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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oA Jun 21. 2017

터지지 않는 폭탄의 미학

영화 <박열>이 말하는 투쟁의 가치

해당 글은 영화 <박열>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짙은 흙먼지 바람과 요동치는 대지, 불타 무너지는 가옥, 광기에 휩싸인 사람들.

영화는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과 그 속에서 벌어진 조선인 학살 사건을 담아낸다.


혼란스러운 와중, 사건을 은폐하고 싶었던 일본 내각은 조선인 아나키스트 박열을 대역죄인으로 몰고자 한다.

박열은 되려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계획을 시인한다.

'상하이에서 폭탄을 받아 가을이 되면 일본 황태자를 암살하고자 했다. 모든 것이 나의 뜻으로 계획된 일이다.'

그 이후로 박열은 폭탄 그 자체가 된다. 박열 그 자신이 그토록 손에 넣고자 했던 폭탄.


다만 영화 내내 폭탄은 터지지 않는다. 애초에 실제 폭탄은 영화 초반 단 한 번 모습을 비출 뿐이다.

이것저것 재료를 조합해 만든 조악한 수제 폭탄. 그마저도 터지지 않자 박열과 그 일당은 망연자실한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사회주의를 비난한 주필을 찾아가 어디 한 번 밟아주고 오는 것뿐.

황태자 암살 미수라는 대역죄인으로서 차라리 사형되길 택한 박열의 이야기는

그렇게 해서라도 이 땅에 진실을 돌출시키고 싶었던 '어느 터지지 않는 폭탄의 슬픈 투쟁기'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녹록지 않다. 사건의 파장을 염려한 일본 내각과 천황 측의 판단에 따라 

박열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무기징역으로의 감형을 선고받는다.

함께 세상을 떠나기로 한 연인 후미코와의 약속마저 지키지 못하고 

박열은 '서서히 잊혀짐'이라는 가혹한 형벌을 감내한다.

이는 이준익 감독의 전작 <동주>와 커다란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다.

이름 모를 주사를 맞고 옥중에서 죽음을 맞이한 자기반성의 시인, 윤동주.

그 신화적 죽음을 영화는 극적으로 표현하고 절정에 이르러 사람들은 동요하고 눈물짓는다.


박열은 어떠한가. 아나키스트이자 독립운동가라는 그의 칭호로부터 사람들은 기대할 것이다.

혁명에 따르는 비릿한 피비린내와 사회를 뒤흔드는 폭탄의 파열음을.

그러나 불붙은 도화선처럼 타오른 기대는 끝내 폭발하지 못하고 허무히 사그라들고 만다. 

다만 영원한 불발탄으로 남아 끈질기게 살아갈 뿐이다.


우리는 모두 폭탄이 되기를 꿈꾼다.

부조리한 것을 바로 잡고,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고,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길 바란다.

다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앞선 우리의 바람을 한시적 일탈과 낭만으로 치부하고 마는 것이다.


공권력이 민간인의 학살을 자행하거나 방조하고

그 진상 규명 요구에 대해서는 유명무실하게 넘어가는 역사 속 모습은,

일본 제국주의의 어둠일 뿐 아니라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도 반복해 등장하는 비극적 단면이기도 하다.

그 속에서 대다수의 개인은 터지지 않는 폭탄으로 생애를 끝마치고 만다.


그렇다면 이 불발탄의 가치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영화 <박열>은 그 가치를 후미코의 대사를 통해 찾는다.


나는 박열을 사랑한다. 나는 그와 함께 죽을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희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녀는 말한다.

살아간다는 것이 비단 움직이는 것에 그치는 일은 아닐 것이라고.

설령 생生의 투쟁 끝에 죽음이 자리하더라도, 이는 삶의 부정이 아닌 긍정일 것이라고.

나는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아나키즘적 삶의 태도라고 평가하고 싶다.


그리고 생애에 걸친 이 투쟁의 불씨는 필히 전염된다.

박열의 시를 본 후미코가 처음 그러했고, 후미코의 글을 본 어느 일본 교도관이 그러했듯이.

그리고 이 낭만적 아나키스트 연인의 일대기를 바라본 우리 역시
기꺼이 그 길을 뒤따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터지지 않는 폭탄에게도 단 하나 아름다움의 길이 있다면

고된 투쟁의 역사를 잊지 않고 그 의지를 치열히 이어나가는 길.

혁명의 불씨는 그 지난한 인내 끝에 열화가 되어 타오른다.

어둠을 몰아내고 거짓을 불태울, 찬란한 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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