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소묘

가을 소리가 나는 가을 시(詩)

by 인문학 이야기꾼

가을 소묘

함민복


고추씨 흔들리는 소리

한참 만에

에취!

바싹 마른 고추가

바싹 마른 할머니를 움켜쥐는 소리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마당가 개도

취이!

마주 보는 주름살

다듬는

세월


가을 햇살만 고즈넉하게 내려앉은 농촌 마당입니다. 할머니가 마당에 앉아 바싹 마른 고추를 다듬고 있습니다. 마른 고추는 제 몸통끼리 부딪혀 바스락거립니다. 몸통 안에 있는 고추씨도 몸통에 부딪혀 바스락 소리를 냅니다. 주위가 고요하니 고추씨 흔들리는 소리가 크게 들립니다. 할머니는 가을 햇살이 아까워 고추를 좀 더 말리기 위해 이리저리 뒤집습니다. 고추는 마른 몸을 너무 휘젓는다고 앙탈을 부립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만큼이나 매운맛을 할머니 코에 뿌립니다. 고추처럼 마른 할머니는 참지 못하고 재채기를 합니다. 할머니의 마당이 얼마나 고요했는지 재채기 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집니다. 마당가에 있던 개도 덩달아 재채기를 합니다. 고요하던 할머니의 마당은 고추씨 흔들리는 소리와 재채기 소리로 잠시나마 활력을 찾습니다.

마른 고추와 할머니와 개는 주름살로 하나가 됩니다. 주름살은 세월의 흔적이죠. 이 고즈넉한 가을 햇살 아래 함께 할 수 있는 마른 고추의 존재 자체가 할머니에게는 위로가 됩니다. 오랜 세월을 할머니와 함께 견뎌낸 마당가의 개도 할머니의 위로가 됩니다. 이렇게 위로를 받으며 세월을 견뎌내는 것이 세월을 다듬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어느 농촌 마당에서 펼쳐진 가을의 모습을 소리로 담아낸 이 시를 통해 저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을 통해 전달되던 고추씨 흔들리는 소리를 지금에서야 듣습니다. 시인의 감수성이 수십 년 세월을 건너뛰어 그 옛날의 모습을, 옛날의 소리를 불러내고 있습니다. 이 가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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