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민복, '부부'
관찰(觀察)과 통찰(洞察)의 의미를 구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눈에 보이는 부분을 살피는 것이 관찰이라면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살펴 아는 것이 통찰이라는 구분법도 있습니다. 법륜 스님은 ‘즉문즉설’이라는 공개적인 상담 코너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고민과 괴로움을 해소해 주고 있습니다. 상담 내용은 부부(夫婦) 문제, 자녀(子女) 문제가 많습니다. 남편이나 자식으로 인한 고민과 괴로움을 즉석에서 묻고 즉석에서 심리적으로 시원하게 해결해 주는 것이 즉문즉설의 묘미입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자녀도 양육해 본 적이 없는 스님이 어떻게 해결의 지침을 줄 수 있겠는지요. 그러나 명쾌하게 해결의 지침을 줍니다. 바로 통찰의 힘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나무의 크기를 보면 땅을 파 보지 않아도 뿌리의 크기를 알 수 있듯이, 고민과 괴로움의 내용을 들어보면 대부분 상대방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라는 것을 알기에 즉석에서 처방이 가능합니다. 괴로움의 원인은 상대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상대방을 바꾸어야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꾸어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처방은 고락(苦樂)의 원리가 바탕이 된, 법륜 스님의 통찰력에서 나옵니다.
여기 결혼도 하지 않고 결혼 생활의 모범 답안을 작성한 시인이 있습니다. 함민복 시인은 ‘부부’라는 시에서 결혼이라는 것은 서로에게 맞추어 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함민복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도 안 된다
걸음의 속도도 맞춰어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
‘부부’라는 이 시는 늦깎이 결혼을 한 함민복 시인이 결혼하기 전에 쓴 시입니다. 결혼도 하기 전에 ‘올바른 부부의 길’을 어떻게 알고 이 시를 썼는지 궁금합니다. 그러나 결혼의 경험으로 행복한 결혼 생활을 아는 것이 아니라 바람직한 인간관계로 미루어 행복한 결혼 생활을 아는 것이지요. 이것이 통찰의 힘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기본은 서로 맞추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통찰의 바탕이 된 것입니다. 서로 맞춘다는 것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맞추기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상대방에게 맞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식은 법륜 스님이나 함민복 시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혼자 밥을 먹을 때는 자신이 먹고 싶은 것만 밥상 위에 올려놓고 먹으면 됩니다. 식탁에서 먹든 TV 앞에서 먹든 필요한 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먹든 상관 없습니다. 결혼을 하고 2인상에서 밥을 먹을 때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만 밥상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고 고집할 수 없습니다. 결혼은 단지 2인상이 문제가 아닙니다. 친가와 처가, 시집과 친정 식구들이 모일라치면 긴 상에 더욱 다양한 음식을 올려놓아야 하고 때로는 긴 상을 옮기기도 해야 합니다. 긴 상은 혼자 들 수도 없습니다. 수평을 맞추어 같이 들어야 합니다. 상황에 따라서 상을 들고 옆으로 걸어야 할 때도 있고 뒤로 걸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높낮이가 다른 곳을 이동할 때는 높이와 속도를 맞추어야 합니다. 자칫 수평과 속도를 맞추지 못하면 애써 만들었던 음식들이 와그르르 쏟아질 수도 있고 그릇들이 와장창 깨질 수도 있습니다. 수평과 속도를 맞출 때 누구를 기준으로 해야 되겠는지요. 자신이 상대방에 맞추는 것이 쉬운지 상대방이 자신에게 맞추는 것이 쉬운지 난이도로 보면 자신이 상대방에게 맞추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더 쉬운 길을 두고도 상대방이 자신에게 맞추지 못한다고 불평을 하고 상대방을 나무라서야 되겠는지요. 자신이 상대방에게 맞추면 화를 낼 일도 없고, 상대를 나무랄 일도 없으니 일석이조(一石二鳥)가 아니겠는지요.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여러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관계를 형성해야 하는지 시를 통해 배웁니다.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세밀하게 관찰하고 독자에게 보여주는 시인의 생각을 시를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심리학 이론에 ‘조명효과(Spotlight effect)’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배우처럼 자신도 불특정 다수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이 이론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볼 때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어느 심리학자의 실험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이 심리학적 실험의 결과를 ‘손철주’ 미술평론가는 ‘뼈 빠지는 수고를 감당하는 나의 삶도 남이 보면 풍경이다’라고 시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에 대해 박웅현 작가는 『책은 도끼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삶이 그 사람한테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지만 멀리서 보면 행복해 보인다는 것이죠. 그러고 보니까 모든 근경은 전쟁이고, 모든 원경은 풍경 같습니다. 멀리서 바라볼 때 지게를 지고 가는 아저씨는 낭만적이지만 정작 지게를 진 아저씨는 뼈가 빠지겠죠.”
나무꾼이 나무를 한 짐 지고 갑니다. 시장에 내다 팔아야 노모를 비롯한 여섯 식구가 먹고 삽니다. 삭정이 하나도 솔방울 하나도 생계와 직결됩니다. 나무 한 짐을 하기 위해서는 전쟁과 같은 현장을 누빌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멀리서 보면 이 나무꾼은 동화 속의 인물이고 그림 속의 인물일 뿐입니다. 동화를 열고, 그림을 열고 나무꾼을 만나보면 뼈 빠지는 나무꾼의 수고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무꾼을 만나보지 않고도 나무꾼의 수고를 아는 시인의 통찰력을 초등학생 시인을 통해 만날 수 있습니다.
