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의 선택
김소진 작가(1963~1997)의 ‘쥐잡기’라는 소설은 이데올로기의 선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줍니다. 주인공 ‘민홍’의 아버지는 함경도가 고향으로 6.25 때 북한군으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됩니다. 휴전과 함께 포로들은 각자의 의사에 따라 이남과 이북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복도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남을 선택할 사람은 이쪽에, 이북을 선택할 사람은 저쪽에 앉으면 그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의 선택이 되는 겁니다.
‘아버지’가 처음 앉은 자리는 이북 쪽이었습니다. 수용소 안에서 ‘아버지’와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이 모두 이남 자리로 넘어가서 ‘아버지’를 이남 쪽으로 넘어오라고 합니다. 이남 자리로 옮겨가게 됩니다. 순간 부모와 처자가 있는 고향의 모습이 눈에 밟혀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이북 자리로 옮겨가게 됩니다. 갈등이 요동칩니다. 이때 ‘그만’ 하는 소리와 함께 호각이 울리게 됩니다. 복도는 이미 복도가 아니라 삼팔선이 된 겁니다. 차오르는 숨을 가누지 못해 고개를 쳐든 ‘아버지’의 눈에 천정의 들보를 기어가는 ‘흰쥐’가 눈에 들어옵니다.
수용소 안에서도 일부 좌익과 우익의 갈등은 목숨을 걸 정도로 살벌합니다. ‘아버지’는 ‘흰쥐’ 덕분에 살벌한 좌우익의 갈등 속에서 목숨을 건지게 된 사건을 떠올리며 들보 위를 기어가는 ‘흰쥐’를 따라 이남을 선택합니다. ‘언젠가 돌아가겠지’라는 생각으로 아들이 대학생이 될 때까지 남쪽 이데올로기 속에서 조그마한 가게를 운영하며, 무기력하게 삽니다.
가게에 ‘쥐’가 나타나 가게의 물건들을 엉망으로 만듭니다. ‘아버지’는 쥐잡기에 집착합니다. 가게의 물건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도 엉망으로 만들었다고 보았기 때문이죠. 실향민으로서의 한을 만들어 준 것도, 무능한 가장으로서의 무력감을 만들어 준 것도 수용소에서 ‘흰쥐’이고, 이놈이 가게의 ‘쥐’와 겹쳐지면서 쥐잡기에 집착하게 된 겁니다.
‘아버지’는 고향과 가족을 넘어설 정도의 신념을 가지고 이데올로기를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흰쥐’가 ‘아버지’의 이데올로기를 선택하게 했죠. 어쩌면 그 당시 ‘아버지’에게 이남과 이북의 선택은 ‘흰쥐’가 들보 위를 기어다니 듯이 이웃 마을에 나들이하는 정도로 생각했을지도 모르지요. 만약 ‘아버지’가 수용소에서 이남을 선택하지 않고 이북을 선택했다면 어떤 삶이 펼쳐졌을까요?
‘쥐잡기’와 달리 최인훈 작가(1936~2018)의 ‘광장’에서는 주인공의 신념에 따라 이데올로기를 선택하게 됩니다.
‘광장’은 한국 전쟁 전후를 시대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이명준’은 철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입니다. ‘아버지’의 친구 집에 얹혀살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월북(越北)하여 대남방송에 등장하기도 하죠. 이 때문에 ‘이명준’은 경찰서에 불려가 구타를 당하면서 심한 조사를 받고 공산주의자로 규정됩니다. 남한에서 진정한 삶의 광장을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한 ‘이명준’은 월북을 하게 됩니다. 이 당시 남북을 오가는 일은 금지되었지만 비밀스럽게 왕래를 했나 봅니다. 월북한 이명준은 북한에서도 공개된 명령과 복종만 확인했을 뿐, 진정한 삶의 광장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때 6.25가 발발하게 됩니다. ‘이명준’은 인민군으로 참전하게 되고, 포로가 됩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쥐잡기’의 ‘아버지’처럼 포로 송환 과정에서 남한과 북한 중에서 선택을 강요받게 됩니다. 북측 이데올로기로 무장된 장교들이 ‘이명준’을 설득합니다. ‘일터’, ‘연금’, ‘인민의 영웅’ 등의 말을 동원하지만 ‘이명준’은 ‘중립국’을 선택합니다. 이어서 남측 이데올로기로 무장된 장교들이 ‘이명준’을 설득합니다. ‘자유’, ‘조국’, ‘지식인의 역할’ 등으로 설득하지만 ‘이명준’의 ‘중립국’은 요지부동입니다.
‘이명준’은 중립국으로 가는 배 ‘타고르 호’를 타고 갑니다. 남한에도 북한에도 진정한 삶의 광장이 없다고 판단한 ‘이명준’ ‘큰 새’와 ‘작은 새’가 넓은 바다의 광장에서 자유롭게 마음껏 날아다니는 모습을 봅니다. ‘이명준’은 ‘큰 새’와 ‘작은 새’에서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채 죽은 여인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사랑이 있고, 자유가 있고, 넓은 광장이 있는 곳, 바다야말로 진정한 삶의 광장이라고 여기고 투신하게 됩니다. ‘타고르 호’는 한 사람의 손님을 잃었지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항해를 계속 합니다.
‘바다’에 투신한 ‘이명준’의 선택을 옹호하거나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선택을 존중하고 자신이 선택한 ‘삶’에게 물도 주고 거름도 주면서 잘 가꾸어 나가지 못한 점이 아쉬울 뿐입니다. 남한 사회든 북한 사회든 사회 전체를 통째로 바꾸기는 어렵고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나에게 좋은 삶의 광장이라고 모두에게 좋은 삶의 광장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죠. 전체를 인정하면서 나의 삶의 공간에서 나의 삶을 옹호하는 사람들과의 광장을 만들어 살아가는 ‘이명준’이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김종삼 시인(1921~1984)의 ‘민간인(民間人)’이란 시도 이데올로기와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1947년 봄
심야(深夜)
황해도 해주(海州)의 바다
이남(以南)과 이북(以北)의 경계선 용당포(浦),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孀兒)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水深)을 모른다.
-김종삼, ‘민간인(民間人)’
1945년, 광복을 맞이했지만 분단이 시작되었습니다. 1947년은 이남과 이북으로, 이북에서 이남으로 왕래는 금지되었지만,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이 월북한 것처럼, 비밀스럽게, 위험을 무릅쓰고 오갑니다. 바다로 배를 타고 움직이려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황해도 해주’로 보아 이북에서 이남으로 오려는 것 같습니다. 노 젓는 소리도 나지 않을 정도로 고요한 바다입니다. 순간 갓난아이가 울기 시작합니다. 감시병에게 발각되면 모두가 무사하지 못합니다. 내가 살기 위해 갓난아이를 죽여야 합니다. 엄마가 안고 있는 ‘영아’를 누군가 빼앗아 바다에 던집니다.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이를 죽인 이데올로기의 깊이를 아무도 모릅니다.
전쟁은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가장 잔인한 행위입니다. 절대 용서될 수 없는 행위를 전쟁이란 이름으로 용서를 합니다. 많이 죽일수록 영웅으로 추앙되는 것이 전쟁의 아이러니입니다. 민간인(民間人)이 남을 죽이면 살인이죠. ‘영아’는 이데올로기를 모릅니다. 아니 살기 위해 우는 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습니다. 선택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 잘못도, 아무 선택권도 없는 영아처럼 남의 선택에 의해 죽어가는 사람이 더 이상 나오지 않기를, 더 나은 삶을 위해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기를, 시인은 담담하게 그러나 강렬하게 소망하지 않았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