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울 수 없는 그리움
-함민복
천만 결 물살에도 배 그림자 지워지지 않는다
한 줄로 된 시입니다. 물 위에 배 한 척 떠 있습니다. 물에 비친 배 그림자도 함께 떠 있습니다. 정박한 배가 움직이면 물에 비친 배 그림자도 움직입니다. 물결이 잔잔해도 배 그림자는 그대로 있고, 물결이 거칠어도 배 그림자는 그대로 있습니다. 물결이 천만 갈래로 일렁이더라도 배 그림자가 지워지는 법이 없습니다. 이런 객관적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이 시를 썼을까요? 시가 객관적 사실을 진술하고 있더라도 모든 시는 우리네 삶을 함축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우리네 삶의 물살도 천만 결이 있습니다. 천만 결이나 되는 삶의 우여곡절 속에서도 지울 수 없는 자신만의 그림자가 있죠. 공부, 진학, 취업, 결혼, 사랑, 돈, 주택, 건강 등의 문제가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기 때문에 이를 우리 삶에서 떨쳐 내기가 어렵습니다. 무심한 듯 생활하지만 한 가지쯤의 그림자는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죠.
일주일 뒤에 소풍가는 초등학생은 무엇을 해도 일주일 뒤의 소풍으로 인해 기분이 좋습니다. 공부를 안 해 부모님께 혼이 나더라도 소풍이라는 그림자가 가슴 한편에 있어 기분이 좋습니다. 시험을 앞둔, 발표를 앞둔 고등학생은 시험을 칠 때까지, 발표를 마칠 때까지 시험의 그림자를, 발표의 그림자를 지울 수 없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아름다운 풍경을 볼 때도 가슴 한 구석이 답답합니다. 그 답답함의 원인을 찾아 나서면 시험이나 발표라는 그림자를 만날 수 있죠. 직장 상사에게 혼이 났습니다. 마음이 구겨지는 상황인데도 가슴 한편이 환하게 밝아 옵니다. 밝음의 원인을 찾아 나서면 일주일 뒤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기분 좋은 그림자가 가슴을 지배하고 있음을 만나게 됩니다.
이 시의 화자는 어떤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시를 쓸 때도 그 사람이 떠오릅니다. 단 한 순간도 그 사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삶의 어떤 물결에서도 그 사람이 생각납니다. 자신의 그림자가 자신을 늘 따라다니듯 그 사람의 생각이 화자를 늘 따라다닙니다. 그러니 ‘가을’이라는 시에서처럼 ‘당신 생각을 켜 놓은 채 잠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죠. 깊어가는 이 가을에 물에 비친 그림자처럼 지울 수 없는 그림자 하나쯤 품고 있는 것도 나름의 낭만이 아니겠는지요?
[사진 출처] Pixabay 무료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