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허스토리>
해당 글은 영화 <허스토리>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관람했습니다.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찰리 채플린이 말했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이 말은 정정할 필요가 있다. 가까이서 봐도 비극이고, 멀리서 봐도 비극인 삶이 있다. 지금 우리에겐 '위안부'라는 세 글자의 비극이 그러하다.
영화 <허스토리>에 출연하길 결정한 배우들도 연기에 앞서 사뭇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이 만인의 비극을 어떻게 관객들에게 오롯이 전달할 것인가. '국민엄마' 김해숙은 한 인터뷰에서 '이건 엄두가 나지 않는 도전'이었다고, '도대체 상상을 하고 짐작을 하려 해도 그 깊이가 닿지를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러한 고민은 관객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전달된다. 불편하고, 그래서 황급히 고개 돌리고 싶은 비극. 영화관 대형 스크린에서 마주하는 거대한 불편함. 다만 영화 <허스토리>는 비극을 희극이었다고 억지로 미화하지도 않고, 비극을 있는 힘껏 과장하지도 않으며, 2018년 지금의 관객들에게 일종의 숙제를 내놓는다. 2018년의 우리는, 이 돌이킬 수 없는 역사를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영화 <허스토리>는 '위안부'라는 소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관부재판'이라는 실화를 주요 소재로 다룬다. 위안부 피해자 3명과 근로정신대 피해자 7명, 총 10명이 원고가 돼 약 9년 간 일본 정부를 상대한 길고 끈질긴 투쟁의 역사. 일본 사법부가 수많은 전후 보상 소송 중 최초로 원고 측의 승소를 -일본 정부의 30만 엔 배상을- 판결한 사건. 그러나 일본 정부의 항소와 함께 이어진 고등 법원 판결에서 다시금 원고 측 패소로 뒤집어진 이야기.
따라서 영화 <허스토리>는 아름다운 패배의 이야기다. 기존의 위안부 영화가 전쟁 중 벌어진 끔찍한 실상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림으로써 '위안부' 소재 자체를 공론화시키는 데 목적을 두었다면, 영화 <허스토리>는 '이러한 비극을 지금의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의 차원으로 한 걸음 나아간다. 그럴 수 있었던 데에는, 그러니까 내가 '위안부'를 소재로 한 영화에 감히 '아름다운 패배'라는 꾸밈말을 붙일 수 있었던 데에는, 영화 <허스토리> 속 표현되는 일련의 디테일한 변화가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영화 <허스토리>에는 이전의 위안부 영화에서 습관적으로 다루던 장면들 -어린 소녀들이 무차별적으로 끌려가는 모습이나, 그날의 참혹한 실상을 모노톤의 회상으로 적당히 희석해 상기시키는 씬- 이 없다. 영화는 대신 오늘날 할머니들에게 남겨진 흉터와, 법정에 들어서는 그들을 놓고 편을 갈라 왈가왈부하는 시민들, 그날의 비극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던 종사자들의 고백과 같은 '디테일'에 집중한다.
수십 년 전 어린 소녀들을 근로정신대 시설에 보낸 한 일본인 교사가 법정에 서서 고백하는 진심 어린 사죄와 증언, 어린 학생들에게 강연하기 위해 용기 있게 교탁 앞에 선 할머니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학생들을 마주하고 너무 예쁘다고 눈물 흘리는 할머니와, 그런 할머니를 보고 할머니 또한 예쁘다고 화답하는 학생들. 그리고 그 학생들이 수요집회에 서서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장면까지.
영화 <허스토리>는 이렇듯 연속적이고 현재진행형인 변화의 모습들을 통해, 관부재판에서의 패배가 충분히 아름답고 의미있는 싸움이었음을 밝힌다.
여전히 위안부는 모두에게 불편한 진실이다. 가해자인 일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지금의 우리에게도 일말의 불편함이 없다 하면 이 또한 거짓일 것이다. 다만 받아들일 뿐이다. 매주 수요일의 집회로, 전국 각지의 소녀상에게로, 최종적으로 우리 모두의 일상으로 번져나갈 이 '아름다운 패배'의 교훈은, 이러한 불편한 진실이 이제 그만 잊어야 할 타협의 대상이 아니며, 단순 배상금과 교환 가능한 협상의 대상도 아니라는 것이다.
가까이서 봐도 비극이고 멀리서 봐도 비극인, 이 불편함의 종착지엔 무엇이 있을까. 모두가 이 불편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과연 어떤 변화가 찾아올까. '역사는 반복된다'는 인류사(史)의 무시무시한 신탁을 어쩌면 깰 수 있지 않을까. 역사라는 이름의 수레바퀴는 그렇게 앞으로 굴러간다고, 나는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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