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가을에 읽기 좋은 시

by 인문학 이야기꾼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함민복, '가을'

‘가을’을 제목으로 한 한 줄로 된 시입니다. 한 줄이지만 깊은 정서적 울림과 삶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하는 시입니다.

TV나 라디오를 켜 놓은 채 잠든 적이 있습니다. 나는 잠을 자고 있지만 TV나 라디오는 쉼없이 노래를, 뉴스를, 여러 이야기들을 내 귀에 속삭입니다. 나는 자고 있지만 TV나 라디오는 깨어 있습니다. 라디오 대신에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나는 잠을 자고 있지만 잠을 자는 중에도 당신 생각을 합니다. 당신이 불러준 노래나 당신이 전해준 여러 이야기들을 자면서도 생각을 합니다. 밥 먹을 때도 생각하고 하루 24시간, 86,400초 잠시도 쉬지 않고 당신 생각을 합니다.

당신이 무엇인지, 당신이 누구인지는 독자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수험생의 당신은 공부이겠지요. 돈을 당신으로 보는 사람도 있겠지요. 도회지로 공부하러 간 자식을 둔 어머니에게 당신은 자식이겠지요. 어머니 생각을 켜 놓은 채 잠이 든 자식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 가을에 당신은 연인이 어울릴 듯합니다. 제목이 ‘가을’인 것으로 보아 화자는 남자일 것 같습니다. 화자가 여자라면 제목은 ‘봄’이 어울리겠죠. 봄은 여자의 계절이고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하니까요.

한 남자가 있습니다. 낮 동안 연인과 함께 있다가 저녁에 잠시 헤어졌습니다. 내일 만나기로 했는데 밤 사이 연인에 대한 그리움이 해일처럼 밀려옵니다. 정일근 시인은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라는 시에서 ‘산이라도 날려 보낼 것 같은 그리움’이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자면서도 연인을 생각하는 이 남자는 밤이라는 시간을 날려 보낼 것 같은 그리움을 이렇게 한 줄로 표현했습니다.


나는 누구의 생각을 켜놓은 채 잠든 적이 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떠오르지 않습니다. 누군가 나를 생각하면서 나를 켜놓은 채 잠든 적이 있는 사람을 떠올려 봅니다. 도회지에서 공부할 때 어머니가 떠오릅니다. 어머니라면 몇 번 정도는 내 생각을 켜놓은 채 잠든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생각을 켜놓은 채 잠들 수 있는 대상’ 세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나’를 생각하면서 ‘내 생각을 켜놓은 채 잠들 수 있는 사람’이 세 사람이 있다면 풍성하고 넉넉한 인생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 가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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