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지고 나면 비로소 잎사귀가 보인다 잎 가장자리 모양도 잎맥의 모양도 꽃보다 아름다운 시가 되어 살아온다 둥글게 길쭉하게 뾰족하게 넓적하게 내가 사귄 사람들의 서로 다른 얼굴이 나무 위에서 웃고 있다 마주나기 잎 어긋나기 잎 돌려나기 잎 무리 지어나기잎 내가 사랑한 사람들의 서로 다른 운명이 삶의 나무 위에 무성하다 - 이해인 - 잎사귀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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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가지고 겨울길을 운전하다 보면 자주 다니던 길도 사뭇 다르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무성하던 나무들의 잎이 지고 나면 말이지요. 산등성이 너머로 보이지 않던 집들도 보이고, 나무에 가려져 있던 실루엣도 새롭게 보이곤 합니다.
가까이 있는 나무들도 그렇지요. 봄날의 화려한 꽃이 가득하던 나무도 꽃이 지고 여름이 지나면 나무의 모양이 보입니다. 가지를 이리 뻗었는지, 키가 이리 작았는지 그제야 나무가 보입니다.
이해인 님도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꽃이 지고 나서야 비로소 잎사귀가 보인다 합니다. 매양 예쁜 꽃들만 바라보고 노래하고 이야기했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꽃을 받치고 있던 꽃받침도 보이고, 잎사귀도 보이고, 꽃줄기도 보인다고 말입니다.
그러게요. 우리네 삶도 그러할 건데 말이지요. 사회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이리 돋보이며 번쩍이던 사람들도, 저리 스쳐가며 휘청이던 그 모든 사람들도, 가만히 마주 앉아 이야기해보면, 화장을 지운 맨 얼굴로 이야기해보면, 어쩌면 그 또한 나처럼 눈가에 잔 주름, 마음엔 근심 하나, 몸에는 아픔 하나 간직한 다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꽃 저런 꽃 한 번씩은 다 피워봤던, 그 꽃을 잘 받치고 있던, 그런 줄기 같은, 너나 나나 잎사귀 같은 사람들이었던 게죠. 꽃 피었다 자랑할 것도 없고, 꽃 졌다고 슬퍼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피고 지고 그렇게 어울려서 초록이 되고 숲이 되는 게 우리네 삶이니까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