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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서방 Dec 30. 2023

[군생활 잘하기] 성장의 기록(2)

첫 번째 근무지, '손 x나 많이 가는' 노소위

[가이드라인] 배우는 과정

첫 보직 / 교육사령부


[사회생활 했어도 역시 소위는 안돼]


x나 손 많이 가네


  첫 보직을 받은 내가 N대위에게 첫날부터 들었던 쓴소리였다. 사회에서 늘 일머리 좋다는 소리만 들어왔던 자칭 ‘알바왕’인 나는 어떻게 그런 아픈 평가를 난생처음 받았을까? 사건의 발단은 같은 부서 담당 부사관이 나에게 아래와 같이 한 평범한 보고로 시작되었다.


과장님. 온나라 결재 하나
해주세요. 상신했습니다.

    일단, 나보다 20살 이상 많은 부사관이 과장”님”이라고 부른 것 자체가 여전히 유교정서에 젖어있다 보니 적응이 안 되었다. 방금 들었던 말이지만 사실 잘 못 알아들었는데도 습관적으로 “네~”하고 대답했다. (지금은 모르는 걸 아는 척하는 게 부끄러운 거라 생각하지만, 당시만 해도 ‘장교는 다 할 줄 알아야 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나 보다.) 일단 알아들은 척했으니 아래와 같이 약간의 끊어 읽기 해석과 로딩이 필요했다.


과장님 / 온나라 / 결재 하나 / 상신했습니다

①과장님 : 과장? 아, 나 과장이네..

②온나라 : 온나라가 뭐지? 이게 초군반 때 배운 공문 뭐 그건가..

③결재 하나 : 결재는 어떻게 하는 거지?  (’ 문서처리‘ 커서 바라보며)이 건가.. ‘카드 결제‘랑 뭐가 다르지…

④상신했습니다 : 상신은 또 뭐야? 뭔 단어가 이렇게 어려워


    처음에는 놀란 토끼처럼 하나하나가 새로워 단어 하나, 토시 하나 놓치지 않고 다 받아들이며 해석했지만, 전입 직후 온나라 권한조차 없었던 차라 나는 어떤 걸 하더라도 막히고 또 막히고, 이를 또 유관부서에 물어가며 해결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연필 한 자루, 그리고 앞뒤좌우에 수많은 서류들이 보였다. 온나라 체계 권한을 받고 나니, pc가 비밀번호 문제로 잠기고, 장기간 미사용인 소프트웨어 업데이트하는데 또 수십 분이 걸렸다. 여러 부서에 유선 또는 찾아가서 협조를 구하고 또 크고 작은 당황스러운 과정을 거치며 오전을 꼬박 보냈다. 오전에 뭐 했냐는 상급자의 말에 솔직하게 대답도 못했다. 간단한 일에도 허둥지둥하는 스스로에게 자존심도 상하고, 뭔가 하루를 허비하는 기분도 들었다. '


* 군에서는 인터넷이 아니라 인트라넷, 즉 자체망을 사용하는데 같은 pc라도 완전히 다른 시스템이다. 폐쇄적이고 보안이 생명인 일이라 자체망까지 사용하는데, 늘 사용하던 pc 앞에서도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할 수 있는 건 클릭과 검색밖에 없었고, 초군반 때 배운 게 실무와 매치가 잘 안 됐다.




솔직히 공문 결재를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

부끄러운 말을 꺼내기까지 수십 분이 걸렸고, 오후가 되어서야 이실직고하는 말이 마침내 나왔다. 돌아온 대답은 앞서 말했듯이 “x나 손 많이 가네”라는 푸념이다.  



[뭐가 부족했을까?]


    N대위는 첫 근무지에서의 인연으로 지금도 가장 친하게 지내는 선배이자 처음으로 만난 닮고 싶은 사람, 즉 멘토다. 그럼 왜 나는 이런 비평을 들어야만 했을까? 역량이 부족해서? 인격적으로 부족해서? 단순히 경력이 짧거나 시간관리를 못했거나, 소통을 못하는 등의 자주 발생하는 실수로 설명하기 어렵다. 또한, 처음 발령온 뉴비가 허둥대는 걸 속된 말로 '폐급'이라기엔 조금 이르지 않은가?


