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한 달 살기 10월 31일 화 아주 맑음
1. 울산 가는 길
시월의 마지막 날.
부산에 온 지 보름 만에 드디어 처음으로 부산을 넘어서 외곽 도시로 나가기로 했다.
울산.
말로만 들었던 도시, 울산에 가기로 했다.
숙소에서 가까운 광역전철이 부산 부전역에서 울산 태화강역까지 이어져 있다.
부전역까지 걸어가는 대신 교대역으로 가서 기차를 갈아타기로 했다. 조금 일찍 숙소에서 출발하여 서면역에서 교대역으로 가서 동해선 경전철로 갈아탔다. 그 기차를 타면 울산에 있는 태화강역까지 갈 수 있다. 그곳이 종점이다.
하루 코스로 울산의 어디로 가는 게 좋을지 고민한 끝에…
오늘 여행할 목적지는 울산에 있는 고래문화마을과 태화강국가정원으로 정했다.
서면에서 고래문화마을까지는 거의 두 시간이나 걸린다. 울산으로 가는 전철에서 아주 잠깐이지만, 대한민국 중화학공업단지의 면모를 기차 창문을 통해 볼 수 있다. 한국 중공업 발전의 산실이 이 지역인가라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도시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중화학공업 시설들이다. 한국의 중공업 발전이 도대체 어디에서 이뤄지는지 알고 싶다면 이곳으로 와서 보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가능하다면, 조선소나 중화학공업 시설도 돌아보고 싶다. 공장 시설을 보는 것을 관광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또한 아마 그런 여행 코스를 찾기도 어렵겠지만, 나는 제조업 강소국 대한민국의 실체를 알기 위해 그런 시설을 견학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일반인들의 여행은 거의 언제나 자연경관이나 역사문화 시설들로 국한되곤 하지만, 그 나라와 사회를 알기 위해 경제발전의 기초 시설을 보는 것도 좋은 관광거리가 되지 않을까. 그러나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서인지 그런 시설을 돌아보는 관광 코스를 본 적이 없다. 만약 울산과 포항의 공업 단지를 견학하는 여행 코스가 있다면 나는 참여하고 싶다.
경전철을 타고 가면서 바깥 풍경을 보니, 원자력발전소의 둥그런 돔 모양의 상부가 보였다. 지도를 보니, 아마도 고리 원자력발전소를 지나치는 듯했다. 돔으로 솟아오른 발전소 옆에 주거지역이 보이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아파트 단지들이 원자력발전소에 근접해 있는 것이다. 땅이 넓은 외국에서는 이런 현상을 쉽게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발전소 바로 옆에 우리 집이라니! 원자력발전소가 비교적 안전하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했을 수도 있겠지만, 좁은 국토의 불가피한 현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력을 송전하기 위한 대형 철탑들도 많이 보였다. 역시 국토가 좁은 나머지, 그런 송전탑들 근처에도 주택들이 많이 건설되었다. 또는 반대로, 주거 단지를 관통해서 송전탑들을 많이 세웠다고 해야 할지 모른다.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강력한 전기가 흐르는 시설을 생각할 때 거대한 송전탑 근처에서 사는 것은 기피하고 싶다. 잘 모르지만, 발전 및 송전 시설 근처에서 사는 것은 아무래도 위험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을 듯하다.
드디어 태화강역에서 내렸을 때부터 나는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는 기분이 들었다. 역사 앞 광장은 대단히 넓었고 많은 버스 정거장들이 있었다. 매우 맑은 날이고 광장으로 햇빛이 너무 환하게 쏟아져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나는 어디로 가서 어떤 버스를 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울산에 온 것은 처음이다. 아주 잠시 울산 시내를 도는 시티투어버스를 탈까 망설였지만 그냥 일반 버스를 타고 고래문화마을로 가기로 했다. 오후에 태화강국가정원을 돌아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므로.
태화강역 앞은 극히 한산했다. 빈 택시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버스 정류장에도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늘도 없는 광장에 햇빛만 따갑고 주변에는 길을 물어볼 사람도 없었으므로 나는 멍하니 서서 카카오맵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면서도 긴가민가 하면서 겨우 타야 할 버스를 정하고 정류장으로 갔다.
잠시 기다렸다가 버스를 타면서 운전기사에게 고래문화마을로 가는지 물었다. 그렇다는 말에, 버스를 탔을 때 다소 황당한 느낌이 들었다. 대형 버스에 승객이라곤 나와 다른 남성 둘 뿐이었다. 그 승객마저 버스에서 금세 내렸으며, 이후 고래마을에 이를 때까지 승객이라곤 나밖에 없었다. 그곳으로 가는 도로변에도 사람을 보기가 어려웠다. 울산이 명색이 광역도시라고 하는데, 어쩐 일인지 거리에는 행인이 거의 보이지 않아서 의아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시내 중심가에서 떨어진 곳이었다! 그렇다 해도 그렇지, 한국의 대도시에서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거리에서 사람을 보기가 힘들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이날 태화강국가정원으로 가기에 앞서 시내 중심가에서 식사를 하고 버스를 갈아탔는데, 그곳에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렇게 승객이 없어도 버스가 잘 운영될 수 있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생각해 보라, 아무리 화요일 대낮이라고 해도 버스가 한 코스를 주행하는 동안 승객이 몇 명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버스를 계속 굴릴 수 있겠는가.
