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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쌍화차 최고!

고창-정읍 여행기 (8)

by memory 최호인

1. 정읍 쌍화차, 정말 맛있다. 믿어도 돼.


어디서 얻은 정보인지 모르지만, 정읍에서는 생갈비매운탕을 먹어야 한다면서 혁국과 재관은 정읍 시청 부근에 있는 식당을 찾아갔다. 우리는 어느 큰 식당으로 들어갔는데, 나는 선택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친구들이 먹자고 하는 생갈비매운탕을 먹게 되었다. 매운탕에는 다행히 커다란 만두도 들어있어서 먹을 만했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종업원들은 부스터를 가지고 와서 식탁 위에 불을 지폈고, 그 위에 생갈비매운탕을 올려놓았다. 주방에서 이미 끓여놓은 음식을 식탁에서 재차 데우는 수준이다.


식당에서 배부르게 먹고 나왔는데, 정읍에서 또 유명한 게 쌍화차 거리라면서 우리는 그곳으로 걸어갔다. 말 그대로 '쌍화차 거리'였다. 나는 좁은 거리에 쌍화자 카페가 그렇게 많은 것을 처음 보았다. 정말로 쌍화차 카페가 줄지어 모여 있었다.


더욱 반가운 것은, 그 카페에서 쌍화차를 마시면 구운 가래떡도 함께 나온다는 것이다.

차를 마시는데 가래떡을 준다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아 얼마 만에 먹는 가래떡인가!


우리는 그 거리를 천천히 걸으면서 어느 쌍화차 카페로 들어갈까 두리번거렸다. 모두 비슷한 카페 같아서 선뜩 정하지 못하고 어슬렁거리다가, 나는 그중 괜찮아 보이는 카페를 보고 들어가자고 했다. 비교적 구석진 곳에 있어서 그런지 손님이 많지 않은 가게였다. 우리는 앉자마자 모두 쌍화차를 주문했다. 쌍화차 가격이 무려 9천 원이나 되어서 나는 처음에는 무척 비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우리 앞에 나온 차를 보니, 서울이라면 1만 원을 훌쩍 넘을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훌륭했다.


정읍 쌍화차는 각종 한방약에 사용될 만한 내용물이 많아서 마시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쌍화차는 매우 뜨거운 도자기 그릇에 나왔다. 그릇을 들고 입을 대고 차를 마시려고 해도 도자기가 너무 뜨거워서 입술을 댈 수 없었다. 차를 마시거나 내용물을 먹기 위해서는 오로지 숟가락을 사용해야 했다.


차와 함께 나온 흰 가래떡은 금상첨화였다. 구운 가래떡은 하얀 자태를 뽐내며 가지런히 누워 있었고, 그 옆에는 조청이 따라 나왔다. 조청에 가래떡을 찍어 먹는 것은 오랜만에 느끼는 즐거움이었다. 이 쌍화차 세트는 그야말로 한 끼 식사와 다름없었다.


이렇게 고급스러운 쌍화차를 생갈비매운탕을 잔뜩 먹고 나서 마시게 되었으니… 조금 아깝기는 했다. 다음에 정읍에 다시 올 기회가 있으면 배가 고플 때 맨 먼저 쌍화차 거리를 찾아서 가래떡과 함께 먹고 싶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 한 끼 음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읍은 거리도 예쁘지만 그 쌍화차 때문에라도 다음에 꼭 다시 오고 싶은 곳이다.



2. 김명관 고택


쌍화차를 마신 후에 우리는 어딘가 가지런해 보이고 산뜻한 느낌을 주었던 정읍 시내에서 벗어났다.

다음 행선지는 정읍 김명관 고택.


김명관 고택 전경


김명관 고택은 조선 후기에 건축된 소위 99칸으로 지어진 고택인데 현재는 80여 칸이 남아 있다. 행랑채, 사랑채, 안행랑채, 안채, 별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971년에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전체적으로 소박한 모습이지만 조선 후기 사대부 가옥의 중후한 모습이 원형 그대로 간직되어 있다고 한다. 마을 뒤에는 해발 150미터의 청하산이 있고, 앞에는 동진강 상류가 흐르고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이다. 이 주택은 1790년대에 지어졌다고 한다.


