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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mory Mar 20. 2024

진도 벽파진과 이순신

진도 여행 이야기 (13)

진도는 현재 삼별초 항쟁 유적보다 이순신 장군의 흔적이 더 많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걸쳐 우리 강토를 침략한 왜군은 경상도와 전라도 앞바다에서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에 의해 속절없이 무너졌다. 우리는 그 전적지의 한 곳인 벽파진으로 향했다. 그곳은 전라수군영이 있었던 곳이며, 지금은 벽파항으로 불린다.


벽파진은 진도대교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목포에서 출발한 배가 입출항하는 진도의 관문이었다. 삼별초가 진도로 들어올 때도 벽파진으로 왔고, 관군과 집중적으로 접전한 곳도 벽파진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에서 승전한 곳은 해남에서 진도로 넘어가는 진도대교 부근에 있는 울돌목으로 전해진다. 충무공이 겨우 12척의 배로 왜군 133척을 격파한 명량해전을 준비한 곳도 벽파진이다.


그래서 벽파진에는 명량대첩 승전을 기념하는 거대한 비석이 있다. 높이가 3.8미터에 이르는 이 전첩비는 1956년에 제작되었는데, 너른 바위 언덕 위에 있어서 더욱 웅장해 보인다. 비석은 거북선을 상징하는 듯 거북이 모양으로 만들어진 돌 위에 놓여 있다. 이 비석의 글은 노산 이은상이 지었고, 글씨는 소전 손재형이 썼다. 글씨 하나하나가 독특한 모습으로 쓰였다.



벽파전전첩비


나는 벽파진전첩비 앞에 서서 드넓게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위 언덕 아래로 벽파정이라는 누각이 있고, 그 앞으로 잔잔한 바다가 드넓게 펼쳐진다. 그 짙푸른 바다 위에 작은 섬들이 올망졸망 떠 있다. 420여 년 전에 이순신 장군도 그 자리에서 나처럼 바다를 바라보았을까. 이 넓은 바위에 올라서서 지형과 조류의 흐름을 읽으면서 왜군의 함선들이 언제 나타날 것인가 걱정했을까. 나는 캄캄한 바다를 바라보면서 한없는 고뇌에 차 있었을 이순신을 길게 떠올렸다. 벽파진 앞바다는 잔잔하지만 그 속에 깊은 역사를 품고 있었다.


김훈의 <칼의 노래>는 이순신의 인간적 면모를 감성적으로 적절하게 묘사한 소설이다. 김훈은 소설 속에서 이순신을 단순히 충신이자 영웅으로만 그리지 않았다. 그는 이순신이 우리와 같은 연약한 인간으로서, 우리가 갖는 고뇌를 동일하게 가지고 있음을 신중하게 그려냈다.


<칼의 노래>는 나라를 구한 영웅을 강인하고 호방한 위인으로만 그리지 않았다. 이순신은 여느 보통사람처럼 육신의 고통을 느끼고, 끼니 걱정도 하며, 여자도 찾는 한 남자로서, 그러면서도 백성과 나라를 걱정하는 군인이자 애국자로서 묘사되었다. 나는 그 소설의 역사적 진실을 헤아리기 힘들지만, 인간적 진실은 크게 다가왔다.


벽파진전첩비가 세워진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 바닷가에 벽파정이 있다.


전첩비로부터 바닷가로 이어지는 비교적 평평한 바위 끝에 벽파정이 있다.

벽파정은 정면 다섯 칸 측면 세 칸으로 2016년에 건립되었다. 우리가 도착한 벽파정에는 마침 아주머니 몇 분이 신발을 벗은 채 나무마루에서 편한 자세로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계셨다. 우리보다 연배로 보이나, 할머니라고 부르기에는 젊어 보였다.


우리가 들어가자 그분들은 우리에게 편히 쉬라고, 왁자지껄 웃으면서 정답게 말을 건넸다. 이마에 흐르는 땀도 식힐 겸, 우리도 멋진 바다 풍경을 음미하면서 누각에서 잠시 쉬었다. 서글서글한 희선은 곧바로 아주머니들 옆으로 다가가 앉으면서 말을 건넨다. 참 붙임성도 좋다.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누각에 선 우리 곁을 시원스레 스쳐갔다.



벽파정에서 내다보는 바다




<벽파정에서 다시 생각하는 이순신과 명량>


벽파정에서 짙푸른 바다를 바라본다.

8월 초 벽파정에서 내다보는 저녁 바다는 고요하다. 필시 이곳은 성웅 이순신이 섰던 곳일 게다. 언제나 막연하게 별생각 없이 사진과 동상으로만 바라보았던 이순신을 나는 다시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이순신 동상을 보았지만 그 앞에서 정말로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그의 업적을 기려본 적은 거의 없었던 듯하다. 이순신과 전라도 민중이 없었다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조선은 더욱 처참하게 무너지고, 명나라로 가려고 했던 일본에 의해 더 많은 것을 빼앗겼을 것이다. 호남이 없었으면 조선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 실감 나는 대목이다.


