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한 달 살기 10월 23일 (2)
2. 해동용궁사
기차역에서 내린 후 해동용궁사까지 우리는 걸어갔다. 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타는 방법도 있지만 우리는 바다 옆을 걷는 해파랑 2코스의 한 구간을 걷기로 했다. 거리는 2.7킬로미터 정도.
해동용궁사 입구에 이르자, 의외로 매우 많은 사람들이 사찰로 들어가고 있었다. 마치 부산에서 이곳이 가장 유명한 관광지인 듯 보였다. 부산의 관광지 가운데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몰리는 것을 처음 보았다.
남포동이나 서면이나 광안리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 있지만 그런 곳은 관광지라고만 말할 수는 없고 부산 시민이 원래 많이 모이고 식사하는 곳이다. 그러나 해동용궁사는 온전히 탁월한 관광지 역할만 하는 곳이다. 사찰을 찾아오는 사람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외국인인 듯 보였다. 불교 신자들인 동남아 사람들이 특히 많았는데, 불상 앞에서 정성껏 엎드려 기도드리는 외국인들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그런 것은 다른 관광지에서는 보기 어려운 풍경이다.
여행을 와서도 자신의 신앙심을 가다듬고 제례를 할 수 있는 곳은 드물다. 동남아에서 기껏 한국의 부산이라는 곳을 방문했다가 문득 해변에서 바닷바람을 맞고 있는 황금빛 불상을 만났을 때 그들이 느끼는 감동은 어떤 것일까. 낯선 곳에서 긴장되고 닫힌 마음을 잠시라도 내려놓고 여행의 안전과 행복을 기원할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하긴 나도 해외든 국내든 여행에서 가끔 그런 경험을 한다. 여행하느라 힘들 때 문득 아름다운 경치가 있는 곳인데도 한적하거나 넓지만 조용한 교회로 들어섰을 때, 나는 신앙심을 넘어서 조용히 눈을 감고 잠시라도 깊은 숨을 내쉬며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분주하고 복잡하고 긴장된 순간에서 잠시나마 벗어나서 내가 어디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어떤 모습인지 되짚어볼 기회이기도 하다.
아무튼 나에게는 그저 익숙한 사찰의 불상이었지만, 또 오로지 장소만 달리하여 바닷가에 있는 불상으로 보였지만, 이곳으로 먼 여행을 온 관광객들에게 그 불상은 몹시 새롭고도 인상적인 모습이었을 것이다.
해동용궁사는 고려 우왕 2년, 1376년에 공민왕의 책사였던 나옹 혜근이 창건하였다. 그때는 보문사라 불렀다. 이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930년대 초에 통도사의 운창이 다시 지었으며, 1974년 이름을 해동용궁사로 바꾸었다.
사찰은 바다 끝에 있는 바위들 위에 지어져서 독특한 풍광과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사찰 내에 불상이 많지만, 특히 바닷가 끝에 있는 바위 위에는 황금도색된 불상이 앉아 있어서 눈길을 끌었다. 주로 동남아시아에서 온 관광객들이 그 불상 앞에서 신발을 벗고 엎드려 기도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불상 앞에는 신발을 벗고 엎드려 기도할 수 있는 깨끗한 깔개가 여러 개 놓여 있다. 대웅보전 등 다른 사찰 건물들도 모두 바닷가 바위 위에 독특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사찰은 스님들의 수련을 위한 곳이 아니라, 완전히 관광지로 보이는 곳이다. 불상들이나 사찰 건물 앞에는 불전함들이 있어서 방문객들이 헌금할 수 있도록 한다. 두툼한 초를 사서 불을 붙여 불상 옆에 놓고 기원하는 곳도 여러 곳이다.
그런 기복신앙을 무조건 안 좋다고 탓할 수는 없다. 종교의 기본 속성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이 사찰은 그렇게 구복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약한 심리를 이용하여 돈을 받아들이기 위해 유난히 노력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약간 쓰라렸다.
3. 광안리해변을 걷다
사찰에서 나온 우리는 입구에서 택시를 타고 곧바로 광안리 해변으로 갔다. 친구 Y는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바로 광안리로 가는 것이 낫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나는 물론 그의 말을 따를 뿐이었다. 택시를 타자, 다행히 택시 운전기사는 부산의 여러 변화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또한, 그는 마치 우리의 바람을 알고 있다는 듯 저 유명한 광안대교로 올라섰다. 내가 광안리 해변에서 보았던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였다. 우리는 그 위에서 정면으로 달려드는 해를 보면서 달리고 있었다.
광안리 해변에 도착한 나는 신발과 양말을 벗고 모래사장을 걸었다. 해변은 아마 2킬로 정도의 길이일 것이다. 맨발로 모래와 바닷물의 감촉을 느끼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물은 그리 차갑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모래사장 끝에 이르러 강한 바람을 내는 먼지떨이 기계를 사용하여 모래가 묻은 발을 털어냈다. 참 좋고 편리한 기계다.
아름다운 광안리 해변에서 숙소로 올 때는 지하철을 이용했다. 숙소로 가서 Y의 배낭을 내려놓고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서면시장으로 향했다. 오후 6시 40분쯤인데도 불구하고 먹거리 골목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팬데믹 이후 한국의 거의 모든 골목에서 외식 습관이 상당히 사라졌는데, 서울보다 지방에서 더욱 심해진 듯 보인다. 거기에다 후쿠시마 핵오염수 방류 사태로 인해 한국인들은 해산물 기피 현상도 뚜렷하게 증가한 듯하다. 사태가 이 지경인데, 수많은 식당 주인들은 어떻게 먹고살아야 하는지 참 암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숙소의 침대는 풀사이즈인데, 친구 Y는 침대에 함께 눕는 것이 불편하다고 방바닥에 누웠다. 비록 그가 침낭을 가지고 왔지만,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에게 침대가 좁지 않으니까 같이 누워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는 여행을 많이 다녀서 그런지 침낭에서 자는 것이 괜찮다고 했다. 나도 사실 말만 그렇게 했지, 그가 정말로 침대에서 자겠다고 했으면 조금 불편할 것이었다. 아무튼 덕분에 나는 편하게 잘 수 있었다.
Y와 한 방에서 자는 것은 수십 년만의 일이다.
아주 오래전, 그가 결혼하고 어린 아들 하나를 두었을 때 서울을 방문한 내가 그의 집에 놀러 갔다가, 작은 방에서 그와 함께 누워서 잤던 이후 처음이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그가 부인과 함께 뉴욕에 왔을 때 그들은 우리 집에서 머물렀지만 그들 부부가 한 방에서 자도록 했으므로 그때는 그가 나와 나란히 누웠던 것은 아니다.
나는 약간 예민한 편이라 누군가와 같이 자야 할 때 쉽게 잠들지 않는다.
처음에는 코를 골던 그가 이제 조용해졌다.
고질병으로 고생하는 그가 아프지 않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