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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mory Aug 11. 2023

소설 ‘난주’와 조선 천주교 전파의 뒤안길


1.


김소윤의 소설 [난주]를 읽고 떠오른 생각이다.


‘난주’의 본명은 정명련이며 그의 부친은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이다. 난주는 남편인 황사영이 1801년 신유박해 때 백서 사건으로 처형된 후 제주도의 관노가 되었다. 난주라는 이름은 관노가 되었을 때 사용된 듯하다.

정약현의 부친은 정재헌이고 모친은 정재헌의 첫째 부인인 의령 남씨다. 의령 남씨와 사별 후 정재헌은 윤소온과 혼인하여 첫째 딸과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세 아들을 더 얻었다. 이 형제와 가문은 조선의 천주교 발전 역사에서 매우 특이하고 지대한 역할을 했다.


소설 [난주]는 작가 김소윤이 황사영의 처형 이후 정명련의 일생을 허구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이 소설은 작가의 말대로 역사적 사실에 기반했으나 전적으로 허구이다. 허구이기는 하나, 작가는 역사적 사실을 올바로 조명하기 위해 조선 천주교 역사를 세세히 조사했으며, 특히 정명련의 삶을 정밀하게 추적하여 이 소설을 구성했다. 


김소윤이 정난주를 소설로 만들고자 꿈을 꾼 것은 2013년부터다. 그녀는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 천주교 역사와 정약용 가문의 역사를 샅샅이 뒤졌다. 그래야만 그 가운데 정난주 마리아라는 여성의 삶의 일대기를 그리고자 하는 상상의 단초를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선 명문가의 장녀로서 천주교도의 삶을 살았던 여인. 남편을 잃고 아들과 떨어져 한평생을 제주의 관비로 살아야 했던 여인. 내게 그 여인은 정약용의 조카, 황사영의 아내…… 그런 누군가의 ‘무엇’이 아니라, 정난주란 이름 자체로 물음표가 되어 다가왔다.” (작가의 말 중) 


김소윤은 이 소설에서 놀라울 만큼 제주도 사투리를 정확하게 구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1980년 전라북도에서 태어났으며 고려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는 그녀는 도대체 어떻게 제주도 말을 알고 글을 썼을까. 작가로서 사건의 현실성과 구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작중 인물들의 대화를 이렇듯 성실하게 구현해 낸 노력을 높이 사지 않을 수 없다.


제주도는 서울에서 가장 멀고 섬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다른 지방 사투리에 비해 특히 서울 말과 격차가 더 큰 듯하다. 따라서 독자는 소설 속 인물들의 대화에서 나타나는 제주도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말의 맛을 올바로 느끼지 못할 우려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불가피하다. 이 작품은 제6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인데, 내용적으로나 문장과 어휘로나 마땅히 받을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된다.

제주도 방언이 아니라 해도 작가 김소윤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풍부한 어휘력과 놀라운 문장력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아래 문장처럼 주인공의 암울한 처지와 해지는 주변 풍경이 선연히 눈에 보이는 듯 사실적이고 극적으로 적어내는 묘사력과 표현력은 또한 어떠한가.


“해는 아직 등성에 걸리었고, 찬바람은 얇은 홑옷을 파고든다. 쌀쌀할 법도 하건만 난주에게는 그 편이 오히려 신선하다. 정처 없이 걸었다…. 성 밖을 나서자 띄엄띄엄한 초가 너머로 누런 초지와 오름이 한가득이다. 시들부들 지쳤던 난주는 외려 기운이 나는 듯해서 조금 더 걸었다. 검은 자갈과 풀 따위가 뒤덮인 적막한 소로를 따라 한 식경을 착실히 걷자 곧 나풀나풀 흐드러진 억새밭이 나타난다. 뜻밖의 절경을 만났기에 난주는 그대로 멈춰 섰다. 얼굴은 불그레한 홍조에 물들었고, 대지는 점차 저녁놀 속에 갇힌다. 뒷걸음질을 치듯 서성이다 낮은 죽담을 발견하고는 덜푸덕 주저앉았다. 갈옷보다 나을 것도 없는 승새 굵은 무명 치마가 아이들의 땀과 고름으로 잔뜩 얼룩져 있었다. 손끝으로 그 흔적들을 매만지며 오래도록 시달렸던 신음과 열기를 되새김질하였다. 깜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였다. 그것만은 부끄럽지 않다. 그래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습기를 머금음 매운바람이 불어와 난주의 머리채를 흐트러뜨렸다. 말라비틀어져 바사삭 부서질 것 같은 가슴에도 눅눅한 슬픔이 번진다. 현실을 회피하고 싶은 간악한 마음이란, 결국엔 연약함과 다름 아닐 것이다. 난주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씻기도 하면서 붉던 놀이 까맣게 사위도록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160-161쪽)


하필 정명련이 제주도로 유배되어서 소설의 거의 모든 전개는 제주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제주도는 비록 한반도에서 가장 큰 섬이기는 하지만, 섬이라는 이유만으로 역사적으로 언제나 육지로부터 차별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중앙에서 멀고 배를 타고 바닷길을 가야 한다는 사정으로 인해 섬은 언제나 육지로부터 소외되고 차별받고 수탈당했으며 소수자적 지위에 머물게 된다.


