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안도현
그대 나를 떠난 뒤에도
떠나지 않은 사람이여
화자에게는 옛날에 무척이나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약간은 희미해졌지만 지금도 그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 사람의 모습도 볼 수 없고, 그 사람의 목소리도 들을 수는 없지만 그 사람의 그림자는 화자 주변에서 늘 어른거립니다. 밥을 먹을 때도, 책을 읽을 때도 문득문득 그 사람의 모습이, 그 사람의 목소리가 눈에, 귀에 어른거립니다. 그러니 그 사람은 화자 주변에 늘 머물고 있는 사람이지요. 그 사람의 몸은 화자를 떠나갔지만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은 화자 마음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는 복잡한 내면을 시인은 짧은 두 줄로 표현했습니다. 복잡한 내용을 짧게,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시인의 힘이고 시의 묘미입니다.
‘그대 나를 떠난 뒤에도 / 떠나지 않은 사람’이라는 표현은 겉으로 보면 말이 안 되는 표현입니다. 모순되는 표현이라 역설(逆說)이라고 하죠. ‘만해 한용운 시인’의 유명한 시 ‘님의 침묵’에도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역설적 표현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임이 내 곁을 떠났기에 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임의 모습을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임을 내 마음에서 떠나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향기로운 임의 말소리를 들을 수 있고, 꽃다운 임의 얼굴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는 표현이 시적 진실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박완서 작가의 ‘그 여자네 집’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김용택 시인의 ‘그 여자네 집’이라는 시에서 영감을 얻어 지었다고 하는 소설이죠. 어릴 때부터 같은 마을에 살던 ‘만득이’와 ‘곱단이’는 사랑을 키워갔습니다. 둘이 결혼을 할 것이라고 마을 사람들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라 만득이가 징병으로 끌려갑니다. 곱단이도 위안부에 끌려갈 처지가 되자 신의주에 사는 중년 남성과 서둘러 혼인을 하게 됩니다. 해방 후에 만득이가 마을에 돌아왔을 때 곱단이는 이미 남의 아내가 되어 있었습니다. 만득이도 할 수 없이 이웃집 순애와 혼인을 하게 되죠. 만득이의 아내인 순애가 생각할 때 남편의 몸은 자기와 함께 있지만, 남편의 마음은 곱단이와 함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옛사랑의 그림자가 세월과 함께 희미해져도 사랑의 그림자는 선명하게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누구나,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이든, 고향 산천의 모습이든, 어릴 적에 같이 뛰놀던 친구이든 희미한 기억을 붙잡고 놓지 못하는, 어쩌면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추억이니 그리움이니 하는 단어들이 우리 가슴을 저리게 하고 우리 가슴을 뛰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희미한 옛 고향의 모습과 친구들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지어집니다. [사진출처] Pixabay 무료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