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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mory Mar 19. 2024

삼별초의 대몽항쟁과 진도의 비극

진도 여행 이야기 (12)

짧은 진도 여행에 이르러 나는 이 섬이 겪은 과거의 비극을 떠올렸다.

진도의 역사를 생각하면, 이순신 장군명랑해전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나는 그에 앞서 진도에 왔던 대몽항쟁의 최후 주역인 삼별초에 관해 생각해보았다.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최우가 1219년 조직한 '야별초'에서 시작되어 발전한 사병 조직으로서 몽골 침략 시기에 조정의 항복에도 불구하고 항쟁을 지속했던 고려의 무장 세력이다. 야별초는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뉘었고, 몽골에 잡혀갔다가 돌아온 이들로 구성된 신의군까지 합하여 삼별초로 발전했다.


이들은 원래는 정규군이 아니었으나 몽골 항쟁을 벌이면서 정규군으로 재편되었다가 제주도에서 여몽 연합 진압군에 의해 궤멸되었다. 고려가 몽골에 항복하여 여몽전쟁이 끝났을 때 이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몽고와 전쟁을 지속했다. 이를 '삼별초의 난' 또는 '삼별초의 대몽항쟁'이라고 한다.




13세기 들어 칭기즈 칸에 의해 통일된 몽골은 1231년 고려와 전쟁을 개시했다.

몽골군이 고려의 수도 개경을 포위하자, 고려 조정은 강화를 요청하고 막대한 공물을 바치게 되었다. 당시 실질적 집권자인 무신정권의 최우는 몽골과 장기적으로 항쟁하기로 결정하고 이듬해에 수도를 강화도로 옮겼다.


몽골의 고려 침입은 수십 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20여만 명에 이르는 고려인이 몽골로 끌려갔다. 몽골은 지속적으로 고려 왕이 입조할 것과, 고려 조정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돌아올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무신정권은 고집스럽게 대몽항쟁을 계속 이어갔는데, 1258년 최 씨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인 최의가 피살되면서 대몽 강화 기세가 더욱 높아졌다.


1259년 고려는 몽골의 요구를 들어준다면서 조건부로 항복한 이후에도 여전히 강화도에 머물러 있다가, 강화 천도 39년 만인 1270년 마침내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고려-몽골 전쟁은 끝났다. 이후 충렬왕부터 고려의 세자들은 몽골 공주와 혼인하게 되어 몽골의 간섭을 받게 된다.


그러나 삼별초의 지도자인 배중손과 노영희 등은 항전을 지속하기로 결정했다. 삼별초는 왕온을 새 왕으로 추대하고 강화도의 거의 모든 재산과 사람들을 이끌고 진도로 이동했다. 진도로 간 삼별초는 용장사에 임시 궁궐을 설치하고 그 주변에 산성을 쌓아 도읍지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들은 고려 진압군을 막아내면서 남해안 일대에서 세력을 확장했으며, 일본과 사절을 교환하고 제주도까지 점령했다.


용장산성의 행궁지. (출처: 진도군 문화관광 사이트)


그러나 1271년 봄 여몽 연합 진압군은 진도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며, 배중손과 승화후 온은 살해되었다. 진도에서 살아남은 삼별초는 김통정의 지휘 아래 제주도로 후퇴하여 또다시 대몽 항쟁을 지속했다. 1273년 1만 명에 이르는 진압군이 제주도에 상륙하면서 4년에 걸친 삼별초의 항전은 막을 내린다.

 



나는 이제 와서 삼별초의 대몽 항쟁의 정당성을 따지고 싶지는 않다. 어찌 보면 역사상 세계 최대의 제국 몽골에 저항하는 삼별초의 기개를 높이 사고 싶다. 그들이 그렇게 싸우고 버티어서 항몽 저항의 역사로 남기도 하는 것이다. 무릇 진정한 군인이란, 그렇게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칠 충의가 넘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진도에서 나는 그런 국가의식이나 결사항쟁보다 대몽 항쟁 과정에서 섬들이 겪은 비극을 떠올렸다. 우리가 삼별초의 항쟁을 어떤 방식으로 기리며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든 상관없이, 강화도와 진도와 제주도에서 정작 중요한 일은 항전 과정에서 섬들과 주민들이 돌이킬 수 없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당시 섬 주민들에게 나라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느닷없이 뭍으로부터 나타난 군대에 의해 섬사람들은 모든 것을 징발당하고, 그들의 시중을 들어야 했으며, 그들의 막사와 궁궐과 산성을 짓기 위해 강제로 노역해야 했을 것이다. 노예와 같은 생활 외에도, 다가올 전쟁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그런 예감은 어김없이 현실로 다가와서 섬들은 전쟁터로 돌변했고, 그들의 재산과 목숨을 앗아갔다. 뭍사람들 사이의 전쟁이 섬으로 전해져서, 섬사람들을 죽이고, 노예로 삼고, 섬을 피로 물들게 했다.


