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의 가을 일상
-함민복
허리가 낫처럼 휜
할아버지 지팡이는 바퀴가 두개
할머니 지팡이는 바퀴가 네개
자전거와 유모차가 밭둑에 놓이고
허리 구부릴 일도 없이
밭고랑에 숨는 늙은 부부
꼿꼿하게 박혀 흔들림 지키던 말뚝들
바람에 흔들리던 고추 대궁들
블루스 끝에 얻은 붉은 고추들
탱탱한 것 가려 따는 쭈그럭 손
지팡이에 고추를 싣고
지팡이도 일꾼이었으니
휜 허리로
지팡이를 굴리며
갓길 나란히 걷는
할아버지 지팡이는 바퀴가 두개
할머니 지팡이는 바퀴가 네개
가을입니다. 노부부의 인생의 계절도 가을입니다. 노부부는 허리가 굽어 지팡이 없이는 걷기가 불편합니다. 할아버지는 두발 자전거를 지팡이 삼아, 할머니는 네발 유모차를 지팡이 삼아 잘 익은 고추가 기다리는 밭으로 향합니다. 밭둑에 지팡이를 두고 고추밭으로 들어갑니다. 허리를 숙일 필요도 없죠. 허리가 낫처럼 휘었으니까요. 고추밭에 들어가니 노부부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고추밭 숲에 파묻혔으니까요. 허리가 휜 할아버지 할머니와 달리 고추 대궁을 잡고 있는 말뚝은 꼿꼿하게 박혀 있습니다. 말뚝에 의지한 고추 대궁은 바람에 흔들리고 대궁에 달려 있는 고추도 바람에 춤을 추듯 흔들립니다.
붉게 익은 고추들을 보면서 노부부는 고추 모종을 심고, 고추가 바람에 넘어지지 않게 말뚝을 박고, 끈으로 묶던 일들을 떠올립니다. 블루스를 치듯 다정하고 부드럽게 고추밭에 애정을 쏟았습니다. 자식을 기르듯 고추를 길렀습니다. 고추와의 블루스 끝에 탱탱하게 익은 고추를 얻었습니다. 고추를 따기 위해 한 손으로는 말뚝을 잡고 한손으로는 바람에 흔들리는 고추를 따기 위해 노부부는 또 춤을 추어야 합니다. 블루스를 치듯 말이죠.
탱탱한 붉은 고추를 가려 따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손길은 더딥니다. 평생을 두고 해 온 일이지만 속도는 갈수록 더딥니다. 속도에 비례하여 욕심도 내려놓았습니다. 욕심의 크기와 일의 속도가 균형을 이룹니다. 오늘 수확한 고추의 양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지팡이 삼아 일터에 데리고 온 자전거와 유모차에 실을 수 있을 정도만 땄습니다. 이 정도가 노부부의 욕심의 크기입니다. 지팡이도 훌륭한 일꾼입니다. 고추를 운반하는 일꾼입니다. 탱탱한 고추를 가볍게 싣고 돌아오는 노부부의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짝을 이뤄 굴러가는 바퀴처럼, 평생 서로의 바퀴가 되어 살아온 세월처럼 노부부의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쓸쓸하고 고된 농촌의 가을 일상을 이처럼 소박하고 맑게 그려낸 시인이 있기에 저도 옛날의 고추밭을 소박하게 떠올려봅니다. 어머니께서는 고추밭 가장자리에 참외를 심어 두었습니다. 고추를 따다가 새참으로 참외를 먹기 위함이지요. 샛노란 참외의 단맛 때문에 저도 고추 따는 행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곤 했습니다. 이 시를 읽으며 붉은 고추와 노란 참외와 어머니를 떠올려 봅니다. 이 가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