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리랑문학마을과 삼례 비비정

고창-정읍 여행기 (9)

by memory 최호인

1. 정읍근대역사관


정읍근대역사관은 2층 짜리 작은 박물관이다.

일제강점기에 쌀 창고로 건축된 다섯 동 가운데 한 동만 남아서 그것을 역사관으로 개축했다. 이 건물이 처음에 언제 지어졌는지는 불확실하다. 1947년에 이 거대한 창고는 화호중앙병원으로 사용되었고, 1961년 병원이 문을 닫았을 때 짧은 기간이나마 화호여자고등학교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후 2021년에 리모델링을 거쳐 역사관으로 변했다.


일제강점기에 이곳에 쌀 창고가 있었던 것은 이 지역이 조선의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였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집적된 쌀은 대부분 곧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화호리’는 호남평야의 중심부이며 당대 농촌 수탈이 아픔이 남아 있는 곳이다. 당시에 구마모토 리헤이, 다우에 타로 등 일본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대규모로 조선인들의 농지를 빼앗았다. 이로써 조선의 자작농은 빠르게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은 군산을 통해 일본으로 이송됐다.


아주 도시스럽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주 촌스럽지도 않은 중년남성 네 명이 거의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정읍근대역사관의 문을 불쑥 열고 들어섰을 때, 역사관을 지키고 앉아 있던 안내 겸 역사 해설사는 다소 불안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침착하고 참하게 보이는 중년여성인 해설사는 처음에는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눈치만 살피더니, 불한당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우리에게 다가와서 정읍근대역사관에 관한 해설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녀는 친절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일제강점기에 화호리가 어떻게 변천했는지, 역사관 내에는 무엇이 있고, 역사관 주변에는 무엇이 있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그녀의 해설을 더 듣고 싶어도 역사관이 크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그 안에 오래 있을 수도 없었다. 우리는 해설사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그녀를 빈 건물에 혼자 둔 채 인사하고 역사관을 나왔다. 이어서 역사관 뒤에 있는, 과거 쌀 창고 관리인의 사택을 돌아보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우리 이외에는 역사관을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 듯했다.




2. 소설 '아리랑'과 아리랑문학마을


소설 ‘아리랑’은 조정래의 대하소설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이다.

이 소설은 1990년 한국일보에서 연재되기 시작한 후 1994년 12권짜리 전집으로 출판되었다. 나는 이 소설을 읽지 않았지만, 이 소설이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에 이르기까지 김제 등을 배경으로 일본의 수탈과 우민화 교육 등을 그린 작품이라는 것만 들었다.


‘아리랑 문학마을’은 그 소설을 기념하여 김제 벽골제 부근에 만들어졌으며, 소설의 배경을 재현해 놓았다. 거기에는 일제강점기에 실재했던 주재소, 면사무소, 우체국, 정미소 등 가옥을 설치해 놓았으며, 소설의 주인공들이 살았던 가옥들도 옛날 모습으로 복원해 놓았다. 넓은 지상 공간에 매우 현실적으로 재현해 놓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제강점기 역사를 전시한 박물관과 같은 '일제수탈관'은 2층으로 구성된 상설 전시공간이며, 일제의 수탈과 만행을 전시하고 있다. 수탈관의 2층에는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을 소개하는 전시공간도 있다.



이 마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축물은 하얼빈 역사다. 1910년경 실존했던 하얼빈역 건물을 실물의 60% 정도로 축소하여 복원했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래서 다시 100%로 되돌려서 실존했던 하얼빈 역사를 보게 된다면, 당시로서는 대단한 건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 다른 건물들이 없어서 그런지 건물은 매우 크고 인상적인 모습으로 보였다.


이곳은 안중근 의사가 1909년 조선 통감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장소를 재현하여 독립운동의 위세를 알리고자 한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자못 거대해 보이는 하얼빈 역사는 2층으로 구성된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어서, 안중근 의사의 위상을 살펴볼 수 있다.


아리랑 문학마을은 단순히 박물관이나 역사관 건물 하나만 달랑 지어 놓은 곳이 아니다. 이렇게 큰 규모로 설치한 역사와 문학 전시관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 정도로 이곳은 꽤 정성스럽게 꾸며졌다. 이렇게 많은 건축물을 만들고 전시한다는 것은 비용도 많이 들고 관리도 쉽지 않을 텐데…


아무튼 소설가 조정래와 독립 의사 안중근을 함께 기린다는 측면에서 매우 인상적인 일이다.





