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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mory Mar 17. 2024

진도의 시서화와 운림산방

진도 여행 이야기 (10)

진도는 소리만 유명한 곳이 아니다.

진도는 그림과 서예에서도 역사와 조예가 깊다.


어느 가게에 들렀을 때 진도의 한 주민이 다른 관광객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

"진도에 와서 소리, 글씨, 그림에 대해 논하지 말라"라고.

그만큼 진도는 소리와 글씨와 그림에 있어서 탁월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왜 그럴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시대의 유배 형벌에 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진도는 조선 시대에 유배지로서 유명한 곳이다. 조선시대에 유배(流配, penal transportation) 또는 귀양(歸養)은 사형 다음으로 중한 형벌이며, 죄인을 중앙에서 먼 곳으로 격리수용하는 것을 말한다. 유배는 멀리 갈수록 무거운 형벌이라고 할 수 있다. 주요 유배지는 한양에서 가장 먼 곳인 서남쪽 해안가 또는 함경도와 평안도 같은 북쪽 변방이었는데, 조선 팔도 가운데 유배자가 가장 많은 곳은 전라도였다.


2017년 호남지방문헌연구소에서 출판한 <호남유배인 기초목록>에 따르면 호남으로 유배 온 사람은 928명에 이른다. 진도는 조선팔도에서는 유배자가 세 번째로 많은 곳이다. 유배자가 가장 많은 곳은 제주도이고, 두 번째는 거제도이다. 제주도에는 239명이 유배를 갔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유배자 숫자가 가장 많은 곳은 전라도이며, 신안(160명), 진도(109명), 완도 (98명) 순이다. 이 세 지역에만 전체 유배자의 36%가 몰렸다. (유배자에 관한 연구는 아직도 계속 진행 중인데 유배자 기록이 새롭게 나타나서 숫자는 증가하고 있다. 그렇다 해도 조선시대에 유배자가 전남 지역에 가장 많이 몰린 것은 확실하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게 전라도, 특히 진도에 유배자들이 몰리면서 그곳에서 새로운 문화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서해와 남해가 만나는 한반도 서남쪽 끝 지방에 있어서 각종 해산물이 풍부한 진도는 중앙에서 내려온 유배자들을 만나면서 독특한 문화예술 세계를 구축하게 되었다. 주요 정치범이나 사상가들이 조국을 떠나 망명한 곳에서 새롭고 독특한 '망명문학'과 문화예술을 탄생시키는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의 주된 공통점은 인간의 고독과 고뇌와 고통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진도의 미술은 특히 조선 문인화인 남종화의 대가 소치 허련 (1803-1898)으로 인해 큰 빛을 발한다. 허련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다.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 갔을 때 진도 출신 허련은 1년이 넘도록 제주도를 세 차례나 오가면서 스승을 보살폈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허련은 28세 때 해남 녹우당에서 공재 윤두서의 그림첩을 보고 크게 감명받았다고 한다. 이후 허련은 윤두서로부터 받은 영향력을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으로 발전시킨 결과 김정희로부터 크게 인정받았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세한도로 유명한 김정희는 허련의 작품들에 대해 "압록강 동쪽에 소치만한 그림이 없다'라고 했으며, 나아가 "소치의 것이 내 그림보다 낫다"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까다로운 스승 김정희로부터 이같이 후한 점수를 받은 허련은 결국 당대 최고의 화가로 등극했다. 그래서 당대 최고 화가로서 임금 (헌종) 앞에서 그림을 그려 받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그것도 헌종의 붓과 그림을 빌려서 세 차례나.


1856년 스승 김정희가 세상을 떠나자 허련은 이듬해에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화실을 짓고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곳이 바로 운림산방이다. 이후 그곳은 현재까지 대대로 미술가들을 배출하면서 호남 회화의 상징적 공간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문인들과 사대부들이 그린 그림을 문인화라고 한다. 문인화가들은 주로 수묵 산수화인 남종화를 그린다. 남종화는 원래 중국 당나라 시대에 북종화와 함께 양대 화풍으로 발전했다. 왕유를 주축으로 발전된 수묵 산수화를 남화 또는 남종화라 하고, 이사훈을 주축으로 발전한 채색 산수화를 북화 또는 북종화라 한다.


