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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아프다.

벌써 18년째 아픈 엄마는 더 아파간다.

2002년 캐나다행 비행기표를 끊어 놓고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 엄마가 응급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하셨다.


그냥 몸이 안 좋으셨고, 그래서 검사를 받으셨다.

그리고 신장 기능이 30%밖에 남지 않아 당장 응급수술로 복막투석을 시작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해질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엄마는 수술을 받고 복막투석을 하는 환자가 되어버렸다.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시고 나자 엄마가 채우고 있던 집은 텅 빈 집처럼 조용해졌고, 그 날, 아빠는 술에 잔뜩 취해 집에 오셔서는 나를 붙자고 우셨다. 많이 우셨다.


나는 18년이 지난 그때의 그 날을, 그 밤을 잊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참 못되게, 매정하게 나의 꿈을 위해 캐나다행 비행기로 몸을 실었고, 부모의 마음에 대못을 박으며, 이 곳 캐나다에서 정착을 했다.


2002년 4월 28일

캐나다 입국 첫날!

18년이 지나도 잊지 못하는 그 날을 시작으로 나는 엄마에게 돌아가지 못하는 딸로 살고 있다.


2007년 8월 24일 첫 딸을 품에 안은 나는 신랑과 단 둘이 산후조리를 했다.

복막 투석으로 아픈 엄마는 그 무거운 투석액을 들고 캐나다에 와서 산후조리를 해주실 수 없었다. 나는 아쉽지도 원망스럽지도 않았다.


엄마는 나에게 아픈 환자였고 무언가를 바라며 기댈 수 있는 예전의 건강한 엄마가 아녔기에 나는 혼자만의 힘으로 첫 아이를 키웠다.


약 한 달 뒤, 2007년 9월 추석이 낀 연휴의 어느 날, 엄마는 감사하게도 신장 이식 수술을 받게 되셨다. 우리 가족에게는 정말 감사할 수밖에 없는 그런 기적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이식 후 겪는 거부 반응으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내셨다. 그리고 이식 환자들이 평생 먹어야 하는 면역 억제제를 계속 드시고 계신다.


아이들을 출산 한 뒤, 2년에 한 번씩 한 달 정도 한국을 가야 할 일이 꼭 생겼다. 시어머님 칠순이라던가, 남동생의 결혼식 등으로 내 의도와 상관없이 꼭 나가야만 하는 일이었기에 한국을 꼭 나가곤 했다. 희한하게도 매년 2년에 한 번 꼴이었다.


2년 터울로 낳은 아이들 덕에 매년 2년씩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아이는 한 명에서 둘로, 둘에서 셋으로 그리고 셋에서 넷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아이들을 데리고 방문한 2015년을 끝으로 나의 한국 방문기는 정체기에 접어들었다.


2년 터울로 뵙는 엄마는 젊은 할머니에서 이젠 그냥 평범한 할머니 모습으로 변하셨고, 점점 아픈 곳이 많아지며 약해지고 계신다.  

장기간 복용한 많은 약들의 부작용으로 인해, 피부는 스치기만 해도 멍들고 찢긴다. 골다공증이 심하게 생겨 조금만 부딪혀도 뼈가 으스러진다. 그리고 면역 억제제 덕에 매년마다 감기를 달고 사신다. 폐에서는 쇳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이제는 차오르는 가래를 항상 뱉어내시며 지내신다.


13년 전 이식 수술을 받고 모든 부작용을 이겨낸 뒤, 엄마는 웃으셨다. 다시 살아나신 것 마냥. 한국에 방문한 손주들을 품에 안고 예쁜 봄꽃이 피어난 울타리를 찾아 앉으시며 환하게 카메라를 향해 웃음 짓던 엄마의 얼굴은 여전히 내 사진 속에 남아있다.


13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식받은 장기는 그 기능의 끝을 서서히 보여주고 있다. 이식받은 장기의 기한이 10년이라더니 엄마는 검사 때마다 신장의 기능이 상실되는 것을 보신다. 어찌 모를까? 화장실 갈 때마다 당신이 느끼는 그대로 숫자가 보이는 것을..


13년 더 나이가 많아진 엄마는 이제 기운이 없으시다. 여기저기 깨지고 으스러진 뼈는 제대로 붙을 새 없이 또 부러지는 바람에 온 몸은 통증의 지배를 받고 있다.  


매일매일이 신음인 엄마는 전화만 드리면 우신다.

몸이 무너진 엄마의 마음은 함께 무너져 내리는 듯하다. 그리고 무너져 내리는 마음보다 더 많이 몸은 가라앉으시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신다.


마지막으로 엄마를 방문했을 때, 상담소를 찾아서 모시고 가려했다. 10년의 시집살이, 제대로 남의 편 노릇을 해주셨던 우리 친정아버지 덕에 화병을 안고 사신 엄마의 우울증은 몸이 아프듯 더 깊은 심연의 깊이로 가라앉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고집을 부리고 가시지 않던 엄마를. 포기해야만 했던 나... 과연 난 그때 어떻게 했어야 후회를 하지 않았을까?


매번 당신의 딸이 쇠고집이 있다며 핀잔주시던 엄마는 당신의 그 고집을 내가 꼭 빼닮았다 하시면 인정을 하실까?


전화를 할 때와 끊을 때의 나의 무게감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르다. 엄마의 울음이 나의 마음을 짓누르고 안타까운 내 마음은 연신 꼭 쥔 내 주먹 안에서 안타까움에 흔들릴 뿐이다.


엄마는 아프다. 건강하게 지내시다 어느 날 갑자기 가실 수 있는 그 이별이 내겐 보이지 않는다. 엄마와의 이별은 나에게 준비된 이별이 될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찢기는 이 마음에도 나는 이 이별을 조금씩 준비해야 함을 조금씩 더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아슬아슬한 하루를 살아가는 엄마

이제는 설 기운조차 없다며 누워있어야 한다는 엄마

딸 목소리만 들어도 울음을 쏟아내는 나의 엄마

멀리 와서 미안하고, 돌아가지 않았음에 미안하고

멀리 살고 있음에 미안해요.

보기만 해도 이쁜 손주들 넷이나 낳아놓고도 품에 안고 따스한 온기조차 제대로 느끼게 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11월 27일 엄마의 생신이 다가온다.

아이들과 함께 전화하며 생신 축하한다 말씀드릴 수 있는 이 날이 몇 번이나 더 올지 모르겠지만 금년에도 환한 웃음으로 축하해드릴게요.


고통스러워도 힘들어도 잘 견디어 내주시길...

사랑합니다. 나의 어머니

예쁜 길을 보면 엄마랑 함께 걷고 싶다. 이 곳에 오실 수는 있을까?(photo by Co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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