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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서방 Jan 02. 2024

[군생활 잘하기] 성장의 기록(4)

순항훈련 보급관, 물러설 곳이 없었다.

[자원관리와 회의]를 배우는 과정

세 번째 보직 / 순항훈련


[자원관리의 콜로세움]


    해군의 연례행사와 큰 훈련, 즉 1년 농사를 논하면 매년 빠지지 않는 게 순항훈련이다.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의 4학년 2학기 수업은 이 순항훈련 중 진행되고, 생도들에게는 설렘과 두려움으로 4년을 기다린 훈련이기도 하다. 또한, 순항훈련을 마친 후 졸업과 동시에 임관한다는 점에서도 '마무리'의 의미가 있다.


    순항훈련은 4-5개월 정도의 기간 동안 항해실습과 해외를 방문하고 리셉션 파티에 참여하는 등 여러 활동과 외교적 교류가 있는 행사다. 임관을 앞둔 4학년 생도들에게도 큰 의미가 있지만, 순항훈련 하나에 투입되는 자원(인력, 예산, 물자 등)을 고려할 때 해군에서도 매년 총력전을 한다는 각오로 준비한다. 순항훈련의 매 기항지와 방문도시마다 열리는 리셉션파티는 외교적으로도 의미가 있는데, 기본적으로 국방부장관급 행사이기도 하며 해외의 주요 인사들을 함정으로 초청해 서로를 환영하고 교류하게 된다. 초대받는 내외빈 역시 다양한데, 멕시코를 예로 들면 현지의 시장과 정치인, 유명인사, 한인회 등이 방문했다.



    보급관으로서 내 임무는 앞에서 언급한 리셉션 파티의 전반적인 준비와 세팅이었고, 대표적으로 다음의 3가지였다.


- 승조원과 생도, 총 300명을 5개월간 먹이고 입힐 수 있게 준비(물자 조달)

- 행사, 급식, 주류, 종교물품 등 함정에서 보관할 모든 물자의 적재/관리

- 리셉션 파티 세팅 지원 및 해외 현지에서 물자 조달


    공통적으로 물자 조달이 있지만, 모두 다른 환경에서 다른 접근법으로 이뤄진 업무였고, 처음하는 업무로 늘 도전하는 자세로 임했다. 통상 물 없는 3일은 사람에게 생사를 넘나들게 하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3주간의 금식 역시 치명적이다. 순항훈련 기간은 3주를 훌쩍 넘겨 4개월이고, (기항지마다 물자 조달을 했지만) 긴 항해를 준비하기 위해 '챙겨갈 건 다 챙기자'는 마음으로 모든 걸 밀어넣듯 저장했다.


    한국에서 출항 직전 적재만 2개월을 내리 했던 이유이며, 없는 창고 공간도 억지로 만들어가며 물건을 싣고 내리고 새로 정리하길 수십 번 반복했다. 함 내 가장 큰 탄약고를 비워 철제 랙을 간이로 세우고 밤새워 물건을 적재했고, 새로 정리하고 고정할 때마다 정말 이를 악물고 직접 작업 했다. 하루하루 출항이 다가왔고, 물러설 곳이 없었다. 마치 콜로세움 출정이 결정된 검투사가 된 피 마르는 기분이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자원관리를 조금 스파르타식으로 배울 환경이었고, 이때 재고관리와 물품의 적재 계획에 대한 여러 번의 깨우침이 있었다. 수개월간 현장에서 깨지고 부딪치며 제로베이스에서 창고 관리자로 도약하다보니 사소한 것부터 중요한 것까지 알게됐다.


 "아하!" "어라?" "이야!"

    그럼에도 늘 벽에 부딪친건 경험과 지식의 부족 때문이었다. 민간에서 활용되는 창고 적재법이나, 물류 저장 방법을 하나하나 서칭 해가며 직접 창고를 세웠다가 다시 렉을 해체해 제로베이스로 만드는 등 여러 번 물건과 공간을 재배치했다. 당시 여러 승조원들은 나를 보며 '탄약고 속 광인'이라고 불렀다. 온몸을 박스에 베이고 멍들어가면서 창고에 들어가 모든 물건의 재고를 직접 정리하고 파악하는 장교는 보기 드물었을 것이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매우 비효율적이었고 시행착오를 지나치게 겪었으니 완전한 성공의 기억은 아니지만, 집요하게 열심히 했던 시절이라 평가하고 싶다.


    모든 것이 새로웠지만, 나만의 창고를 빌드업하는 과정은 큰 성취감이 들었다. 매번 기항지에서 리셉션 행사 때마다 한국에서 싣고 간 물건이 갑자기 필요해 전단 참모진들에게서 늘 연락이 왔다. 나를 통해 신속하게 찾아지고 물자가 적재적소에 이동하는 데에서 상당한 뿌듯함도 느꼈지만, 모든 걸 직접 하려니 홀로 바빠져 '또 다른 나, 나의 분신'의 필요성을 느끼고 창고 입구에 현황판을 만들었다. 어떤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직접 손으로도 그리고 컴퓨터로도 도표를 그려 넣는 등을 시도했다. 머릿속에는 다 있었지만 남들이 보기 편하도록 현황판을 만들면서 또 한 번 깨우침의 과정이 있었다. 이때 얻은 요령으로 이후 어떤 창고에 가도 대충 사이즈를 보고 적재 방식을 파악할 줄 알게된다. 쉽게 말하면 스캔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혼자서도 잘하는데, 같이해야해?]


