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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호 Feb 11. 2022

출산의 고통과 자유시간

신기했다. 출산을 준비하면서 초음파 기계가 알려주는 출산일은 정확하게 맞았다. 출산일에 가까워지면서 병원에서 지낼 짐을 꾸렸다. 그리고 정확하게 선생님이 알려준 그날에 아내는 병원에 가자고 했다. 정말 신기했다.

  

옷을 갈아입은 아내는 출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아내도 처음이었다. 옆에 계셨던 장모님만 경험하신 일이다. 우리는 긴장했지만, 장모님은 담담해하셨다. 역시 경험이 중요하다. 

  

아내의 손과 목에 전기 신호가 흐르는 선이 연결되어 있었고, 모니터로 어떤 그래프가 생겨났다. 하나는 심장 박동수 였고, 또 하나는 나도 잘 모른다. 그런데 그 그래프가 위로 가면서 아내는 아파했다. 그리고 다시 그래프가 아래로 떨어지면 괜찮아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반복은 계속 되었다. 힘들어 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출산의 고통이란 저런 것일까? 그렇게 1시간을 넘게 아내의 진통은 반복되었다. 

  

선생님이 몇 차례 오셨지만, 아직은 아니라고 하셨다. 아내는 챙겨오지 못한 짐이 있으니 집에 다녀오라고 했다. 장모님이 계셨기 때문에 걱정은 없었다. 그렇게 잠시 집에 다녀온 사이에 아내는 분만실로 들어가 있었다. 분만실 앞에서 나는 아내의 출산을 기다렸다. 그렇게 모니터로 출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곧이어 간호사 선생님은 아기의 발과 손을 확인 시켜주었다. 한번 안아보라고 하셨다. 감히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뜨거움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그렇게 아내는 출산을 했고, 우리 가족은 셋이 되었다. 


 

또다시 나는 복도에 앉아 있었고, 잠시 뒤에 아내를 만날 수 있었다. 아내는 울고 있었다. 진통을 참고 이겨내서 자연분만을 원했지만, 수술을 했다는 미안함을 말해주었다. 그런데 그건 미안함이 아니다. 어디 인생이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있으랴. 출산도 그렇다. 괜찮다, 괜찮다.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났으면 된 것이고, 엄마가 건강하면 된 것이다. 그 이상을 바라면 욕심이다. 십개월의 대장정은 그렇게 마쳐졌다. 

  

끝난게 끝난게 아니라고. 끝이 아니었다. 새로운 시작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 아내는 걷기 힘들어 했다. 회음부의 상처는 생각보다 아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연분만 만큼이나 모유수유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되면 다시 아픈 몸을 이끌고 아기들이 있는 아래층으로 가야했다. 나는 그 옆에서 아내를 부축했고, 수유를 위해 들어간 아내를 뒤로한 체 30~40분을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분만실과 수유실이 같이 있었던 병원이라서 아내를 기다리는 동안에 또다른 아기들이 탄생하는 것을 보았다. 어제의 나 같은 아빠가 또다시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모유 수유 역시 쉽지는 않아 보였다. 성하지 않은 몸에서 어찌 젖이 돌겠는가. 아기는 또한 엄마의 젖을 빤다는 것이 얼마나 어색한 일이었을까. 살기 위해 먹여야 하고, 또 살기 위해 먹어야 한다. 그래야 엄마도 아기도 행복하다. 아내가 쉴드를 사오라고 했다. 머리를 긁적이며, 그건 또 뭔가 했다. 그렇게 초보 아빠는 동분서주했다.



멍 때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뭐든 빠릿빠릿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엄마가 된 아내의 수심 가득한 표정 속에서 나 역시 아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했다. 손발도 궁합이 맞아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게 산부인과 생활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1인실이었고, 방은 정말 따뜻했다. 1월에 몹시도 추운 날이었지만, 방안에 있으면 나도 모르게 행복했다. “그래도 조금은 시원한게 좋지 않겠냐”는 선생님의 말씀 중에도 “그러면 무릎이 시린다고 하던데”라며 보일러의 온도를 낮추지 않았다. 잘 몰라도 어디선가 주워들은 이야기는 많은 초보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자연분산, 모유수유, 그리고 모자동실은 셋트처럼 따라붙는다. 그렇게 몇 일이 지나고 아기와 밤을 지내게 되었다. 아기가 울어대는 통에 어찌할 바를 몰랐고, 난생 처음 해보는 기저귀를 잘 갈아보려고 애썼던 그날의 밤이 아직도 기억난다. 우니까 안아서 달래야 했고, 그러면 손탄다고 내려 놓으라고 하고, 뭐가 정답인지 모른 체 이 방법 저 방법을 써가면서 하루를 보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틈날 때마다 빌려운 다섯권의 작명책을 뒤적이면서 첫째 아이 이름을 지었다. 이름하여, 이유정. 빛나고 맑게 자라나는 뜻에서 우리 부부는 첫째의 이름을 유정이라고 지었다. 나름 책에서 따지 방법들을 총동원해서 첫째의 이름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7일간의 병원 생활도 떠날 때가 되었다.


  

출산을 준비하면서, 많이 고민했던 것 중에 하나가 있다면 산후조리원이었다. 어차피 해야 할 신생아 육아라면 집에서 해도 된다는 나의 주장과 그래도 조리원에서 몇 일 더 있고 싶다는 아내의 주장 사이에서 우리는 산모 도우미를 선택했다. 돌이켜보면 조리원에서 몇 일이라도 더 쉬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뒤늦게 하곤 한다. 비싼 조리원 비용이 조금은 아깝다고 생각한 나의 생각이 가끔은 미련하기도 하다. 돈을 써야할 때에 써야 한다. 아낀다고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돌이켜 보면, 그때가 내 인생의 마지막 휴가 기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병원에서 1주일, 산모 도우미의 2주일, 그렇게 이제는 우리 부부가 지지고 볶으면서 해내야 했다. 장모님의 정성스러운 도움을 받으면서 말이다. 정말이지 장모님 없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싶다. 초보에게 낯선 삶이란 힘든 배움의 과정이다. 그렇게 부모가 되기 시작했다.

  

둘째가 태어나고 우리는 생각의 의심없이 산후조리원을 택했다. 나는 근속휴가를 내서 4살이 된 첫째와 삼시새끼를 하면서 보냈다. 출산의 고통을 다시 느낀 아내가 미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산후조리원에서 혼자 있는 모습은 너무나 부러웠다. 아~ 내 인생의 자유시간은 언제 오는가! 안오니까 기다리지 말자. 아이가 다 크면 그때는 오겠지. 그렇게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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