전자본주의 사회에서 중앙 지배계급은 언제나 중앙에서 먼 곳, 특히 섬을 가장 특권이 낮은 지역으로 간주했다. 이 소설에서 나오는 제주도와 추자도가 그렇고,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이 유배를 갔던 흑산도도 그렇다.


2.


세계 기독교 전파 역사에서 조선은 매우 특이하고 독특한 곳이다. 조선은 선교사가 한 명도 들어오지 않은 상황에서 18세기에 실학자들과 풀뿌리 민중에 의해 자발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나라로 유명하다. 유교 문화와 성리학에 심취해 있던 조선의 학자들이 청나라로 전파된 자연과학과 기독교를 서양의 학문으로 이해하고, 보유론적 관점에서, 즉 성리학의 미비한 점을 보완하고자 서학을 받아들이려고 했으며 그로 인해 자동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조선 기독교 발전의 특수성이다.


1795년 중국에서 주문모 신부가 잠입해 들어올 때까지 조선에는 한 명의 성직자도 없었다. 김대건(1821-1846)이 조선 최초로 천주교 사제 서품을 받은 것은 조선에서 기독교가 이미 상당히 전파되었던 1845년 8월이었다. 그는 그해 10월 가까스로 조선으로 들어왔지만, 이듬해 6월 선교사 입국로를 찾기 위해 황해도로 갔다가 체포되어 9월에 순교하였으므로, 사제로서 그의 활동 기간은 매우 짧은 편이다. 그러므로 조선에서 천주교의 초창기 전파와 박해와 순교와 발전은 거의 모두 평신도들에 의해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836년 김대건과 함께 마카오로 유학했던 최양업(1821-1861)은 수차례 동안 조선 입국에 실패했다가 1849년 김대건에 이어 두 번째로 사제 서품을 받고 입국했다. 그는 성직자로서 과로하여 객사할 때까지 10년간 전국을 걸어 다니면서 성직자로서 적극 활동했다. 이로 인해 천주교에서 김대건은 ‘피의 순교자’로 불리지만, 최양업은 ‘땀의 순교자’로 불린다. 한편 김대건, 최양업과 함께 마카오로 함께 유학을 떠났던 최방제는 1837년 마카오에서 풍토병으로 사망했다. 이들 세 명이 조선 최초의 신학생이었다.)


18세기말 실학자들은 특히 청나라를 오가는 사절단을 통해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비롯한 서양 서적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렇게 수입된 서적들을 통해 기독교는 실학자들에 의해 연구되고 민중 속으로 전파되었다. 그런 사정으로 인해 조선의 초기 기독교 인물들 중 중인 계급에 속하는 역관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들이 천주교 전파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선으로 기독교가 전파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초기 인물들 가운데 이승훈(1756-1801)은 청나라로 가는 사절단의 일행인 그의 부친을 따라서 북경으로 갔으며 1784년 그곳에서 조선 최초로 기독교 세례를 받은 사람이다. (그는 정재헌의 둘째 부인 유소온이 낳은 첫째 딸의 남편이자 정약용 형제의 매형이다.) 이벽 등 초기 기독교 신앙 연구자들은 자신들의 모임에 참여하고 있었던 이승훈에게 가능한 한 많은 서학 자료를 구입하여 가지고 오라고 했다.


이승훈은 이벽(1754-1785), 권철신(1736-1801) 등과 조선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를 건설하고 집단적으로 기독교 교리를 연구했다. 그들이 만든 명례방공동체에 정약용 삼형제도 참여했다. 명례방(서울 명동)에 있는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교리연구 공동체로 모였던 명례방공동체는 1785년 적발되어 조선 최초의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부각됐다.


명례방 사건 (또는 추조적발사건)으로 인해 중인 계급에 속한 김범우(1751-1787)는 유배지로 끌려갔다가 사망하고, 양반이었던 다른 사람들은 사면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때까지 천주교에 유화적이었던 정조는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금령을 내렸다. 명례방공동체를 이끌었던 이벽은 이 사건 이후 부친에 의해 가택연금 상태에 있다가 사망했다. 이벽은 정약용 삼형제의 배 다른 맏형인 정약현의 처남이었으며, 당시 천주교 신앙 공동체를 이끌었던 지도자였다.


