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善)과 악(惡)을 가르치는 방법

성선설

by 인문학 이야기꾼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성질이 ‘본성(本性)’인데 사람의 본성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라고 합니다. 진짜 하늘이 부여했는지는 알기가 어렵습니다만,『중용(中庸)』에서는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이르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이르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이른다[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 率性之謂道(솔성지위도) 修道之謂敎(수도지위교)]”라고 했습니다. 본성을 하늘이 부여했는지, 하늘이 부여했다고 믿는 것인지, 아니면 태어날 때 없었던 본성을 개인이 만들어 가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공부를 하지 않아도 본성이 선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시(詩)가 있습니다. 함민복 시인의 ‘성선설’이라는 시를 읽어 보겠습니다.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함민복, ‘성선설’


요즘 학생들은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은 누가 주장했고,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은 또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맹자(孟子)를 알아야 하고, 순자(荀子)도 알아야 합니다. 이것보다 먼저 본성(本性)을 알아야 하지요. 본성을 알기 위해 하늘[天]과 도(道)를 알아야 합니다. 안다는 것은 암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본성을 암기를 통해 알게 되는 것이죠.

함민복 시인의 ‘성선설’이라는 시는 알아야 할 것도 암기할 것도 없습니다. 수학적 함수를 따져야 되는 것도 아니고 논리적 추론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울림이 있습니다. 무조건 효도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손가락 열 개가 만들어지기까지 태아는 어머니 뱃속에서 어머니의 은혜를 헤아립니다. 손가락 하나하나를 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어찌 손가락뿐이겠습니까? 눈도 입도 코도 귀도 어머니의 은혜가 아닌 게 없습니다. 나의 존재를 당연하게 생각했던 사람도 이 시를 만나는 순간 우리 몸이 어머니의 은혜로 탄생된 것을 알게 됩니다. 태아도 손가락을 꼽아가며 어머니의 은혜를 기억하기 위해 애쓰는데 열 달의 수십 배 은혜를 입은 우리가 어머니의 은혜를 모르면 되겠느냐는 가르침이 들리는 듯도 합니다. 태아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어머니의 은혜를 헤아립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성질을 본성이라고 한다면 태아는 태어나기 전부터 어머니의 은혜를 헤아릴 정도로 착합니다. 그러니 본성은 당연히 착하죠. 그래서 시의 제목이 ‘성선설’인가 봅니다. 본성이 선(善)하다는 것을 태아가 온몸으로 느껴 알듯이 우리도 온몸으로 느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명심보감(明心寶鑑)』은 전체 25편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제 1편이 ‘계선편(繼善篇)’입니다. ‘계선’은 ‘선(善)을 잇는다’는 뜻이지요. 선행은 일회성으로 그쳐서는 안 되고 평생을 두고 이어나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계선편의 첫구절은 ‘선을 행하는 사람은 하늘이 복으로 갚고, 불선을 행하는 사람은 하늘이 화(禍)로서 갚는다[爲善者天報之以福 爲不善者天報之以禍(위선자천보지이복 위불선자천보지이화)]’입니다. 공자님의 말씀이죠.

이 책에는 선(善)에 대한 개념 규정은 없습니다. 그러나 『명심보감(明心寶鑑)』 25편 전체 내용을 실천하는 것이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국가에서, 지배층이 요구하는 가치관을 선현들의 입을 빌려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지요. 본성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고 하늘이 선(善)을 부여했으니 하늘의 뜻을 어기지 말고 선을 행하라는 겁니다. 배워서 본성을 알게 됩니다. ‘성선설’이라는 시에서 어머니의 은혜를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직접 느끼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명심보감(明心寶鑑)』 23편에 ‘상덕’이란 사람의 효행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상덕의 어머니가 굶주리고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어요. 상덕은 달리 봉양할 길이 없어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그것을 잡수시게 하자 어머니 병이 나았습니다. 임금이 이를 알고 후하게 상을 내리고 그 집 문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합니다.