3. 일몰의 절경, 삼례 비비정


이제 우리는 혁국이 기획한 여행의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가 꼭 일몰에 맞춰서 가야 한다는 곳이 있었다. 그는 애초에 우리의 동선과 시간까지 계산해서 움직이는 치밀함을 보였다.


완주군 삼례에 있는 비비정.


나는 그곳에 이르러 그가 왜 일몰에 맞춰 그곳으로 가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곳은 만경강과 호남평야를 배경으로 붉은 낙조를 감상할 수 있는 언덕이었다.


‘비비낙안’은 만경강 백사장에 내려앉은 기러기 떼를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고, '비비정'은 기러기떼를 보는 정자를 말한다. 풍경이 아름다운 이곳에서 옛날 선비들이 비비정에 올라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비비낙안은 19세기에 철거되었다가 1998년 100년 만에 복원되었다. (비비정 바로 아래에 있는 물이 유난히 차가워서 ‘한내’라고 불리기도 한다.)


비비정에서 내려다보면 수확을 기다리는 황금빛 들녘이 펼쳐져 있다. 대한민국에서 보기 힘들다는 지평선이 보이는 곳이다. 바로 앞에는 만경강이 조용히 흐르고 있다. 안내문에는, 만경강 위로 지나가는 구 ‘만경강철교’에 관하여 이렇게 적혀 있다.


“만경평야의 농산물을 다른 지역으로 내보내기 위하여 1912년 전북경편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익산과 전주 간 경편 절도를 개통하면서 나무로 만들어진 다리이다.” (경편철도는 통행하는 기관차와 차량의 크기가 작고 궤도의 너비도 좁은 철도를 말한다.)



주로 평야로 이뤄진 이 지형에서 오로지 비비정이 있는 이곳만 불쑥 솟아올라 있어서 주변의 풍광을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다. 비비정에서 바라보면, 구 만경강 다리에 세 량의 열차가 놓여 있어 눈길을 끈다.


우리는 기꺼이 그 열차가 있는 곳으로 가보았다. 세 개의 열차에는 각각 예술공간과 레스토랑과 카페가 있다. 카페로 꾸며진 열차에 들어가서 앉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테이블에 앉아서 뜨거운 차라도 마시면서 창문을 통해 만경강과 만경평야를 보면 좋겠다.



그러나 차마 열차 안으로 들어갈 여유는 없었으므로 나는 세 량의 열차를 지나 철로가 막힌 곳까지 가보았다. 앞으로 길게 이어진 철로 건너편에는 아주 멀리 들판 건너로 농촌과 어울리지 않는 높은 건물들이 보인다. 그곳이 전주시다. 이렇게 아름답고도 쓸쓸한 풍경이 있는 낯선 곳에서 수년 전에 방문했던 전주를 바라보는 것은 묘한 추억과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이 벌써 5년 전이다.

혁국과 성종과 상국과 함께 군산을 거쳐 전주를 방문했던 것이.

그 여행에서 군산과 전주에 관해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지금까지 남아 있어서 오늘 비비정에 서서 전주시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 뭉클했다. 아련히 보이는 전주시 고층 아파트 건물들이 석양빛에 붉게 번지고 있었다.



일몰.

어느새 서쪽 하늘에 노을이 물들고 드넓은 평야는 서서히 붉고도 쓸쓸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비비정에서 또 철로 위에서 말없이 해지는 가을 들녘을 바라보았다. 물 흐름이 멈춘 듯 고요한 만경강 위로 맑은 하늘과 구름들이 비쳤다. 가을하늘에는 제법 많은 구름들이 흩어져 있었다.


드디어 1박 2일간의 여정이 끝나는 시점에 이르러 나의 마음은 어딘가 허전했다.

문득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또 우리에게 이런 여행을 할 시간이 다시 올 수 있을까.

이렇게 아름답고도 슬픈 느낌을 주는 시간이 다시 올 수 있을까.


‘다음’이란 게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올 것 같지만, 실은 언제 올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말로는 ‘다음’을 쉽게 기약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실은 다시는 오지 않을 때도 있었음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래도… 그런데도… 우리는 또 다음을 기약한다.



keyword
이전 08화정읍 쌍화차 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