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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mory Mar 18. 2024

진도 소전미술관

진도 여행 이야기 (11)

운림산방에서 나온 우리는 점심을 어디서 먹을까 논의했다.

재관과 정상은 여행 경험상 이런 곳에서는 군청 근처에 가면 으레 맛집이 있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공무원들이 점심을 먹고 저녁에도 한잔할 수 있는 식당들이 있으리라는 판단이었다. 우리는 진도의 중심지도 구경할 겸 진도 군청으로 향했다. 일요일 낮이라서 그런지 더워서 그런지 군청 앞 거리에는 자동차도 행인도 거의 없었다.


진도 군청은 진도 본섬과 부근에 있는 45개 유인도를 포함하여 무려 256개 섬을 관할하고 있다.

진도는 총면적 440 제곱킬로미터에 이르고, 인구는 1960년대~70년대에 10만 명을 헤아렸으나, 이제는 3만 1천 명을 조금 넘을 정도로 크게 줄었다. 섬들이 많은 만큼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이 유명하며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진도의 섬들은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 뒤에 엄청나게 슬픈 역사를 머금고 있다.

몽골 침략에 저항했던 고려말 삼별초가 진도에서 격파당했던 1271년, 진도 주민들은 전쟁의 악몽에서 벗어나자마자 모두 몽골로 끌려갔다. 그 후 다시 정착하여 남아 있던 섬 주민들도 고려 충정왕 2년인 1350년 모두 해남으로 이주해야 했다.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면서 섬을 비우는 공도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진도에 다시 사람이 거주하게 된 것은 조선 태종 9년 (1409년) 때였다. 진도를 개척하고 목장을 만들기 위함이었는데, 주민들의 입주를 돕기 위해 10년간 세금을 면제해 주는 조건을 내세우기도 했다.


2014년 세월호 사건이 발생하면서 진도는 세간의 주목을 크게 받았다. 고등학생 다수를 포함하여 304 명이 사망 실종한 이 사건으로 인해 온 국민이 진도를 주목했다. 팽목항이라고도 부르는 항구는 2013년에 공식적으로 진도항으로 바뀌었다. 이 항구 주소가 진도군 임회면 팽목리에 있기 때문에 오랫동안 팽목항으로 불렸던 것이다.


목포 시에서 6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진도는 서해와 남해가 만나는 곳에 있다. 서해에서 남해로 가거나, 그 반대인 경우에 배들은 진도 동부 해안과 해남군 사이에 있는 명량해협을 지나거나, 진도의 남쪽 해안 쪽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진도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군사 지역이 되었고, 해안에는 일찍이 군사시설이 발달했었다. (1597년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함선으로 왜군 130여 척을 이 좁은 해협으로 끌어들여 물리친 명량대첩은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는 군청 앞에서 '달님이네'라는 식당을 발견했다. 이름부터 특이하고 정답고 끌리는 데가 있었다. 정상과 진태는 군청 앞에서 장사를 하는 만큼 맛이 없을 수 없는 식당이라고 강한 추측성 발언을 했다. 그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지나치게 무더운 상황에서 배고픔을 참으면서 식당을 찾아 돌아다니기는 어려웠다. 우리는 그늘을 찾아 걸어서 그 식당으로 들어갔다. 한정식 백반 집인데 반찬으로 나온 튀긴 생선과 꽃게 무침 등이 맛있었다. 나는 그 식당의 이름을 보고 '달님'이 누구인지 궁금했지만 더위와 피곤에 지쳐서 묻지는 못했다.



 

식당에서 나온 우리는 소전미술관으로 향했다.

소전미술관은 진도군청 바로 오른쪽에 있다. 그만큼 진도의 자랑거리라는 뜻일 게다.

소전 손재형 (1903-1981)은 한국 현대 서예의 대가로서 그의 독특한 글씨체인 소전체가 유명하다. 원래 1990년에 설립된 소전 미술관은 내부 개조 공사를 통해 소전의 탄생 100주년인 2003년 새로 개관했다.


진도 교동리에서 태어난 소전은 중국적 스타일에서 벗어난 서체를 만들고자 노력했으며, 그 결과 독특한 조형미를 갖춘 자신만의 서체를 개발했다. 그는 서법 또는 서도라고 불렸던 붓글씨를 예술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려는 취지에서 '서예'로 발전시킨 인물이다. 그는 특히 이충무공 전첩비에다 우리나라 최초로 국한문 혼용으로 비문을 쓰기도 했다.


소전 미술관의 안내인은 너무나 더운 날씨라 아무도 안 올 것 같던 날씨에, 우리 여섯 명이 우르르 들어가자 반가운 표정으로 나와서 우리를 맞았다. 그리고 소전이 어떤 사람인지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는 전첩비에 들어간 같은 글자라 해도, 어느 하나 같아 보이는 글씨가 없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서, 모두 소전이 한 글자 한 글자 신경 써서 글씨를 예술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말이다.


미술관 내 4개의 전시실에는 그가 쓴 글씨와 문인화, 그의 제자들의 글, 그리고 노산 이은상의 기증 작품들도 진열되어 있다. 나는 그의 글씨를 보면서 한글 캘리그래피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글씨들은 예술 작품들처럼 보였다. 그는 80여 점의 그림도 남겼는데, 일각에서는 그의 글씨보다 그림이 더 낫다는 평가도 하고 있다. 그의 글씨에 대해 전문가들 사이에 논란이 있음을 알려주는 말이다.