    돌아보면, 군 내부 시스템 또는 속칭 '가이드라인'에 대한 숙지 부족이 가장 큰 이유다. 가이드라인이란, 정책이나 시책 따위의 지침을 뜻한다. 풀어 설명하면 해군 규정이나, 부서/인물 관계, 예산의 종류/시기, 보고서작성법, 행정 절차 등인데 이 모든 분야에서 전반적으로 이해도가 낮았다. 통칭 시스템이나 가이드라인이 부족했으며, 이 때문에 기본적이지만 크리티컬 한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내가 첫날 겪은 실수는 표면적으로 '모르면서 아는 척했다'는 데에도 이유를 발견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군 내부 시스템(가이드라인)에 대한 경험 부족이 주된 원인으로 본다.


    군 간부 중에 소위와 하사는(물론 이병, 일병도 마찬가지) 마치 인턴과 같다. 이들은 일의 책임과 조직 내에서의 입지, 그리고 계급에 대한 최소 복무 기간을 볼 때 사회에서의 인턴과 닮아있다고 본다. 단, 장교는 조금 더 책임적인 부분을 강조하며 첫날부터 매일같이 몰아붙이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도 첫 1년간 일의 수준은 90% 이상이 상당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는 계급장이 주는 인상도 한몫하겠지만, 시스템에 대한 적응도가 낮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군조직 안에서 초심자라는 것 외에 그들이 단편적으로 인격적으로 부족하거나, 역량이 낮다고 보기엔 무리다. 사회에서 일을 꽤 하다 입대한 사람도 첫 몇 개월간 갈피를 못 잡는 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가이드라인을 배우다]


    사실, 첫날을 제외하고 나는 특별한 실수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과적 응했다는 말을 들었다. 어딜 가든 군생활 한 번 하고 온 리턴(재임용) 장교 같다는 말을 들었다. 시키지 않아도 능동적으로 일하고 먼저 다가가서 여러 사람의 고충을 자연스럽게 물어가며 일을 쉽게 만드는 엔진 속 윤활제 같은 사람이 되어갔다. 이건 물론 가이드라인과 일의 체계를 빠르게 흡수하고서야 가능해졌다.


    개개인의 성향이나 열정이 아무리 주변을 향해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어도 좋은 방법이 제시되지 않는다면 에너지낭비이자 과해보이기만 하다. 나는 가이드라인을 흡수하기 위해 가장 먼저 사무실 내 모든 오래된 묵은 서류를 자발적으로 정리했다. 또한, 크리티컬 하거나 또 사용 가능한 참고 자료는 스캔해 개인 업무참고철을 만들어냈는데, 스스로 머릿속에 여러 절차를 각인시키기 좋았다.(인수인계서, 테크노트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단계로 지금도 쓰는 조직 적응 기술이지만, 부서원들과 면담도 적극적으로 이어갔다. 꼭 찾아가거나 불러내서 말하기보다 밥 먹으면서, 커피 마시면서,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그들에게 접근하며 정보를 흡수해 갔다. 누가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게 고민인지, 오래 근무하면서 어떤 게 힘들었는지를 듣다 보면 머릿속에 업무절차도나 인물지도가 그려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모든 병들의 면담을 실시하고 신상관리를 업데이트하고, 오전/오후 과업을 N대위에게 수시로 보고하며 군의 가이드라인을 흡수해 갔다.


    사실, 홀로 소위 계급장을 달고서 과장 자리에 앉아있었다면 어려웠으리라 생각한다. 다행스럽게도 함께 근무한 N선배가 내게 적응을 위한 유예기간을 주고 속도조절을 해줬다. 그 적응의 기간을 묵묵히 홀로 일을 다 처리하며 배려해 준 그에게 참 감사하다. 마치 갓 태어난 오리가 어미를 따라다니며 똑같이 행동하듯 닮고 싶은 N선배를 운 좋게 만나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흡수하며 군에 적응해 갔다. 내 첫 근무지의 귀인이자, 롤모델이자, 지금까지도 이어진 소중한 인연이다.


    열정과 긍정적인 에너지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있다. 특히, 처음 접하는 영역과 조직에서 발생하는 이 문제는 가이드라인(시스템)이라는 큰 틀을 배우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처럼 첫 근무지에서 스스로의 부족함과 가이드라인의 필요성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고, 이를 극복하며 성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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