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 '단단한 고요'
여행의 묘미는 일상을 떠나 새로운 세상을 보고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 것에 있습니다. 일상에서 보고 들을 수 없었던 것에 대한 설렘과 그 설렘을 감동으로 전이시키는 힘이 여행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여행의 과정에서 견문(見聞)이 넓어지는 것이지요. 슬쩍 보고 듣는 시청(視聽)과는 다른 견문(見聞)의 성장이 여행에 있는 것입니다. 일상을 떠나 낯선 세계로의 여행에 대한 설렘과 감동은 시 읽기를 통해서도 가능합니다. 시인은 평범한 사물을 새롭게 보는 능력이 있고,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시를 읽으면 익숙한 사물에서도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고, 고요 속에서도 다양한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김선우 시인은 ‘단단한 고요’라는 시에서 도토리묵이라는 평범한 사물에 새로운 모습과 소리를 새겨 넣었습니다.
-김선우
마른 잎사귀에 도토리알 얼굴 부비는 소리 후두둑 뛰어내려 저마다 멍드는 소리 멍석 위에 나란히 잠든 반들거리는 몸 위로 살짝살짝 늦가을 햇볕 발 디디는 소리 먼 길 날아온 늙은 잠자리 채머리 떠는 소리 멧돌 속에서 껍질 타지며 가슴 동당거리는 소리 사그락사그락 고운 뼛가루 저희끼리 소근대며 어루만져주는 소리 보드랍고 찰진 것들 물 속에 가라앉으며 안녕 안녕 가벼운 것들에게 이별인사 하는 소리 아궁이 불 위에서 가슴이 확 열리며 저희끼리 다시 엉기는 소리 식어가며 단단해지며 서로 핥아주는 소리
도마 위에 다갈빛 도토리묵 한 모
모든 소리들이 흘러 들어간 뒤에 비로소 생겨난 저 고요
저토록 시끄러운, 저토록 단단한,
전체 3연으로 되어 있습니다. 1연은 행을 구분하지 않고 전체를 한 행으로 처리해 산문적인 느낌을 줍니다. 그러다가 2연에서는 1행을 하나의 연으로 처리했습니다. 시상이 집중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도토리묵’에 시상이 집중되어 이 시의 중심 소재가 도토리묵임을 알게 해 줍니다. 3연은 도마 위에 올려져 있는 도토리묵에 온갖 소리들이 들어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모습과 소리들이 도토리묵에 담겨 있는지 그 새로움의 세계로 안내하는 것은 1연의 몫입니다. 1연은 도토리묵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순차적으로 보여주고 들려줍니다. 도토리묵을 만드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낯선 세계에서 새로운 사물을 만나는 여행을 하듯이 도토리가 묵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모습과 소리로 느끼게 해줍니다.
도토리 알이 마른 잎사귀에 얼굴을 비비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지요? 잎사귀 덕분에 도토리가 이만큼 자라고 익었습니다. 잎사귀는 도토리에게 영양분을 공급해주면서 때로는 비바람을 막아주고, 때로는 자장가를 들려주면서 그 싱싱하던 잎사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도토리에게 내주고 이제는 사그락거리는 소리만 남았습니다. 도토리는 그 고마움을 마른 잎사귀에 얼굴을 비비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어머니와도 같던 그 잎사귀와 이제 이별해야 할 시간입니다. 도토리들이 후두둑 지상으로 떨어집니다. 떨어지는 소리는 들리지만 멍드는 소리는 들리지 않을 텐데 시인의 귀는 너무도 밝아 멍드는 소리마저 듣습니다. 마른 잎과의 이별을, 보금자리를 떠나는 슬픔의 소리가 시인의 귀에는 멍드는 소리로 들린 것이 아니겠는지요.
멍석 위에서 도토리가 햇빛에 말라가고 있는 장면을 시인은 예사롭게 보지 않습니다. 도토리의 몸에 늦가을 햇살이 내려앉았을 뿐인데, 시인은 잠든 도토리 몸 위로 지나다니는 햇볕의 발자국 소리를 듣습니다. 도토리 몸 위를 배회하는 잠자리의 날갯짓 소리와 채머리 떠는 소리도 듣습니다. 이들의 소리가 있기에 도토리는 늦가을 멍석이 외롭지 않습니다. 늦가을 햇볕과 잠자리를 자장가 삼아 도토리는 한숨 잘 자고 일어납니다.
맷돌 속에서 도토리는 껍질이 벗겨지며 가루가 되어갑니다. 시인은 도토리의 가슴 뛰는 소리를 듣습니다. 새로운 세계로의 변이에 대한 설렘이 가슴 동당거리는 소리로 들렸나 봅니다. 가루끼리 부딪치는 소리는 보통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데 시인의 귀에는 소근대며 서로를 어루만지는 소리로 들립니다.