울산같이 큰 도시에서도 이렇게 대중교통수단을 운영하기가 어려운데,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나중에 어떻게 될까. 자동차가 없는 사람들, 또 자동차를 운전할 수 없는 사람들은 모두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하는데 버스나 기차 등을 운영하기에는 승객이 너무 적다. 주민이 사라지는 지방도시와 시골에서 버스나 기차 등을 운영하는 일은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경제가 고도로 발전함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교통수단에 있어서 시골과 지방도시의 미래는 참으로 암담하다.
2. 귀신고래
버스 기사는 친절하게 나를 고래문화마을 입구에서 내려주었다.
거기서도 나는 놀랐다. 관람객이 너무 없었기 때문이다. 주중 낮이긴 해도 울산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인데 너무 사람이 없었다. 한 시간 반 정도 고래 마을을 도는 동안 내가 본 관람객은 겨우 스무 명 남짓이었을 것이다.
고래문화마을 입구로 들어가면 곧바로 추억의 마을 입구가 있다. 다른 곳에서도 가끔 보았던 레트로 감성을 자극하는 시설들이 전시되어 있다. 70년대와 80년대의 상점과 주택들. 옛날 교실과 책상과 걸상들, 그리고 이 지역의 특성인 고래 관련 시설이 있었다. 막상 국민학교 교실과 책상과 의자를 보니까 갑자기 마음이 뭉클해졌다.
저렇게 작은 의자에 어린 내가 앉았었구나...
그런 추억 가운데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와 교실과 운동장의 모습들도 떠올랐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사라진 시간, 다시는 볼 수 없는 친구들…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살고 있을까.
이곳에 장생포국민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장생포국민학교 졸업자 가장 유명한 사람은 가요 ‘아파트’를 부른 가수 윤수일인 모양이다. 교실 한쪽에 익숙해 보이는 사진이 많다 했더니 온통 윤수일 사진들이었다.
울산 장생포는 원래 고래잡이로 유명한 곳이다.
고래가 멸살될 위기에 처하면서 한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고래를 잡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과거에 장생포에는 고래가 자주 출현했고 포경선이 나가서 가장 거대한 포유류 동물인 고래를 남획했다. 장생포 앞바다에서는 길이가 15미터에 이르는 귀신고래가 자주 나왔다고 한다. 이 고래는 북태평양 연안에서 오로지 미국의 캘리포니아주와 한국에서만 발견된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실제 모델이었던 고고학자 재프먼 앤드류스(1884~1960)는 1912년에 울산으로 와서 거의 1년간 체류하면서 귀신고래를 연구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1914년에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그 논문은 귀신고래가 한국계와 캘리포니아계만 존재한다고 밝히고, 울산 앞바다에 있는 귀신고래가 한국계임을 분명히 했다.
‘귀신’고래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괴기스럽거나 초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이 고래가 화가 나면 매우 난폭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포경선이 특히 아기 고래를 공격하는 것을 어미 고래가 알았을 때 귀신고래는 매우 사나워진다고 한다. 이것은 대부분의 포유류 동물에게 매우 당연한 현상이므로 고래 입장에서는 부당하게 느낄 만한 이름이다. 미국에서는 이 고래의 색깔이 회색이라서 이름도 단순히 회색고래(Gray Whale)이다.
동북태평양을 오가는 귀신고래와 서북태평양을 오가는 고래는 서로 만나는 일이 전혀 없다고 한다. 자신들의 활동반경을 잘 기억하기 때문이다. 대서양에도 귀신고래가 있었지만 멸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추억의 마을에서 나온 나는 언덕 위에 있는 ‘웨일스 판타지움(Whales Fantasium)’으로 올라갔다. 추억의 마을 (입장료 2000원) 티켓을 가지고 웨일스 판타지움으로 가면 추가로 돈을 내지 않고 들어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 판타지움의 입장료는 2000원.
판타지움은 귀신고래를 디지털로 멋있게 형상화해놓은 것이다. 어두운 상영관으로 들어가자, 반원 모양의 벽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화면이 보였다. 매우 아름다운 영상을 배경으로 귀신고래가 오가고 고래 (울음) 소리가 들렸다. 이런 형식의 디지털 영상이 새롭지는 않았지만, 막상 내 눈앞에서 다시 보니까 대단한 디지털 화면과 기술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고래조각공원도 매우 크게 만들어졌다. 거대한 크기로 각종 고래 모습의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다. 빠르게 그 조각들을 돌아본 나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고래박물관을 건너뛴 채 곧바로 태화강국가정원으로 가기로 했다. 그곳으로 가는 데만도 한 시간이나 걸린다. 아침에 빵을 먹고 나온 나는 그때에야 비로소 울산 시내 중심가에서 김치우동 한 그릇을 먹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