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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유엔평화공원

부산에서 한 달 살기 10월 25일 수 눈부시게 맑음 (1)

by memory 최호인

1. 만남과 이별


나의 친구 Y는 11시에 KTX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갔다.

겨우 이틀에 불과하지만 친구와 함께 있다가 그가 떠나니 나는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계속 혼자 있을 때는 모르지만, 친구가 와서 함께 떠난 자리는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그가 왔던 첫날처럼 우리는 또다시 차이나타운으로 가서 아침 식사를 했다. 이번에는 중국 음식이 아니라, 가정식 백반. 식사 후에 그는 서울에서 다시 보자는 말을 남기고 곧 떠났다. 나는 11월 10일에 출국할 예정이므로, 그에 앞서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 사나흘 머물면서 병원도 들르고 떠나기 전에 친구들을 만날 계획이다.


갑자기 혼자 남았음을 다시 깨달으면서 몹시 허전해졌다. 나는 부산역 광장으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눈부시게 밝은 빛이 내리쬐는 넓은 광장에 서자, 갑자기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잊은 사람처럼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 문득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 듯했다. 아직 11시도 안 된 시간이었다.


이윽고 나는 그가 권한 대로 유엔평화공원으로 가기로 했다.

부산역 앞에서 버스를 타고 유엔평화공원으로 가는 데는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시간과 장소가 빠르게 바뀔 때마다 나는 종종 순간적인 공간이동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한다. 주위 환경이 너무 빠르게 움직이는 듯해서 어지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친구 Y와 함께 아침을 먹은 것이 10시였는데, 한 시간이 지난 후에 그는 kTX를 타고 서울로 가고 있었고, 나는 유엔평화공원을 걷고 있었다. 그는 이미 대구를 통과하고 대전을 향해 가고 있을 것이었다.


살면서 만남과 이별은 수도 업이 반복된다.

그런데도 그것에 익숙해는 것은 쉽지 않다.



2. 유엔평화공원


내가 유엔평화공원이라고 불렀지만 공식 명칭은 ‘유엔기념공원(UN Memorial Cemetery in Korea)’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전쟁에 유엔군으로서 참여했다가 전사한 군인들을 위한 공동묘지이다. 현재 이곳에는 영국과 튀르키예 등 11개국 2300여 명의 유해가 묻혀 있다.


1955년 한국 국회와 정부가 유엔에 이 구역을 영구 위임하면서 시작된 이 추모공원에다 전국에 흩어진 유엔군 사망자들을 모았을 때 처음에는 21개국 1만 1천여 구의 유해가 봉안되었다고 한다. 이후 많은 유해가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해외에서 사망한 군인의 송환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 사망자가 가장 많은 미국은 전통적으로 해외 전쟁에서 사망한 군인 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하므로 이 공원에 남은 유해가 거의 없다. 그러나 영국과 영연방 국가들은 해외에서 사망한 자들을 현지에 묻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이유로 이 공원에 묻힌 유해 가운데 영국인 출신이 가장 많다.


이 공원은 언뜻 보면 그저 아름답게 꾸며진 공원과 같다. 나는 공원의 북문으로 들어왔는데, 그곳에 유엔조각공원이 있다. 거기에 말 그대로 넓은 정원에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조용한 아침 공간에 가을 나무들이 한가로웠고, 그곳에 밝고 따뜻한 햇빛이 날아들었으며 어디선가 새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따금 놓인 벤치에 앉아서 그 아침 정취를 즐기는 사람도 있었고 책을 읽는 사람도 있었으며, 산보하는 아낙네들도 있었다.


그곳부터 걷기 시작한 나는 곧 내가 공원 둘레를 감싼 담장 주변으로만 걷고 있어서 내부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공원의 구조는 묘하게도 중앙으로 들어가는 길을 매우 제한하고 있다. 결국 정문이 있는 곳까지 가야 공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므로, 나는 공원 아래쪽으로 크게 한 바퀴 돌아야 했다.


공원 입구 정문으로 가자, 두 명의 헌병이 서 있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기록관과 추모관이 있고, 그 옆으로 더 걸어가면, 비로소 묘지들이 나온다. 공동묘지이기는 하지만, 파란 가을 하늘 아래 탁 트인 잘 꾸며진 공원 경치를 보는 것과 같았다. 다만, 공원 건너편에 골프 연습장이 보여서 풍경을 망친다는 느낌이 들었다. 골프 연습장은 매우 높은 초록색 그물망을 설치해 놓았으므로 사진을 찍을 때도 자꾸 방해물로 인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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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발발, 중국과 유엔과 미국의 참전, 휴전과 분단 등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는지는 역사가나 학자들에 따라 다르다. 전쟁의 성격이 어떻든 결과는 참담하다. 남한은 다행스럽게 공산화되지 않았고, 결국 경제적으로 성공한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분단의 비극은 여전히 남아 있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지울 수 없는 영원한 상처가 되었다.


수백만 명의 사상자와 한반도의 분단을 초래한 전쟁을 되새기면서 공동묘지에 들어서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유가 어떻든, 수많은 죽음 앞에서 누구라도 경박하게 생각하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


보편적인 인간의 삶을 생각할 때 아주 적은 일부 위인들과 영웅들을 제외하고는 죽음을 넘어설 만큼 치열하거나 고귀한 사상과 이념은 없다. 누구라도 거대한 공동묘지에 들어서면 감히 뭐라고 마구 떠들 수 없는 엄숙함과 비장함에 압도된다.


이 장엄한 묘지 군상 앞에 서 있노라면 어느덧 가슴이 먹먹해지기 마련이다. 아무리 고귀하고 거룩한 인생을 살았다고 해도 타인의 삶과 죽음을 함부로 판단하고 재단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미처 전쟁의 대의와 가치를 이해하지 못한 채 먼 이역 땅에 와서 낯선 이들의 총탄에 쓰러져 이 땅에 묻힌 젊은 병사들. 그들의 무덤 앞에서 쉽사리 사상과 이념과 대의를 내세워 말하기는 어렵다. 죽음은 죽음대로 인정하고 그 앞에서 경건할 수밖에 없다.


눈부시게 파란 하늘이 가을 묘지들을 덮고 있었다.

나는 알 수 없는 서글픔 속에 공원 벤치에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삶과 죽음과 전쟁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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