나는 삼별초 군대가 강화도에 있는 모든 사람과 재산을 배에 싣고 진도로 이동했던 과정을 상상해본다.

그것이 생지옥이고 아비규환이 아니면 무엇인가.


육지에서 온 사람들에 의해, 조상 대대로 살던 섬을 버리고, 먹을 것과 입을 것마저 징발당하는 수난을 겪은 것도 모자라서, 온갖 세간살이를 싸들고 그들을 따라서 알지도 못하는 머나먼 곳으로 따라가야 하는 비참한 현실 말이다. 육지 사람들의 그 잔인한 광폭성을 어찌 다 필설로 표현할 수 있을까.


어떤 사료에는 무려 1천 척에 이르는 함선이 강화도로부터 진도로 이동했다고 한다.

그 많은 함선은 육지를 바라보면서 해안을 따라서 천천히 서해를 가로질러 남쪽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중간중간에 여러 섬과 해안에 들러서 그들이 (본의 아니게) 약탈하고 죽인 양민들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그들이 해안을 지나갈 때마다 이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얼마나 공포에 시달렸겠는가.


이들이 마침내 진도에 이르러, 진도의 관문이었던 벽파진으로 몰려드는 배들을 상상해 보라.

벽파진 어디에 천 척이나 되는 배들이 상륙할 수 있겠는가.

미처 정박할 곳을 찾지 못해 바다에서 헤맸을 배들과 피난민 아닌 피난민들의 처참한 광경과 그것을 바라보는 진도 주민들의 충격과 공포는 어떠했을까.


진도 주민들은 필경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생지옥과 아비규환은 그렇게 강화도에서 진도로, 또 진도에서 제주도로 옮겨졌고, 머지않아서 자신들이 상상하지도 원하지도 않았던 전쟁의 피바다가 몰아쳤다.


삼별초에 의해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오랜 주거지였던 강화도를 떠나야 했던 강화도 사람들. 

느닷없이 수만 명에 이르는 낯선 사람들이 나타나서 아수라장을 만들면서 참혹한 전란에 빠지게 된 진도 사람들.

애꿎게 전쟁터가 되어 개죽음을 당하게 된 제주도 사람들. 


육지에서 온 사람들은 그들에게 언제나 지나치게 억압적이고 폭력적이고 잔인했다. 나는 진도 벽파정에 이르러 그 모든 역사적 상상이 떠올라 가슴이 서늘했다. 뭍사람과 섬사람 사이의 그 길고 오래된 참혹한 질곡 관계는 뭍사람들이 쓴 역사 책에는 잘 나오지 않고 잘 알려지지도 않은 채 말없는 바닷물에 씻겨 흘러갔다.




이번 진도 여행에서 우리는 결국 피곤과 무더위와 제한된 시간으로 인해 용장산성을 가 보지 못했다. 선황산을 휘감은 도로를 달리면서 정상은 말했다.


"저 산 위에 용장산성이 있는데, 터만 남아서 별로 볼 건 없어."

용장산성에 올라가지 않게 된 우리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한 말이었다.


진도로 왔던 삼별초가 왕궁으로 삼았던 용장산성은 오늘날 돌로 조성된 터들만 존재한다. 저항군의 도읍지였던 용장산성 자리는 마치 산기슭에 있는 계단식 밭처럼 성곽의 일부 유적만 남아서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한때 그곳이 초라한 왕궁터였음을 알려준다.


진도는 그렇게 삼별초와 대몽항쟁의 기억을 머금고 있었다.


진도 용장성 (출처: 진도군 문화관광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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