1787년에는 반촌(현재 서울 명륜동 혜화동 일대)에 있는 김석태 집에서 이승훈, 정약용 등이 여전히 교리 집회를 열고 있는 것이 발각되어 ‘반회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대한 상소문이 빗발치자, 직접적인 박해는 벌어지지 않았으나 조정에서 서학 서적의 도입과 유포가 문제시되었다. 정조는 이듬해에 전국적으로 천주교 관련 서학 서적들을 색출하고 소각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1791년에는 정약용의 외사촌인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한 후에 천주교 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신주를 불사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일찍이 정약용과 함께 명례방공동체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그의 외사촌인 권상연 또한 제사를 거부했는데 이로 인해 이들은 전주에서 참수당했다. (그 자리에 전동성당이 건립되었다.) 이를 ‘진산사건’이라고 하며, 윤지충과 권상연은 조선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진산사건 이후 제사 문제로 인해 다수의 양반들은 천주교에서 떠나고, 이후 천주교는 주로 중인들과 서민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성직자도 없이 자발적으로 천주교가 발전하고 있었던 조선의 기독교인들은 북경 교구에 적극적으로 성직자 파견을 요구했으며, 그 결과 1795년에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가 몰래 입국했다. 포졸들이 그를 체포하고자 했으나 실패했으며, 그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순교자가 발생했다.(‘을묘박해) 정조 사망 직후 왕위에 오른 어린 순조를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는 1801년 남인이 중심이 된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신해박해)


신해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서울에서 활동하던 황사영은 곧바로 충북 제천으로 숨어들었다. 그는 조선에서 천주교 전파를 위해 서양의 파병을 요구하는 편지를 중국에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몰래 보내려 했으나 그 백서가 발각됐다. (황사영 백서사건) 


황사영은 서소문 앞에서 능지처참을 당했으며, 황사영의 어머니는 거제도로, 아내인 명련은 제주도로, 아들 경한은 추자도로, 각각 노비로 유배되었다.

洪羲運, 以義禁府言啓曰, 卽接漢城府牒報及西部成冊, 則大逆不道罪人嗣永應坐諸人, 査出以來矣。 其母允惠慶尙道巨濟府, 妻命連全羅道濟州牧大靜縣, 竝緣坐爲婢, 子景漢年二, 以年未滿, 依律文免絞, 全羅道靈巖郡楸子島爲奴, 而右罪人等今方捉囚, 當部竝令刑曹押送于各其配所, 何如? 傳曰, 允。

대역부도(大逆不道) 죄인 황사영의 어미 이윤혜는 경상도 거제부의 관비로 삼고, 처 정명련은 전라도 제주목 대정현의 관비로 삼고, 아들 경한은 두 살인 까닭에 법에 의해 교형을 면제하여 전라도 영암군 추자도의 관노로 삼는다 (승정원일기 1801.11.7)


3.


정명련은 18세에 두 살 아래인 황사영과 혼인을 했다. 황사영은 16세에 진사 합격으로 정조 임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 명련의 숙부인 정약전·정약종·정약용, 외숙 이벽, 고모부 이승훈 등은 당대 조선 최고의 지성들이었으며, 조선에서 천주교를 발전시킨 핵심 멤버들이다. (명련의 부친 정약현은 가문을 지키기 위해 천주교와 거리를 두었다고 한다. 정약용 형제들 가운데 가장 늦게 천주교인이 된 정약종은 1787년 ‘반회사건’ 이후 오히려 천주교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제사까지 거부하다가, 아예 고향인 마재를 떠나 한강 건너로 이사를 했으며 결국 신유박해 때 순교했다.)


이벽의 부인인 외숙모 유한당 권씨는 <천주실의>와 <칠극>을 여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언문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유교 지식을 천주교리로 해석한, 여성들을 위한 <언행실록>을 짓기도 했다. 어쩌면 명련 자매가 그 최초의 독자였을 것이다. 정명련의 여동생은 기해박해(1839년) 때 남편 홍재영과 함께 순교한 인물이다.

남편 황사영이 서소문에서 비참하게 처형당한 후, 시어머니와 함께 유배형을 받은 정명련은 겨우 두 살인 아들 경한을 두고 차마 죽을 수 없었다.