중국 화풍이 조선으로 이어져 발전되었다고 하지만, 조선은 나름대로 독자적인 화풍을 발전시켰다. 그러므로 남종화 북종화의 화풍과 역사를 반드시 중국 미술의 맥락에서 이해하거나 해석할 필요는 없다. 어쨌든 간단히 말하면, 북화는 채색 위주로 궁중의 전문화가나 장식적 직업 화가들이 선호하는 작품인 반면, 남화는 수묵을 위주로 그린 문인화적 요소가 강하다. 허련은 조선 후기 남화의 대표적 화가로서, 왕유의 이름을 따서 허유라고도 알려져 있다.


소치 허련이 살던 고택


첨찰산 아래 자리 잡은 운림산방은 초가로 된 살림채가 있지만, 1980년대 들어 현대식 기념관이 옆에 지어졌다. 그 앞에는 네모난 연못이 있고 그 가운데 작은 섬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배롱나무가 멋들어지게 붉은 꽃을 피우고 있어,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운림산방을 찾는 이들은 이 작은 연못가에 와서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친구들과 함께 그곳의 풍경에 감탄하면서 사진을 찍어댔다. 그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그림을 잘 모르는 나는 그림보다 그 자연 경치가 눈에 더 삼삼하게 남았다.



연못 가운데 배롱나무가 멋들어진 운림산방의 정원


한여름에도 빨간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가 물에 비쳐서 더욱 아름답다


운림산방에는 허련의 후손들이 4대째 회화의 맥락을 이어오고 있다. 그로 인해 진도는 남종화의 성지로 인정받고 있으며, 운림산방은 진도에 오는 관광객들이 반드시 찾아야 할 명소로 자리 잡았다. 운림산방 안에는 현재 허련과 그의 후손들이 남긴 작품의 복제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후손들이 진도를 떠나면서 점차 원형을 잃고 방치되고 있던 운림산방을 허련의 손자인 남농 허건 (1908-1988)이 1982년에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복원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본 운림산방 풍광


진도에서 4대가 화가를 배출한 집안은 이 집 외에는 없을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대한민국에서 허련 같은 위대한 화가를 포함하여 내리 4대째 화가들을 배출한 집안이 또 있을까 싶다. 시대와 문화가 급변하는 가운데서 집안의 전통을 이렇게 꽃 피운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림 등 문화재에 관심이 많지 않은 진태는 박물관을 혼자서 횅횅 돌아 먼저 빠져나갔고, 이어 재관과 정상도 따라 나갔다. 나 역시 그림과 한문을 잘 이해하지 못한 채 대충 살펴보면서, 어영부영 전시관을 돌아 출구에 도착했다. 그러나 살을 태울 듯한 무더위가 작렬하는 밖으로 감히 나가지 못하고 피곤한 몸도 쉴 겸 잠시 입구에 있는 실내 의자에 앉았다.


역사 교사들인 향숙과 희선은 끊임없이 뭔가 재잘거리면서 느릿느릿 운림산방을 살폈다. 역사 교사라서 그렇다기보다 그들은 여성 특유의 세심한 관찰과 감정과 배려가 있다. 남성들은 그런 맛이 없다. 과감하고 결정적이고 진취적이고 공격적이다. 나이가 들면 호르몬 변화로 인해 남성은 여성적으로, 여성은 남성적으로 변한다고 하는데, 내 친구들은 아직까지 그런 변화가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 듯하다. 피곤했던 차에 잠시 눈을 감고 쉬기도 했던 나는 한가로이 작품들을 음미하고 나오는 향숙과 희선을 전시관 입구에서 맞았다.


먼저 바깥으로 나온 남자들은 운림산방 건너편에 있는 편의점 그늘에서 자리를 잡고, 그새 노란 빛깔의 울금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날이 어찌나 더운지, 전시관 출구를 나올 때 강렬한 햇빛이 눈에 닿으면서 현기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대지를 달구는 강렬한 햇빛이었다. 무더위에다 전날밤 한잠도 자지 못한 피로감을 감추지 못하면서 나는 밝은 빛 속으로 휘청거리면서 나아갔다.


아침에 급히 나오면서 하필 챙이 큰 내 모자를 집에 두고 나온 터라 햇빛 받기가 겁날 정도로 뜨거운 날이었다. 다행히 정상이 야구모자를 빌려 주어서 나는 겨우 햇빛을 가릴 수 있었다. 머리가 멍멍한 느낌이 드는 가운데 운림산방을 나오면서도 나는 진도가 예상치 않게 색다른 섬이라고 생각했다. 진도보다 큰 섬들인 제주도와 거제도에도 가보았지만 진도가 가진 문화예술의 품격을 따라올 수는 없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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