지금도 그때와 비교하면 무언가 대단한 업적을 갖고 있지만 나는 그저 조용히 버텨내고 그 시간을 견뎌냈을 뿐이다.
하루하루가 시간이 너무 안 가서 힘들었고, 이 일이 나에게 맞는 일인가 의심하며,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스스로를 원망하고 자책한 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어제 문득 한강을 걸으며 나는 꽤나 많은 사람들이 이 시간에, 그리고 월요일 전날인 오늘, 조깅을 참 많이도 하는구나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어제 한강을 간 것은 단순히 산책이 아니라 집에 있으니 심장이 크게 쿵쿵거리고 스스로 너무 불안정한 상태임을 깨닫고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지하철을 타고 무작정 예전처럼 한강공원에 갔던 것이었다. 다들 단순히 운동을 위해서일까? 아님 나와 같은 사람이 적어도 몇 명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저녁에 혼자 집에 있으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무작정 나와서 걷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척이나 아름답게 잠수대교는 멀리서도 반짝반짝거렸다. 파리의 에펠탑을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비슷한 느낌이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정신과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다. 여전히. 하지만 이제는 병원이 아니다. 나는 이 쪽 분야에서 일을 하며 정말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나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구나 싶었다. 물론 그들의 고통에 비하면 나는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어느 부분은 너무나도 공감이 되었다. 나만 힘든 게 아니었구나 라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정말 힘들게 살고 있었구나. 물론 경제적인 부분도 한 몫하는 것도 있지만 풍족하더라도 정신적으로는 빈곤한 사람들도 꽤나 많았다. 나는 매우 모순적인 사람이다. 그들에겐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하면서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와인을 몇 잔 마시며 긴장감을 풀고 있었고, 그들에겐 힘을 내 열심히 정신과 치료도 받고 꾸준한 상담을 통해 정서적 지지를 하고, 온갖 프로그램을 추천하며 들으라고 얘기하면서 나는 삶이 거지 같다고 불평불만을 토로하고 속으로 끙끙 앓고 있다. 스트레스로 인해 폭식과 알코올중독과 가까운 삶을 살았으면서 그들에게는 그러면 안 된다며 곁엔 우리가 있다 이런 소리를 하고 있다. 물론 정말 나는 나의 상태와는 별개로 그들에게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 나온 진심의 조언이었다.
최근에 나온 베스트셀러 '무정형의 삶'이라는 책을 읽어보았다. 단순히 전부터 나도 프랑스 파리를 가고 싶은 게 꿈이었기에 무슨 책인지도 모르고 덜컥 사서 읽었다. 작가님은 오랜 직장생활을 관두고 평소 꿈꾸던 대로 프랑스 파리에 가서 60일간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었다. 책을 읽으며 파리의 삶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고 나도 너무나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리에서 여유롭게 앉아 마시는 와인 한잔, 그리고 치즈. 내게는 너무나도 꿈같다. 현실적으로 나는 그만큼 보낼 수 있는 시간도 없고, 돈도 없다. 파리 공원에 앉아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여유를 즐기는 나, 그건 환상에 가까웠다. 그래서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가까이에서 환상을 체험할 수 있는 한강에 가 이어폰도 끼지 않고 멀리 한강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걸었다. 발바닥이 아팠지만 그거 나름대로 좋았다. 아직 더운 바람이 가시지 않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그 순간도 싫지만은 않았다.
서울은 정말 없는 것이 없다. 1인 가구를 위한 간편식도 정말 잘 되어 있고, 바로 옆 역만 가도 핫플이 즐비하다. 힙함과 감성,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이 삶을 유지하려면, 무엇보다 서울에서 머물기 위해선 악착같이 서울에 붙어서 일을 해야 한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 직업을, 이 직장을 때려치우고 나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삶을 살고 싶다. 여유롭게 서울 카페에 가서 노트북을 따닥거리고 아이패드로 끄적거리는 삶. 그 삶을 동경한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 삶을 택하는 순간 내 능력으로는 바로 서울의 집값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듯 쫓겨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속으로만 상상한다. 일이 끝나고 운동도 하고 공부도 하며 자기 생활도 챙기는 사람들은 정말 '갓생' 그 자체인 것 같다. 나는 일만 끝나도 침대에 엎드린 순간 기절한다. 최근 헬스를 시작했지만 사실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피곤에 절여져 무슨 운동이냐 싶은 날들이 거의 매일이다. 다들 정말 대단한 것이다. 정말 멋진 사람들.
다들 좋아하는, 자신만의 최애 도시가 있을 것이다. 그중 나는 서울인 것뿐이다. 서울에서 악착같이 사는 사람들 모두 오늘도, 내일도 파이팅이다. 혼자서 무작정 한강공원에서 이어폰도 안 끼고 한강을 향해 멍 때리는 사람을 본다면 그건 아마 나일 것이다. 생각난 김에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도 일 끝나고 한강공원에서 산책이나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