“어미란 양반이고 천민이고 하늘 아래 가장 강했다. 난주는 시모를 보며 죽음을 택하지 못한 자책감을 간신히 덜어냈다. 내 속으로 낳은 새끼를 위해 무엇인들 못 하랴. 죽으라 해도 죽을 것인데 살아야 한다면 살고야 마는 것이다. 성모께서 처녀의 몸으로 잉태한 예수를 기쁨으로 낳았으며, 그 아들의 마지막 길까지 묵묵히 곁을 지키지 않았던가. 난주는 제 세례명인 마리아의 귀한 이름과 그 뜨거운 모정을 떠올리며 자신을 위로했다.

살아, 살자꾸나. 하늘에 가거들랑 살아있는 순교도 있었노라 자랑이나 하자꾸나.

흔들리는 마음에 빗장을 채우며 난주는 살아있다는 죄스러움을 씻었다.”(19쪽)


유배를 떠나는 명련은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떠올리면서 “살아있는 순교”의 길을 택했다. 명련은 겨울 유배 천리 길을 가면서 죽을 고비를 넘겼을 것인데, 거제도로 유배를 가는 시어머니와는 삼례에서 헤어진다. 이후 명련은 제주도로 가는 길에 들른 추자도에서 두 살배기 아들과도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을 한다.


난주라는 이름은 아마 제주도에서 노비가 되면서 사용했던 듯하다. 소설에서는 명련이 유배 가는 도중 추자도에서 아들 경한(소설에서는 경헌으로 나옴)을 자유롭게 살도록 하기 위해 추자도 바닷가에 있는 나무에 묶어놓고 떠나는 것으로 나온다. 그것은 두 살배기 아들이 제주도로 가면 노비로 살다가 죽을 것으로 염려한 명련이 아들을 추자도에 남겨두어 자유롭게 살게 하고자 한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들 경한은 원래 추자도의 관노비로 유배당하도록 형을 받았으므로 그 역시 노비로 살았을 것이다.


작가는 난주가 아들 경헌과 헤어지는 과정을 이렇게 묘사했다. 난주는 서울에서 가지고 온 패물로 나졸을 포섭하여 경헌을 해안에 남겨두기로 하고 나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일 새벽, 배가 뜨기 전에 저곳에 아이들 데려다 놓으시오. 울지도 못한 지 오래되었으니, 울더라도 그저 속으로나 울 것이오. 허나 행여라도 아이가 바다로 빠지는 일이 없도록, 긴 무명 끈을 아이 몸에 묶어 저 소나무에 이어주시오” (48쪽)


이런 방식으로 아들과 헤어지든, 실제로 아들이 관노비가 되어 헤어지든, 겨우 두 살배기 아들을 두고 제주도로 끌려가는 어미 난주의 마음을 나는 차마 헤아릴 수 없다. 남편이 처형당하고 가문이 멸족될 위기에서 시어머니는 거제도로 유배 가고 아들과 함께 천리 너머 유배지로 오다가 아들마저 추자도에 남겨두고, 자신은 제주도로 끌려가는 상황이었다. 나는 난주가 추자도에 남겨둔 아들을 그리워하면서 관노의 삶의 견디어 살았을 것이라고 상상할 뿐이다.


소설에서 명련의 아들 경헌은 다행스럽게도 추자도에 있는 어부 오씨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무사히 성장했다. 실제로도 그는 살아남았으며 그의 후손이 추자도에서 살았다고 한다. 소설에서는 난주가 65세 무렵에 추자도로 가서 아들과 상봉했으며 일년 정도 함께 살았던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난주는 추자도로 가지 못했으며 제주도에서 내내 노비로 살다가 죽었다.


4.


오늘날 천주교 대정성지로 꾸며진 정난주 마리아의 묘역이 대정읍 동일리에 있다. 이곳으로 올레길 11코스도 지난다고 한다. 소설과 달리 난주는 인생 말미에 추자도로 가지 못했다. 관노가 제주도를 벗어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당시 추자도로 가는 뱃길은 험난하기만 했으므로 60대 여인이 그 길을 갔을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소설에는 난주가 대정현에서 차귀진으로 쫓겨나서 준 의원 생활을 하고 구휼활동을 하면서 사는 장면도 나오지만 이 역시 작가의 상상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대정현에서 ‘한양 할머니’로 불렸다고도 하는 난주는 모슬포에서 1838년 2월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다행히 그녀가 양모가 되어 키웠다는 김상집 형제가 그녀의 장례를 치렀으며, 그의 후손들이 정난주 마리아의 묘를 관리했다고 한다. 소설에서도 그려진 바 있지만, 난주는 생전에 마을 사람들에게 전교도 했다 하니, 이로써 그녀는 제주도에서 처음으로 천주교를 전파한 인물이 되었다.


1909년 제주성당의 라크부 주임 신부가 정난주 마리아의 후손을 찾아 추자도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는 황우중이라는 어부를 만났는데, 그가 바로 난주의 증손자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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