-강원 사북초등학교 5년 이은희
학교에 오다가
곡마단 하던 언니를 봤다.
언니는 애기 둘을 업고
내 옆으로 지나갔다.
옷은 다 떨어지고
머리는 헝클어지고
아슬아슬하게 그네 타는
언니 같지 않았다.
[출처]나도 쓸모 있을걸』(이오덕 엮음)
초등학생 화자는 아슬아슬하게 그네 타는 곡마단 언니를 전지전능한 존재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초등학생은 ‘옷은 다 떨어지고 머리는 헝클어진’ 채, ‘애기 둘을 업고’ 지나가는 곡마단 언니의 모습을 봅니다. 슬쩍 보고 지나면 그만일 텐데 초등학생의 눈은 그것을 정확하게 관찰해 냅니다. 이 관찰은 머리가 헝클어진 채 지나가는 언니는 더 이상 ‘아슬아슬하게 그네 타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닌 것으로 인식합니다. 관찰이 통찰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멀리서 볼 때는 위대한 능력의 소유자였던 언니가 가까이서 보니 삶의 괴로움을 주렁주렁 달고 사는 사람 같았다는 이 초등학생의 생각이 바로 통찰의 힘입니다.
초등학생 화자의 생각이 바로 시인의 생각이고 시인의 통찰력입니다. 아슬아슬하게 그네를 타는 곡마단 언니가 전지전능하게 보였듯이 뼈 빠지게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해야 하는 나무꾼의 모습이 낭만적으로 보이는 것은 통찰 이전의 눈에 포착된 것입니다. 그러나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다 떨어진 옷을 입은 언니는 더 이상 아슬아슬하게 그네 타는 언니 같지 않았다는 인식이나, 뼈 빠지게 일해야 하는 아저씨의 수고로운 삶에 대한 인식은 통찰의 눈이 아니면 볼 수 없습니다.
조선시대 이달(李達)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글재주는 뛰어났으나 서자(庶子)로 태어났기에 과거에 응시할 생각은 하지 않고 시를 지으며 한평생을 살았습니다. 이달(李達)이 지은 한시 중에 ‘박조요(撲棗謠)’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대추 따는 노래’라는 뜻입니다.
-이달(李達)
인가소아래박조(隣家小兒來撲棗)
이웃집 꼬마가 와서 대추를 따네
노옹출문구소아(老翁出門驅小兒)
늙은이가 문을 나와 꼬마를 내쫓네
소아환향노옹도(小兒還向老翁道)
꼬마가 돌아서며 늙은이에게 하는 말
불급명년조숙시(不及明年棗熟時)
내년 대추 익을 때까지 살지도 못할 거면서
노옹의 집 대추나무에 대추가 잘 익었습니다. 대추가 더 익기를 기다리는지 대추를 딸 힘이 없어서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노옹은 대추를 딸 생각이 없습니다. 이웃집 꼬마의 눈에는 대추가 너무나 먹음직스럽습니다. 나무 막대로 대추나무를 치면서 대추를 땁니다. 문밖 출입마저 자유롭지 못한 노옹은 겨우 문밖에 나와 이웃집 꼬마를 내쫓습니다. 꼬마가 노옹을 향하여 한마디 던집니다. ‘내년 대추가 익을 때까지는 살지도 못할 거면서’
결구(4행)에서 꼬마의 통찰력이 돋보입니다. 내년 이맘때까지 노옹이 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대추를 따지 못하게 하는 노옹에 대한 악담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결구(結句)에는 현재 대추 하나 딸 힘도 없는 노옹에게 더욱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꼬마의 통찰력이 담겨 있습니다. 자신에게 필요하지도 않은 대추 한 알이 더 필요한지, 대추 한 알이 꼭 필요한 사람에게 대추 한 알을 주는 것이 더 필요한지에 대한 꼬마의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꼬마는 현실의 인물이 아니라 ‘이달(李達)’이라는 작가가 창조한 인물이니 꼬마의 생각은 작가 이달(李達)의 생각입니다.
대추 하나 딸 힘도 없으면서도 자기의 것은 대추 한 알이라도 남에게 줄 수 없다는 욕심과 몰인정은 죽음도 막기 어렵다는 통찰의 힘을 꼬마를 통해 작가 이달(李達)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 있을 때 나누어주면 인정과 배풂으로 칭찬받지만, 죽을 때까지 움켜잡고 있으면 몰인정과 탐욕으로 손가락질당한다는 삶의 진리가 이달(李達)이라는 시인의 생각인 것입니다.
명심보감(明心寶鑑)에 ‘人無百歲人 枉作千年計(인무백세인 왕작천년계)-백년도 못사는 인생, 부질없이 천년의 계획을 세우는구나’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런 삶의 이치를 대추 한 알로 표현해 내는 힘이 시인의 생각의 힘이고 시인의 통찰력입니다.
시인의 눈은 너무나 섬세해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까지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보이지 않는 부분을 시(詩)라는 옷을 입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원리가 무엇인지 긴 상을 들고 가야 하는 부부의 삶을 통해 보여주기도 하고, 삶의 화려함 이면에 있는 삶의 고뇌를 곡마단 언니를 통해 보여주기도 하고, 생사를 초월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노옹과 꼬마를 통해 보여주기도 합니다. 우리는 시인의 눈에 비친 생각의 세계를 따라가면서, 마치 보물창고를 들여다보듯이 시인의 생각을 들여다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