임진왜란에서 정유재란까지 거치면서 많게는 1백만 명에 이르는 조선인이 사망했고, 수백만 명이 굶주렸다. 전란과 함께 경복궁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가 불탔고, 농지의 66퍼센트가 파괴되었다. 하지만 일본으로부터 조선이 받은 그 막대한 수모와 피해를 어떻게 필설로 남길 수 있겠는가. 나는 이 전란의 원흉 일본으로부터 조선이 어떤 배상을 받았다든가, 말만이라도 사과받았다는 기록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의 마지막 기록일은 1597년 11월 17일이다. 그는 그해 2월 누명을 쓰고 서울로 압송되어 고문까지 받은 후 사형될 위기에 처했다. 이순신이 1597년 이른 봄 선조로부터 사형받을 위기에 처했을 때, 이순신을 적극 옹호하고 나선 사람은 정승 이원익이었다. 이순신의 일기에는 잦은 병치레로 고생하는 것에 대한 한탄, 원균에 대한 강한 경쟁의식,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비관하는 글들이 곳곳에 있다. 원균은 이순신이 서울로 끌려간 2월 초부터 3월 초까지 한 달 동안 삼도수군통제사로 활약했다.


원균은 거제도 앞에 있는 가덕도와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에 의해 처참하게 격파당했고, 그 전쟁 결과 조선 수군이 보유했던 함정 100여 척은 거의 다 침몰하거나 파손되었다. 거북선은 함상을 막고 철침을 박아놓아서 접전하여 싸울 때 왜군이 함상으로 올라올 수 없도록 했다. 배들이 접전 시 왜군은 갈고리를 조선 함상에 던져서 걸어놓고 가깝게 다가섰다. 그리고 조총을 쏘는 한편 널빤지를 넘어뜨려서 두 배를 연결한 후 칼을 들고 넘어가서 육박전을 벌이는 전법을 썼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의 함상을 덮어서, 왜군이 더 이상 조선 함정 선상으로 오를 수 없도록 했다. 그러자 왜군은 거리를 두고 거북선에 대포를 쏘는 쪽으로 전법을 바꾸었다. 그럼으로써 함상에 쇠침을 박은 거북선의 효용성은 사라지고 말았다. 이순신은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에서 거북선을 가지고 싸우지 않았다.

원균의 패배 이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하면서 전세는 달라졌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에 의해 해상 보급이 차단되어 고생했던 왜군은 1597년 8월 시작된 정유재란 때는 전라도부터 침입했다. 전라도를 장악함으로써 북쪽으로 침입을 용이하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원균이 지휘한 칠천량 전투에서 대승한 왜군은 육지에서는 남원과 전주에서 조명 연합군을 대파하고, 충청도 직산으로 진격하여 명군과 지루한 대치 상황에 이르렀다.


하지만 삼도수군통제사로 재등장한 이순신이 명량에서 왜군을 대파함으로써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절도사는 장군 또는 제독을 의미하고, 통제사는 오늘날의 참모총장 격이다.) 그 와중에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일본군 철군을 유언으로 남기자 왜군은 조선에서 철수해야 했다.


왜군은 전란에 휩싸인 3국 가운데 최대 피해국인 조선을 제쳐놓고, 명나라 진린 제독과 정전 협상에 돌입했다. (한국전쟁에서도 대한민국은 정전협상 참가국이 되지 못했다!) 뇌물까지 먹은 제독 진린은 왜군이 그냥 철수할 수 있기를 원했다. 이에 이원익은 격노하여 명 황제에게 진린의 비리를 고발했고, 명나라는 전쟁을 지속하기로 했다. 남해에서는 이순신 역시 철수하려는 왜군을 그냥 보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순신은 왜군들이 수백 척의 함선을 가지고 일본으로 무사히 돌아가면 반드시 조선으로 다시 쳐들어올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 원수를 갚는다면 여한이 없다"는 그의 말은 절절했다. 임진왜란 이후 정유재란이 벌어진 역사를 볼 때 왜군이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이미 희생된 수많은 백성과 군졸들을 위한 복수의 칼날을 가는 그의 마음은 뜨겁게 불탔다.


하지만 상상해 보라.

그가 침입한 왜군을 박멸하고 싶다고 해도, 수년간 전란으로 피폐하고 지친 수많은 조선 민중이 하루빨리 전쟁을 종식시키고 싶어 하지 않았겠는가. 조정의 주화파는 주전파를 비판했다. 전쟁을 중지하고 조속히 황폐해진 나라를 재건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이었다. 그것이 이순신에게 얼마나 많은 압박이 되었고 심적 갈등을 주었을까. 당장 전쟁을 중지하고 평화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원성을 이순신은 어떻게 참아냈을까. 그러나 그는 난중일기를 계속 썼다. 처절한 자기 다짐이 아니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598년 11월 19일 밤에 이순신은 노량에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틀어 최대 승전을 기록한다. 철군하던 왜군은 최후 결전인 노량해전에서 350여 척 가운데 50여 척만 탈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해전에서 이순신은 마치 장편소설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듯 유탄을 맞고 전사하게 된다. 이미 사천 해전에서 왼쪽 어깨에 총탄을 맞아 오랫동안 후유증을 겪어 온 그가 다시 왼쪽 겨드랑이에 유탄을 맞은 것이다. 그리하여 총 전적 64전 64승, 큰 전투에서는 31전 31승을 거둔 이순신은 그렇게 조선을 지켜내고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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