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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oA Jun 18. 2018

아름다운 패배를 기억하며

영화 <허스토리>

해당 글은 영화 <허스토리>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관람했습니다.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찰리 채플린


 찰리 채플린이 말했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이 말은 정정할 필요가 있다. 가까이서 봐도 비극이고, 멀리서 봐도 비극인 삶이 있다. 지금 우리에겐 '위안부'라는 세 글자의 비극이 그러하다.

 영화 <허스토리>에 출연하길 결정한 배우들도 연기에 앞서 사뭇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이 만인의 비극을 어떻게 관객들에게 오롯이 전달할 것인가. '국민엄마' 김해숙은 한 인터뷰에서 '이건 엄두가 나지 않는 도전'이었다고, '도대체 상상을 하고 짐작을 하려 해도 그 깊이가 닿지를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러한 고민은 관객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전달된다. 불편하고, 그래서 황급히 고개 돌리고 싶은 비극. 영화관 대형 스크린에서 마주하는 거대한 불편함. 다만 영화 <허스토리>는 비극을 희극이었다고 억지로 미화하지도 않고, 비극을 있는 힘껏 과장하지도 않으며, 2018년 지금의 관객들에게 일종의 숙제를 내놓는다. 2018년의 우리는, 이 돌이킬 수 없는 역사를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영화 <허스토리> 주연 김희애, 김해숙, 예수정, 문숙, 이용녀


 영화 <허스토리>는 '위안부'라는 소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관부재판'이라는 실화를 주요 소재로 다룬다. 위안부 피해자 3명과 근로정신대 피해자 7명, 총 10명이 원고가 돼 약 9년 간 일본 정부를 상대한 길고 끈질긴 투쟁의 역사. 일본 사법부가 수많은 전후 보상 소송 중 최초로 원고 측의 승소를 -일본 정부의 30만 엔 배상을- 판결한 사건. 그러나 일본 정부의 항소와 함께 이어진 고등 법원 판결에서 다시금 원고 측 패소로 뒤집어진 이야기.

 따라서 영화 <허스토리>는 아름다운 패배의 이야기다. 기존의 위안부 영화가 전쟁 중 벌어진 끔찍한 실상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림으로써 '위안부' 소재 자체를 공론화시키는 데 목적을 두었다면, 영화 <허스토리>는 '이러한 비극을 지금의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의 차원으로 한 걸음 나아간다. 그럴 수 있었던 데에는, 그러니까 내가 '위안부'를 소재로 한 영화에 감히 '아름다운 패배'라는 꾸밈말을 붙일 수 있었던 데에는, 영화 <허스토리> 속 표현되는 일련의 디테일한 변화가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영화 <허스토리>에는 이전의 위안부 영화에서 습관적으로 다루던 장면들 -어린 소녀들이 무차별적으로 끌려가는 모습이나, 그날의 참혹한 실상을 모노톤의 회상으로 적당히 희석해 상기시키는 씬- 이 없다. 영화는 대신 오늘날 할머니들에게 남겨진 흉터와, 법정에 들어서는 그들을 놓고 편을 갈라 왈가왈부하는 시민들, 그날의 비극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던 종사자들의 고백과 같은 '디테일'에 집중한다.

 수십 년 전 어린 소녀들을 근로정신대 시설에 보낸 한 일본인 교사가 법정에 서서 고백하는 진심 어린 사죄와 증언, 어린 학생들에게 강연하기 위해 용기 있게 교탁 앞에 선 할머니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학생들을 마주하고 너무 예쁘다고 눈물 흘리는 할머니와, 그런 할머니를 보고 할머니 또한 예쁘다고 화답하는 학생들. 그리고 그 학생들이 수요집회에 서서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장면까지. 

 영화 <허스토리>는 이렇듯 연속적이고 현재진행형인 변화의 모습들을 통해, 관부재판에서의 패배가 충분히 아름답고 의미있는 싸움이었음을 밝힌다.


영화가 바뀌듯, 우리도 바뀐다.


 여전히 위안부는 모두에게 불편한 진실이다. 가해자인 일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지금의 우리에게도 일말의 불편함이 없다 하면 이 또한 거짓일 것이다. 다만 받아들일 뿐이다. 매주 수요일의 집회로, 전국 각지의 소녀상에게로, 최종적으로 우리 모두의 일상으로 번져나갈 이 '아름다운 패배'의 교훈은, 이러한 불편한 진실이 이제 그만 잊어야 할 타협의 대상이 아니며, 단순 배상금과 교환 가능한 협상의 대상도 아니라는 것이다.


 가까이서 봐도 비극이고 멀리서 봐도 비극인, 이 불편함의 종착지엔 무엇이 있을까. 모두가 이 불편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과연 어떤 변화가 찾아올까. '역사는 반복된다'는 인류사(史)의 무시무시한 신탁을 어쩌면 깰 수 있지 않을까. 역사라는 이름의 수레바퀴는 그렇게 앞으로 굴러간다고, 나는 믿고 싶다.



서울 종로구 중학동에 있는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 열리는 '수요집회'는 동일 주제로 열린 최장기간의 시위로, 이 기록은 지금도 매주 갱신되고 있다.


2011년 11월 14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 처음 공식적으로 세워진 위안부 평화비(평화의 소녀상). 2018년 현재 전국 각지 백여 개의 소녀상이 우리 곁에 있다.


2018년 4월 23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최덕례 할머니가 향년 9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현재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생존 피해자는 총 28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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