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한 달 살기 (56)
요즘 낯선 곳으로 가서 ‘한 달 살기’가 유행이다. 자기에게 익숙한 집을 떠나 낯선 장소, 낯선 숙소로 가서, 지금까지의 일상과 다른 생활을 즐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은 과거의 여행 패턴과는 매우 다르다.
1. 워케이션
과거에는 이렇게 오랫동안 여행을 한다는 개념이 거의 없었다. 장기여행이 완전히 없다라기보다 매우 드물었고, 일반인들은 그런 생각조차 하기 어려웠다. 여행이란, 일하는 사람에게는 시간적 여유가 주어지는 휴가 때나 가능한 것이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장기여행을 할 일이 없었다. 그런 여행 개념이 없었으니까.
요즘은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과거에 보통 휴가는 길어야 1주일이었다. 여행은 한 주를 채우기도 어려웠다. 물론 매우 드물게 나그네처럼 장기간 여행을 다니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지만, 여행이란 으레 어딘가를 ‘다녀오는’ 것으로 이해됐다. 어딘가로 가서 장기간 숙박하는 것은 출장 가서 일하는 것이 아닌 한 이뤄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방금 했던 말에 장기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모티브가 들어 있다.
먼 곳에 가서도 일하면 된다는 것.
먼 곳으로 여행 가서 일하면 일석이조가 된다.
요즘은 그런 것을 워케이션(Work + Vacation)이라고 한다.
워케이션 개념이 등장한 것은 주로 코로나19가 발생한 이후부터다. 불가피하게 재택근무가 늘어나면서 드디어 멀리 가서도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그런 업무를 가능하게 해주는 인터넷을 통한 업무는 급속히 늘어났다.
정규직에 비해 프리랜서가 급증한 것도 한 원인이다. 인터넷 혁명과 함께 산업구조가 빠르게 바뀐 결과 프리랜서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멀리 여행을 가서도 일할 수 있는 직종과 프리랜서 등이 늘어나면서 한 달 살기 또는 한 계절 살기, 심지어 한두 해 살기도 가능해졌다.
2. 워라밸
그러면서 나온 신조어가 ‘워라밸’이다.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은 일과 삶의 균형을 말한다. 일만 하면서 인생을 ‘낭비’ 하지 말고 삶을 즐기면서 살자는 인생관 또는 가치관을 담고 있다. 워라밸 개념은 소위 MZ세대를 중심으로 급속히 전파되었다. 일만 하다가 한평생 보내기에는 인생이 아깝고 불쌍하며, 자기만족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들에게는 부모세대처럼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살아야겠다는 의식이 부족하다.
그들의 관점에서 ‘가족’은 가장 중요한 사회적 공동체이기는 하지만, 자기를 희생해서 구성하고 가꿔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자기만족과 개인의 행복을 가장 중요한 인생의 목표라고 생각하면서 ‘가족을 위한 희생’은 더 이상 사회적 의무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가족을 위한 희생은 중요하고 가치 있는 덕성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가족보다는 개인이 훨씬 더 중요한 가치를 가지게 된다.
3. 가족제도의 점진적 해체
바로 여기에 전통적 가족제도의 해체와 붕괴의 발단이 있다. 주로 젊은 세대 사이에 이런 의식은 전염병처럼 확산되며 ‘가족 형성 기피증’이 알게 모르게 주입된다. 그러면서 결혼은 점차 줄어들고, 결과적으로 출산도 사라진다. 저소득층 젊은이들은 n포 세대가 되었다.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났다.
이러한 배경에는 사교육의 배반과 부동산 가격 폭등이라는 불미스러운 사회경제적 현상도 크게 한몫을 했다. 한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에서 독특하게 발전한 사교육은 과거 한때는 계층상승을 유도하는 경제적 사다리가 되었으나, 점차 과열되어 지난 수십 년간 가족의 경제적 안정을 파괴하는 주범으로 대두되었다. 웬만한 소득으로는 사교육비를 감당하기가 어려워졌다.
게다가 사교육의 광범위한 확산으로 투입의 효용성이 급감했다. 거의 모든 학생이 사교육을 받게 되면서 사교육을 통한 성적 상승과 명문대 입학은 점점 어려워졌다. 사교육의 효용성이 높고 명성을 떨친 것은 과거에 사교육 참여 학생이 상대적으로 적었을 때의 일이다.
한국에서 부동산 가격 상승은 기본적으로 좁은 국토에서 부의 축적이 증가하면서 ‘투자’와 ‘투기’가 확산된 데에 기초하고 있다. 투기가 늘어난 데에는 정부 정책의 비효율성과 기득권층의 탐욕이 큰 영향을 끼쳤다. ‘필요’ 생활비 외에 잉여 소득은 저축과 투자금으로 투입되는데, 투자의 효용성은 증권보다 부동산에서 더욱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정부대로 경제성장을 건설 부문에 의지하면서, 부동산 경기는 저절로 활황을 겪었다. 부동산 투기를 위해 정부와 건설기업들과 언론과 지식인들이 함께 손을 잡은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잉여소득의 막대한 부분이 부동산으로 투입되고 부동산 ‘광풍’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 전체적 투기의 결과는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나타났고, 결혼을 앞둔 젊은 세대는 부모의 과도하고 불법적인 소득이전이 없이는, 즉 금수저가 아니라면, 집을 장만하기가 어려워졌다. 2030 세대 가운데 자기 노동소득만으로 돈을 모아서 집을 산다는 것은 이제 지극히 어려운 일이 되었다.