소전 미술관 전경 (출처: 진도군 관광문화 사이트)




손글씨를 잘 쓰지 못하는 나는 대학에 들어가면서 '타이핑'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잠시나마 타이프라이터를 사용했고 이어서 퍼스널컴퓨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손으로 쓰지 않아도 되어서 정말로 편하고 좋다고 생각했다. 글씨 쓰기의 혁명으로 인식되었다.


디지털 시대의 손글씨 쓰기는 과연 어떻게 될까.

손글씨를 잘 쓰는 것은 여전히 좋기는 하지만 디지털 시대에 그것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스마트폰과 컴퓨터 화면에서 획일적으로 쓰이는 글자에 익숙한 오늘날 젊은 세대는 확실히 예전에 비해 손으로 글씨를 잘 쓰는 것에 대한 관심이 높지 않다. 학교 교실에서도 이제는 손으로 글씨를 쓰는 대신 컴퓨터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학교 밖에서도 학생들은 컴퓨터와 스마트폰에 글을 쓰는 것에 더 익숙하다. 그들은 더 이상 손으로 글 쓰는 행위를 거의 하지 않고 있다.


소설가 조정래는 아직도 손으로 원고지에다 글을 쓰고 있다고 한다. 그는 200자 원고지에 손으로 쓰는 글자 하나하나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소설을 쓰느라 사용한 원고지가 높게 쌓여 전시되기도 해서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역사적 유물이 될 정도다. 원고를 컴퓨터에 쓰면 편집이 간편하고 쓰는 속도도 빨라지지만, 그는 오래된 습관으로 인해 손으로 쓰는 것이 더 편하다고 한다. 평생 원고지에 글을 쓴 분이니까 그럴 법도 하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작가는 컴퓨터를 이용하여 글을 쓴다. 그런 것에 대해 옳고 그름을 논할 이유는 없다. 다만 글자 하나하나에 생명을 불어넣는 행위는 디지털 시대에 낯선 것은 사실이다. 글자 자체는 매우 쉽게 쓰이고 매우 쉽게 지워진다. 컴퓨터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글자를 빠르게 복사도 하고 이동도 하고 붙여 넣기도 한다. 타이핑을 빨리 하는 사람은 말하는 속도와 비슷할 정도로 글자를 빨리 치기도 한다. 그래서 글자 쓰기에 관한 정성은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글자를 하나하나 공들여 쓰지 않는다고 해서 '글'을 엉망으로 쓴다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그 둘은 전혀 다른 문제로 분화했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사실은 예전에도 그랬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오늘날 특히 '글자 쓰기'와 '글쓰기'는 서로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글씨를 잘 쓴다고 해서 글을 잘 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에 글씨를 통해 자기를 드러내는 문화는 어떻게 변화하는 것일까.

앞으로도 상당한 기간 동안 손으로 글씨를 쓰는 일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이 디지털 문자로 동일해 보이는 글씨를 쓰는 현실을 과거 선비들이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에게는 똑바로 앉아서 벼루에다 먹을 가는 것부터, 종이 앞에 앉아서 마음을 가다듬는 것까지 모두 글씨를 쓰기 위한 예의였고 법도였다. 이제 그들이 글씨를 잘 쓰기 위해서 들여야 했던 시간과 노력은 고스란히 사라진 시대가 왔다. 붓과 먹과 먹물과 한지는 일부 서예 애호가가 아니고서는 더 이상 널리 사용되지 않는다. 우리가 어릴 때 학교에서 배우던 '붓글씨 쓰기' 수업도 사라졌을 것이다. 그 대신 타이핑 방법을 배우는 수업과 컴퓨터 기초 지식을 가르치는 수업이 생기지 않았을까. 내가 보기에는 그것이 곧 예전의 '글씨 쓰기' 수업과 같다. '글쓰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개성을 잃어버린 디지털 글자들 앞에서 글자마다 생명을 불어넣으려 했던 옛 선비들의 노력은 이제 과거로 묻혔다. 시대가 변하여 붓과 벼루와 연필과 펜은 점차 사라지고, 우리는 컴퓨터와 스마트폰 화면에 더욱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서예도 손글씨도 점차 옛 문화로 변하고 있다.




한문에 능통한 정상과 재관과 향숙과 희선은 또다시 미술관 작품들에 적힌 한자들을 해독하는 작업에 열중했다. 그림만 있는 게 아니라 글과 그림이 섞여 있는 서화의 묘미이기도 하다.


시서화의 작가가 글을 먼저 쓰는지 그림을 먼저 그리는지 나는 모른다. 실제로 시서화를 그릴 일은 없겠지만 나라면 그림부터 그리고 글씨를 쓰려고 할 것이다. 어쨌든 극히 제한된 지면에 한정된 글씨들과 그림들을 섞어서 어떤 통합적인 메시지를 전하려는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하고 부러움을 느낀다.


비교적 천천히 작품을 살펴보느라, 전시실을 도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 혼자 왔다면 아마 잽싸게 돌아보고 나갔을 것이다. 친구들이 작품들을 천천히 감상하는 동안 진태는 매우 피곤했던지, 아예 전시실로 들어오지도 않은 채 입구 의자에 앉아서 피곤한 눈을 감고 있었다. 이렇게 무더운 날에 계속 움직여야 하는 여행은 확실히 우리 몸을 피곤하게 한다. 하지만 아직도 오후에 다녀야 할 여러 곳이 남아 있었기에 우리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진태야 일어나라. 피곤했구나. 이제 나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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