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한 달 살기 10월 24일 화 맑음 (1)
1. 영도와 태종대
친구 Y가 부산으로 온 지 두 번째 날.
그가 이곳으로 오기 전부터 우리는 이틀간 해동용궁사와 영도를 다녀오기로 했었다.
그에 따라 우리는 어제는 해동용궁사를, 오늘은 영도를 중심으로 여행했다.
우리는 아침식사 후에 남포동역까지 지하철로 가서 그곳에서 영도 안으로 들어가는 버스를 탔다. 영도는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주로 서민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부산 중구에서 영도대교로 이어져 있는 영도는 이민진이 지은 소설 ‘파친코’의 첫 부분에 나오는 섬이다. 부산의 원도심이었고, 행정상으로는 섬 전체만으로 부산광역시의 영도구를 구성한다. 그러니까 내 말은 작지 않은 섬이라는 말이다.
영도는 절영도라고도 불리는데, 그림자가 끊어진 섬이라는 말이다. 섬에서 가장 높은 봉래산이 원래 절영산이었다. 절영산은 삼국사기에 처음 등장하며, ‘고려사’에 이르러 비로소 ‘절영도’라고 불렸다. 일제강점기에 절영도는 행정상으로 ‘목도’로 바뀌었지만 사람들은 계속 절영도라고 불렀다. 이후 이름을 두 글자로 부르는 관습으로 인하여, 또는 성격 급한 부산 사람들이, 섬 이름을 축약하여 부르게 됐는데, 앞글자를 따자니 ‘절도’가 되어 어감이 이상하니, 뒷글자를 따서 ‘영도’로 부르게 됐다고 한다.
섬의 면적은 14.12제곱킬로미터, 해안선의 길이는 20.5킬로미터, 섬의 최고점(봉래산)은 395미터에 이른다. 1934년에 만들어진 영도대교는 한국에서 유일한 ‘도개교’이다. 도개교란, 다리의 한쪽 또는 양쪽을 들어 올려서 배가 통행할 수 있도록 하는 다리다. 요즘은 토요일 낮에 한 차례만 다리를 들어 올리는 ‘행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이번에는 토요일 낮에 영도로 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 행사를 보지 못했지만, 이미 10년 전에 부산을 방문했을 때 그 행사를 본 적이 있다.
혹시 오래전 영화에서 부산의 다리를 보았다면, 자주 나오는 그 장면 바로 그대로다. 땡땡땡 종소리가 울리면서 오가는 차를 막아서는 봉대가 내려오고, 이윽고 다리가 들어 올려져서 다리 아래로 배가 지나가도록 했던 추억의 행사다.
영도다리는 한국전쟁 때 매우 유명해졌다.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내려가면서 헤어질 때 서로 연락할 방법을 찾다가 부산에서 가장 유명하고 찾기 쉬운 영도다리를 떠올리고, “영도다리에서 만나자”라고 말해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북에서 내려오는 피난민들은 부산에 가본 적도 없고 영도가 어디에 있는지 또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면서 영도다리라는 이름을 먼저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두고두고 되뇌었을지도 모른다.
“영도다리에서 만나자.”
그런 눈물겨운 약속을 하고 나서 이별하게 되었던 누군가가 정말로 훗날 영도다리에서 재회했을까.
누군가는 언제 만나겠다는 시간 약속도 없이 헤어진 사람을 영도다리에서 다시 만났을까.
한 많은 전쟁과 기약 없는 피난의 세월에 그런 말만 무성했을 뿐 영도다리에서 극적으로 재회했다는 말을 나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영도는 말 그대로 바다에서 산이 솟아오른 것과 같은 곳이어서, 차도가 매우 오르락내리락 꼬불꼬불했다. 버스가 그렇게 험한 길을 매우 거칠게 달려서 나는 거의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도로는 좁고 차도는 휘어진 곳이 많았다. 인도와 차도가 잘 구별되지도 않는 길에 행인들도 오가고 있어서 나는 버스가 곡예운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운전기사는 그런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거침없이 자유자재로 차를 몰았다. 버스가 혹시라도 행인을 치지는 않을까, 불쑥 나오는 다른 차와 부딪히지는 않을까, 나는 의자에 앉았지만 손잡이를 꼭 잡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어지럽게 돌아가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이렇게 전철역에서 멀고 높은 곳까지 사람과 차들이 오가는 여기가 영도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중리노을전망대에 이르러 버스에서 하차했다. 부산에서 노을 전망이 가장 아름다운 곳은 다대포라고 하는데, 중리노을전망대도 그에 못지않게 노을 경치가 아름답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대낮에 도착해서 그곳에서 노을을 감상할 수 없었으므로, 곧바로 영도 끝에 있는 태종대로 향했다.
태종대로 가는 길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있다는 태종사를 발견했다. 1976년에 건립됐다는 태종사는 태종대 가까이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고, 수국이 많이 피어나는 곳으로 유명하다. 수국이 만개하는 6~7월에는 ‘수국꽃 문화축제가’가 열리기도 한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우리가 갔을 때는 꽃 피는 시절이 아니라서 그런지 수국을 볼 수 없었다. 알고 보니 올해는 수국축제도 없었던 듯하다.
태종사는 1983년 스리랑카 정부로부터 진신사리 1과와 보리스 나무 2본을 기증받아서 태종사에 봉안, 생육하고 있다고 한다. 태종사는 작은 암자라고까지 부를 것은 아니지만 결코 큰 사찰이 아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도 오가는 사람이 거의 아무도 없어서 그런지, 경내에 작은 대웅전과 사무실이 있었지만 스님은 한 분도 보이지 않았고, 사찰 마당에 방송으로만 독경이 흘러나왔다.
태종사를 잠시 휘 둘러보고 바로 나온 우리는 곧바로 태종대로 향했다. 태종대는 영도의 끝에 있다. 그곳까지 가는 것은 꽤 힘든 일이었다. 줄곧 언덕을 올라가는 행군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아름다운 등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등대가 있는 지점은 당연히 바닷가 끝이었고 그 앞으로는 절벽이다. 그곳에 멋진 인어 조각상도 있고, 사진 찍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절경이 펼쳐져 있었다. 카메라만 들이대면 모두 아름다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풍경이었다.
영도 끝에 있는 태종대의 등대와 전망대는 이미 지난주에 자갈치 크루즈를 타고 가서 바다 위에서 보았던 곳이다. 태종대는 아주 오래전에 이따금 실연한 사람이 자살하는 곳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깎아지른 듯한 그 절벽의 높이는 아마도 100미터 정도 될 듯하다. 태종대 등대와 전망대를 나는 이번에는 영도 안에서 걸어가서 보았다. 이 절경을 보기 위해 외국에서 온 여러 관광객들도 땀을 흘리면서 절벽길을 다녔다.
이렇게 글로만 읽으면 간단해 보이지만, 실제로 태종대에 가서 걸어본 사람은 이해할 것이다. 섬의 끝 절벽에서 얼마나 힘들게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다녀야 하는지. 섬의 끝에 이렇게 푸르고 눈부신 절경이 있고, 그곳에다 이렇게 멋진 모습의 구조물들을 설치한 것을 막상 가서 보면 놀랄 것이다.
오늘처럼 맑은 날, 태종대에 가볼 것을 나는 적극 추천한다. 영도에 다른 볼거리도 많지만, 특히 태종대는 기꺼이 땀을 흘리고 가서 돌아볼 충분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물론 태종대에 가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실제로 무엇을 얻어야 할 것인지는 각자의 몫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