이제 가루가 된 도토리는 도토리묵이 되기 위해 물이 가득한 가마솥에 들어갑니다. 찰진 가루는 가라앉고 가벼운 가루는 뜹니다. 이런 당연한 이치마저도 시인의 눈과 귀에는 예사로 보이지 않습니다. 서로를 어루만지던 가루는 같은 솥에 있으면서도 찰진 가루와 가벼운 가루가 위아래로 나누어집니다. 여기에서 시인은 가루가 이별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가마솥 아궁이에 불을 지핍니다. 이별했던, 위아래로 나누어졌던, 찰지고 가벼운 가루들이 다시 엉깁니다. 엉기는 소리가 얼마나 큰지 이 소리마저 시인의 귀에는 들립니다. 엉긴 채 식어가며 단단해지며 서로를 핥아주는 소리마저 듣습니다. 도토리묵이 되기 위해 긴 여행을 떠나왔다고, 서로에게 고생했다고, 그래서 이렇게 새로움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고 서로를 위로하는 소리를 시인은 듣습니다.
마른 잎사귀와 늦가을 햇볕과 가마솥의 도움을 받아, 그리고 서로를 어루만져주기도 하고 이별하기도 하고 다시 만나기도 하면서 드디어 다갈빛 도토리묵이 탄생했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연하고 말랑말랑한 것 같지만 그래서 고요한 것 같지만, 도토리묵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수많은 소리들이 도토리묵에 들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토록 단단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서정주 시인은 ‘국화 옆에서’라는 시에서 한송이 국화꽃은 봄의 소쩍새 울음소리와 여름의 천둥소리와 가을의 무서리를 견디면서 피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핀 국화꽃의 원숙미가 돋보이듯이 우리의 내면도 국화꽃처럼, 도토리묵처럼 삶의 곡절들이 많을수록 고요하고 평온해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김소월 시인은 ‘접동새’라는 시에서 접동새의 울음소리를 ‘접동 / 접동 / 아우래비 접동’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뻐꾸기는 뻐꾹뻐꾹 울고, 부엉이는 부엉부엉 울고, 소쩍새는 솥적다고 울기에 뻐꾸기, 부엉이, 소쩍새가 명명(命名)이 된 것입니다. 접동새도 ‘접동접동’이라고 우니까 접동새라고 명명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접동새가 ‘아우래비 접동’이라고 우는 것처럼 시인의 귀에는 들립니다. 왜 ‘접동’이 ‘아우래비 접동’으로 들릴까요? 접동새에는 이런 설화가 있습니다. 설화이니 다양한 버전으로 유통됩니다.
옛날, 어느 부인이 딸 하나와 아들 아홉을 낳고 죽었습니다. 후처로 들어온 계모가 전처 소생의 자식들을 몹시도 구박합니다. 딸은 혼기가 차서 이웃집 총각과 혼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혼수가 탐이 난 계모가 딸을 장롱에 넣고 불을 질러 태워 죽입니다. 아홉 동생들이 불탄 재를 헤치니 그 속에서 접동새 한 마리가 날아갔습니다. 죽어서 접동새가 된 누이는 아홉 동생이 그리워 한밤중에 찾아와 서럽게 웁니다.
시인의 귀에는 접동새가 ‘아홉오래비(아우래비)’가 그리워 우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니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시인의 귀는 참으로 섬세합니다.
김종길 시인은 ‘여울’이라는 시에서 ‘은피라마떼 / 은피라떼처럼 반짝이는 / 아침 풀벌레 소리’라고 했습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화자는 여울을 건너갑니다. 여울을 건너면서 아침 풀벌레 소리를 듣습니다. 그 소리가 어찌나 맑고 밝은지 물 위를 뛰어오르는 은피라미떼가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으로 들립니다. 소리마저도 눈에 보이듯이 그려낼 수 있는 시인의 눈과 귀는 참으로 섬세합니다.
행복은 오감(五感)을 일깨우는 것이라고들 합니다. 그림을 보는 것도, 음악을 듣는 것도, 여행을 통해 새로운 것을 보고 듣는 것도 오감을 일깨우는 것이고 이것은 행복의 요소가 됩니다. 그림이나 음악이나 여행을 통해 새로운 것을 보고 들을 수도 있지만, 시인의 눈과 귀에 비친 세계를 더듬어 가는 것도 오감을 일깨우는 여행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시를 읽는 것이 낯선 세상을 여행하는 것만큼이나 행복을 위한 값진 일이 아니겠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