고택 앞에 있는 안내판에는 김명관(1755~1822)이 조선 정조 8년(1784)에 지은 집이라고 적혀 있다. 김명관이란 분은 17세에 이 집을 짓기 시작하여 10년 만에 완공했다고 한다. 그렇게 기록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겨우 17세에 무슨 권세가 있어서 이렇게 넓은 땅에 이렇게 큰 집을 지었을까. 타고난 금수저였을까. 그렇다 해도, 소년 김명관이 이렇게 큰 집을 지을 때 그의 부친이나 삼촌이나 집안의 어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이 집의 구조에 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고 그런 건축 문제에 관해 쓰고 싶지도 않다. 김명관이라는 분에 대해서도 관심이 가지 않는다. 어린 나이에 굳이 이렇게 큰 집을 짓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당대에 그에게는 오직 집을 크게 짓는 것이 '성공'을 가늠하는 잣대였을까. 그에게 집에 관한 어떤 사명감이 있어서 그리했는지 알 수 없다.

나는 그저 내 눈앞에 있는 오래된 건물을 바라보고 그 안에 살았던 사람들의 냄새를 맡아본다. 그 넓은 집안에서 누군가는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뛰어다녔을 것이고, 누군가는 부엌에서 마당을 거쳐 마루와 어떤 방으로 부지런히 음식을 날랐을 것이며, 누군가는 넓은 마당을 쓸거나 소에게 풀을 베어다 주면서 살았을 것이다. 누군가는 시집을 오고 시집을 가고, 또 아이를 낳고 초상을 치르고, 아이는 자라면서 넓은 집 안에서 뛰어다녔을 것이며, 그 집에서 혼인을 했을 것이다. 나는 그 오래 전의 사람들과 시간들을 떠올린다.


집안의 오래된 기둥을 보면서 이런저런 옛날 일들도 떠올려본다. 너무 오랫동안 만져서 매끈해진 기둥과 마루를 보면서, 지나간 시간 동안 거기에 앉아서 거기에 서서 거기에 누워서 대화를 하고 환하게 웃고 때로는 눈물을 훔치고 밝거나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던 그 누군가를 생각해 본다.


그들도 나처럼 울고 웃고 먹을 것을 찾고 꽃 피는 봄과 낙엽 지는 가을에 눈시울을 붉혔을까. 눈 내리는 겨울밤에 추워서 손을 비비면서 몸을 떨었을까. 한여름 뜨거운 햇빛을 피할 곳을 찾아 시냇물로 몸을 적셨을까. 한없이 피어나는 꿈, 그러나 이루지 못한 욕망, 이룰 수 없는 희망, 그리고 이별과 만남이 끝없이 이루어졌을까.


사람이 사는 일이라, 어디 큰 차이가 있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사는 일은 모두 만만치 않고 복잡하다.


그래도 그때 살았던 사람들보다 조금이라도 내가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모르겠다.

하여간 아무도 살지 않는 이 오래되고 넓고 텅 빈 집을 보면서 나는 어딘가 허전하고 애처로움을 느낀다.


김명관 고택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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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만석보


우리가 근처 도로를 지나가면서 들르지 않고 말만 한 여행지가 있다.

만석보.


전라도 고부군의 악명 높은 탐관오리인 조병갑이 1892년에 동진강을 막는 보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소위 ‘만석보’를 건축하기 위해 세금을 거두고 농민들을 징발했다. 그러자 1894년 농민들은 조병갑의 횡포에 분개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이것이 1894년 동학농민혁명 또는 갑오농민전쟁의 시초가 되었다. 여기서부터 당대 동북아시아를 뒤흔드는 대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만석보는 공사 2년 만에 농민들에 의해 헐렸다.

현재는 물도 없는 만석보 터에 동학농민혁명을 기리기 위해 1973년 건립된 만석보 유지비만 남아 있다.

만석보유지비 - 정읍시청 문화유적 사이트에서 인용.jpg 만석보유지비. (정읍시청 문화유적 사이트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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