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학호 Feb 11. 2022

출산과 육아라는 나만의 경험

길에서 유모차를 밀고 가는 엄마가 눈에 들어온 것은 아빠가 되고 나서다. 그 이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경험한 사람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경험을 공유하는 데에서 차이가 있다. 나의 경험과 너의 경험이 공유될 때에야 비로서 우리는 동질감을 느낄 수 있다. 


해외 여행이 경험을 공유하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사례다. 우리는 셀 수도 없을만큼 여행을 하지만, 해외 여행이 조금 독특한 이유다. 예를 들어, 내가 프랑스 여행을 했다고 하자. 나 말고도 이 여행을 한 사람은 많다. 그런데 대부분은 프랑스의 비슷한 여행지를 돌아다닌다. 그래서 프랑스 여행을 떠올리면, 대부분은 비슷한 추억을 떠올린다. 유난히 해외 여행을 이야기하면서 서로 공유하는 지점이 많은 이유다. 같은 경험 때문이다.

  그래서 출산과 육아는 또하나의 경험이다. 결혼도 그렇다. 비혼이 많아지는 현실에서 결혼을 하는 것이 좋으냐? 나쁘냐?의 문제보다는 이 경험을 내 삶에 새롭게 추가할 것이냐? 마느냐?의 문제라고 나는 생각하다. 마찬가지로 아이를 낳을 것인지? 말 것인지?의 문제도 그렇다. 요즘에는 애완견을 키우는 가정이 많다. 개인적으로 나는 애완견을 키우고 싶은 생각은 거의 없다. 아이들이 키우고 싶다면 울며 겨자 먹기로 키우기는 하겠지만, 내 안에 애완견을 키우고 싶다는 동기는 없다. 그러니까 애완견을 키우는 것도 각자가 선택하는 하나의 경험이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온종일 아이의 생활을 바라보아야 했고, 먹여야 했고, 먹고 싼 똥을 치워야 했으며, 씻겨야 했고, 재워야 했다. 정말이지 육아는 나를 내세우면 안되는 일상이었다. 오직 아이에게 맞춰져야 하는 온전함이 필요했다. 그 사이에 가끔씩 방긋하는 아이의 웃음에 힘겨움들이 날라가곤 했지만, 또다시 육아하는 힘겨움은 찾아왔다. 이런 반복이 이어졌다.

  

아이가 걷기 시작했고, 그때가 되면 조금은 편안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착각이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를 졸졸 따라가기 바빴다. 누워있을 때가 좋은 때이고, 배 속에 있을 때가 가장 편하다는 선배들의 이야기가 괜히 나온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아이는 자랐다. 

  

어느 덧, 싱싱카를 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잡아달라고 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스스로 하겠다며 손잡이를 잡지 말라고 뿌리친다. 그때부터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녀석이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부딪혀서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단 한순간도 쉬운 적이 없었다. 그것이 육아의 현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육아라는 경험이 좋다. 육아라는 경험은 상대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아이의 존재가 없는 육아는 거짓이다. 엄마의 위대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나보다 두가지 경험을 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출산과 모유수유에 대한 경험. 내가 마음만 먹으면 세상의 모든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불가능한 두가지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엄마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경험이다. 그래서 아무리 내가 육아에 열심이어도 공유할 수 없는 두가지 경험을 가진 엄마의 위대함을 느낀다. 아내를 위대하게 생각하는 이유다.

  

길에서 유모차를 밀고 가는 엄마가 내 눈에 들어온 이유도 결국에는 경험에서 시작한다. 나도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한 손에는 아이 손을 잡고, 또 한 손에는 유모차를 밀고 가는 엄마도 눈에 보인다. 그 모습이 더 짠해 보이는 이유는 그만큼 엄마의 일상이 녹록치 않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엄마 말을 잘 따르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생기지만, 길거리에서 혼을 내는 엄마와 혼줄을 맞아야 하는 아이를 보고 있자면 내 마음도 편하지는 않는다. 나 역시 그랬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인생이 마음 먹은대로 다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내 뜻대로 잘 안되는 대표적인 것이 육아였다. 누군가에게는 임신일수도 있다. 또 누군가에게는 결혼일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연애일 수도 있다. 공부하고, 취업하고, 돈을 벌고, 그런 것은 나 혼자 열심히 해보면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과 좋은 인연이 되고, 그 이후의 모든 경험들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어렵게 시작한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의 결말이 시작할 때에 마음먹은 것처럼 아름답게 마무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내게는 있다. 


  

육아의 행복은 딱 3시간이라는 우스게 이야기가 있다. 아이가 없는 삼촌이나 이모도 조카와 노는 시간이 3시간이 넘어가면 지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재미없어서 스마트 폰을 만지작 거리게 되고, 말을 듣지 않는 조카와 사소한 말다툼 끝에 짜증이 밀려오게 된다는 것이다. 하물며 같은 사람인데 아빠인 나 역시 다르지 않다. 그런데 내 아이를 키우는 시간은 고작 3시간이 될 수 없다. 3일도, 3년도 아니다. 아이를 키워보니까 초등학교 2학년인 첫째쯤 되니까 조금씩 손을 놓을 수 있음을 느낀다. 정말로 긴 시간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직도 멀었다고 말할 선배 부모가 있을 듯하다. 그만큼 긴 시간이라는 뜻이다.

  

시작이 있었으면 결말도 있을 것이다. 그 결말이 어떤 모습일지 모른다. 나는 지금 그 과정 중에 있을 뿐이다. 좋은 결말을 만났으면 좋겠다. 아이와 보낸 시간들이 행복한 추억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좋은 아빠이고 싶다.

이전 01화 삶으로서의 육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