    직접 깨우치는 것, '체득'한 건 평생 가는 자산이다. 체득이란 마치 운전을 한 번 배워두면 수년이 지난 후 다시 운전대를 잡아도 못하기 어려운 것처럼 몸이 터득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창고 속 광인'이라는 별명 역시 직접 모든걸 해내려고 하는 버릇에서 파생됐다. 평소 솔로 플레이를 즐기고, 직접 모든 걸 해나가므로 혼자 일할 때의 기동성이 빠른 장점이 있었지만, 반대로 작업의 효율성이나 속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한계에 직면했다.


    순항훈련이라는 큰 행사를 준비하면서 갑자기 많은 회의와 토론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굳이 이렇게까지 하나하나 계획이 필요할까 싶을 정도로 회의 자체에 부정적이었다. 혼자 하는게 마음 편했고, 남들의 느릿한 처리 속도를 보면 속터지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매번 토론하고 의견을 조율하면 기동성도 떨어지니 비효율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틀렸음을 금방 깨달았다. 첫 터닝포인트는 참모진들과의 리셉션파티 행사 회의 중이었다. M중령(지금은 대령)이 회의 중 한 마디 제대로 된 의견도 없이 경청하다가 마지막에 역할 분배와 정리를 딱 떨어지게 하는 모습을 봤다.

"노대위는 현지 물류 조달하러
지금 출발하고,
조리팀장 A 보다 B 먼저 시작,
조리장은 그거 서포트하고,
보급장은 시간 고려해서..."
 

   

    정확한 핵심과 우선순위에 따른 업무 분배도 탁월했지만, 행사 종료 후 디브리핑을 반드시 진행하며 매번 부족한 점과 좋았던걸 꼼꼼하게 기록했다. 이 노련함과 꼼꼼함에 크게 감탄했다. 보통 리셉션 행사를 끝내면 뒷정리 후 밤 11시-새벽 1시 정도라 다들 피곤하니 쉬기 바쁜데, 꼭 디브리핑을 통해서 다음 행사가 더 성장할 수 있게 발판을 마련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회의의 효용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듣다보면 생각지 못한 디테일한 부분이나,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다양한 의견을 종합하고 흡수할 수 있다면, 같은 작업을 하더라도 높은 수준으로 한 번에 이뤄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부터 아무리 바빠도 계급고하를 불문하고 동료들의 말을 경청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개인적으로 지옥과도 같은 인연이었지만, 당시 함께 근무하던 항해부장 C중령의 무능이 회의를 배우는데 도움이 됐다. 그 사람은 대부분 타인에게 회의 참석을 토스(전문용어로 '던지기')하고, 업무에 전혀 무관심했다. 그 덕분에(?) 나는 중위 계급에 함정을 대표해 수많은 회의에 불려 갔다. 계급으로 일하는 게 아니라는 걸 다시금 말하고 싶은 이유는, 초반에는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못 했지만 함정의 지원이 필요할 때마다 적절한 현장의 의견을 제시하고 행사 전후로 많은 도움의 손길을 먼저 내밀었던 덕분에 참모진들 사이에서도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순항훈련 후반에는 여러 참모급 장교들이 나한테 의지하는게 느껴졌다.


    순항훈련 전까지 회의는 높으신분들의 지침을 받아적거나, 요식행위 정도인 줄 알았다. 그러나, 올바르고 건설적인 회의를 겪으며 생각이 점점 변했다. 사람이 많고 이해관계자가 여러 명 섞여있다면 결국 회의를 통해 실타래를 풀고 정리해 나가야 함을 알게 됐다. 회의를 통해 비효율을 줄이고 또 나중에 낭비될 시간이나 공지와 정보 공유에 소요될 시간을 비약적으로 아낄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이 모든 건 겨우 8개월이지만 스파르타식으로 몰아붙이는 스케줄 덕분에 단기간에 알게 된 부분이다.

 

    돌아보면, 흔히 말하는 '난세에 등장한 영웅'이 되지는 못했다. 부족하기만 한 역량에 늘 배움의 순간이었을 뿐이다. 앞에서 끌어주던 M중령같은 참모진과 나보다 더 멀리 보는 부사관들의 경험 서린 조언 덕분에 모든 게 가능했다고 본다. 매 순간 위기 속에서도 깨지고 부서지며 배웠던 강렬한 기억*뿐이다. 그래도, 2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미국, 유럽, 남미, 중미, 중국, 하와이 등의 나라를 경험하고 또 [자원관리]와 [회의]의 중요성을 배운 건 확실한 비약적 성장의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 미국에서 3미터짜리 크리스마스트리를 찾기 위해 10개가 넘는 마트를 찾아 헤맸던 기억이나, 괌에서 긴급하게 군적 하러 들러서 픽업트럭에 고기와 야채를 가득 싣고 몇 차례나 오갔던 기억, 독일에서 현지음식을 리셉션 파티에 내자는 갑작스러운 결정에 4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에 100인분이나 되는 케이터링 음식점을 찾아다니며 발로 뛴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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