조선시대 어린이들은 『명심보감(明心寶鑑)』을 읽으며 ‘상덕의 효행’을 선행(善行)으로 알았을 겁니다. 선행은 본성이고 본성은 하늘이 명한 것이니 선행을 하지 않으면 하늘이 화를 내린다고 믿었을 겁니다. 만약 자신이 ‘상덕’의 처지가 된다면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부모를 봉양하지 않으면 하늘이 재앙을 내리니 재앙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상덕의 효행을 따라했을지도 모르죠.


현대사회에서도 선행이 권장되어야 한다는 명제는 변함이 없습니다. 현대인은 지식과 인권에 대한 인지(認知) 수준이 높기 때문에 선(善)과 같은 가치를 일방적으로 강요하기는 어렵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김명수 시인의 ‘하급반 교과서’를 읽으면 선악을 가르치는 방식이 현대의 교과서와 과거의 명심보감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큰 소리로 책을 읽는다

나는 물끄러미 그 소리를 듣고 있다

한 아이가 소리내어 책을 읽으면

딴 아이도 따라서 책을 읽는다

청아한 목소리로 꾸밈없는 목소리로

“아니다 아니다!” 하고 읽으니

“아니다 아니다!” 따라서 읽는다

“그렇다 그렇다!” 하고 읽으니

“그렇다 그렇다!” 따라서 읽는다

외우기도 좋아라 하급반 교과서

활자도 커다랗고 읽기에도 좋아라

목소리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고

한 아이가 읽는대로 따라 읽는다


이 봄날 쓸쓸한 우리들의 책읽기여

우리나라 아이들의 목청들이여

-김명수, ‘하급반 교과서’


이 시는 1983년에 발표되었으니 현대사회의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세월의 간격이 좀 있습니다. 교과서를 아무 생각 없이 따라 읽는 아이들의 모습이 먼저 제시됩니다. 청아한 목소리로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따라 읽습니다. 그것을 선(善)으로 알고 따라 읽습니다.

글자 익히기가 끝났습니다. 여전히 따라 읽기는 지속됩니다. ‘그렇다’고 읽으면 ‘그렇다’고 따라 읽고, ‘아니다’고 읽으면 ‘아니다’고 따라 읽습니다. 옳고 그름을 주체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누군가 시키는 대로 따라 판단하게 됩니다. 강요된 가치관을 선(善)으로 알고 청아하고 씩씩한 목소리로 따라 읽으며 그것을 자신의 가치관으로 삼게 되죠. 선을 어기면 하늘이 호통을 칠 것으로 여기면서 말이죠.

『명심보감(明心寶鑑)』을 통해 가치관을 확립한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 그 가치를 아이들에게 또 가르칩니다. 교과서를 통해서 가치관을 확립한 아이들은 강요받은 가치관을 자신의 가치관인 것처럼 지니게 됩니다. 시대도 변하고 교과서도 변했지만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관을 선(善)으로 알고 배우는 것은 변하지 않았죠. 그 자체도 선(善)인 줄 알았으니까요.

맹목적 책 읽기에 대한 시인의 비판 의식은 마지막에서 표출됩니다. ‘이 봄날’ 아이들은 새로운 가치관의 싹을 틔워야 하는데, 새싹을 틔울 생각마저 빼앗겨버리고 따라 읽기에 신명이 났습니다. 이런 책 읽기를 시인은 ‘쓸쓸한’ 책 읽기로 규정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가치관마저 길들여지는 우리나라 교육 현실을 시인은 꼬집고 있는 겁니다.

시인의 의도는 학생들이 이런 시를 읽으며 따라 읽기에 대한 반성과 비판 의식의 싹을 틔우라는 거죠. 따라 읽기가 최고인 줄 알았던 아이들은, 교과서가 최고인 줄 알았던 아이들은 이런 시를 읽으면서 강요받은 가치관을 수정하기 위해 교과서와는 다른 책들을 찾아 읽고, 토론을 하며 자신의 가치관을 정립해 나가게 되기를 시인은 바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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