정부가 경제적 문화적 혜택을 서울에 집중한 것도 매우 큰 악재였다. 서울과 수도권에만 기업들이 집중되고 일자리가 생기면서 지방의 젊은 세대는 서울로 집중하게 되었다. 그것은 서울 부동산 가격상승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럼으로써 값비싼 사교육의 효용성 급락과 집값 폭등은 결혼을 저해하는 중대한 장애물이 되었다. 이미 워라밸이 중요해지는 젊은 세대에게 이러한 사회적 혼란은 ‘가족’을 더욱 멀리 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상은 젊은 세대의 비혼과 출산 기피의 배경을 간단히 살펴본 것이다.
젊은 세대에게 가족 형성과 발전을 위한 ‘희생’이 사라지게 되면 개인적으로 발생하는 ‘잉여소득’은 여행 및 자기 계발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된다. 오늘날 젊은 세대는 이미 한국경제가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한 상황에서 부모로부터 알게 모르게 받는 소득이전도 많은 편이다. 그러면서 워라밸은 더욱 선순환 성장하게 된다.
4. 부의 증가에 따른 한 달 살기의 확산
다시 말해서 한 달 살기가 급속히 늘어나게 된 배경에는 무엇보다 경제적 여유가 있다. 한국인들에게 장기여행이 늘어나게 된 것은 부의 증가에 기초하고 있다. 그렇게 긴 여행을 하면서도 살 수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부의 축적에서 비롯된다.
기본적으로 여행은 돈을 많이 쓸 수밖에 없다. 여행하는 경비도 많이 들지만, 자기가 살던 숙소를 오랫동안 비워놓는 데 드는 경비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행을 떠난 동안에도 자신이 원래 살던 집은 여전히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 여행을 떠난 후에 기존 생활비에서 줄어드는 것이라곤 주로 식비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행을 한다고 해서 집에 들어가는 모기지나 월세 등이 나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여행을 하는 동안에도 주거비는 불가피하게 지출된다. 이미 집값을 모두 지불한 사람도 최소한 보유세라도 내야 한다.
사실, 돈을 가장 쉽게 낭비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여행이다. 돈에 관한 한, 여행은 그 자체로서는 돈의 낭비일 뿐이다. 원래는 지출하지 않아도 되는 교통비와 숙박비와 식비 등이 대표적이다. 그밖에 관광명소 입장료, 여행용품과 준비물 비용, 여행 가서 흔히 하게 되는 쇼핑 비용 등도 무시할 수 없다. 아주 드물게는 여행 갔다가 아파서 큰 곤욕을 치르고 진료비와 의약품과 병원 비용을 지불할 때도 있다.
5. 해외여행 증가
한동안 제주도 여행이 붐을 이루더니, 해외여행은 더욱 크게 증가했다. 한국이 선진국으로 진입하고 한국인들의 소득이 높아진 결과이다. 국토가 좁아서 해외여행이 늘어났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소득증가와 부의 축적이 없이 해외여행이 증가하기는 어렵다.
해외여행이 과도하게 늘다 보니, 일본과 동남아 국가들에 가면 한국인이 너무 많다는 불평이 나올 정도다. 그것은 조금 어색하고 난감한 일이기는 하다. 해외여행 증가는 기본적으로 국가적 부의 유출이므로 반갑게만 볼 수는 없는 일이다.
6. 귀농귀촌 의식 증가
대도시에 살면서 농어산촌 생활에 대한 동경이 늘어난 것도 한 달 살기 증가에 한몫하고 있다. 특히 조기 은퇴자들이 늘어나면서 귀농귀촌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복잡한 도시의 기업 노동자로서 살기보다 농촌으로 가서 조금 더 여유롭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느끼면서 살고 싶은 젊은이들도 덩달아 늘어났다. 그들에게 지방에서 한 달 살기는 농어산촌 살이를 미리 체험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요즘은 귀농귀촌을 유도하기 위해 노력하는 지자체도 많다. 적은 비용으로 또는 심지어 무료로 한 달 살기 숙소를 제공하고, 자기 지역에서의 생활 경험 프로그램을 제공하기도 한다. 지자체가 더욱 지혜롭게 노력한다면 귀농귀촌인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한 달 또는 일 년 살기 프로젝트를 제공하는 지자체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한 달 살기 대유행 시대다.
장기여행을 떠나는 것은 새로운 일상이자 중독으로 변하고 있다.
여행을 통해서 단조롭고 익숙한 일상에서 얻지 못하는 다른 삶의 가치를 얻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낯선 곳에서의 삶을 통해 삶의 긍정적 가치가 확대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나름대로 선순환 성장과정을 거치기도 한다. 장기여행 후에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와도 여행 전에 비해 긍정적이고 활력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나로서는 부산에서 한 달 살기를 해본 결과, 한 달 살기의 긍정적 효과를 더욱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친구들에게도 기회가 되면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한 달 살기는 간단하게 표현하기 어려운 긍정적인 효과와 매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