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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호 Feb 11. 2022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잘 키울 수 있을까?

  

둘째 출산을 앞두고 우리 가족은 태교 여행으로 한국에서 가까운 오키나와로 갔다. 태교 여행은 첫째를 키우면서 지친 육아의 피로를 달래는 의미가 더 컸다. 솔직히 아이를 데리고 떠나는 해외여행은 그 자체로 힘들다. 일반적으로 아이들과 떠나는 여행지는 수영장이 딸린 휴양지여서 가지고 가야 할 짐이 많다. 이번 여행도 그랬다. 트렁크 두 개를 가득 채워서 양 손으로 밀었고, 유모차 까지 가지고 출발했다. 그렇게 우리는 오키나와에 도착했다. 

  

다행히도 입맛이 한국과 맞아서 좋은 여행지였다. 우리는 렌트카를 빌려서 신나게 놀았다. 그리고 중북부에 위치한 문비치라는 호텔에서 머물렀다. 문비치 호텔은 프라이빗 비치가 있는 호텔이어서 아이와 함께하는 가족들에게 매력적이었다. 레스토랑은 애메랄드 빛의 바다가 보이는 곳에 있었다. 식사를 하지 않아도 배가 부를 정도였다. 아침을 먹자마자 우리는 바닷가로 향했다. 

  

때는 3월 초라서 여행객은 거의 없었다. 한국도 일본도 신학기가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바닷가에는 우리 가족만 있었다. 그때, 첫돌이 된 것처럼 보이는 유아와 엄마, 그리고 엄마 보다는 나이가 조금 많으면서도 엄마와 얼굴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이모로 보이는 세 명이 바닷가로 왔고, 우리 옆에서 자리를 잡고 놀았다.

  

유아인 아이에게는 모래가 재미있는 놀이감이었는지, 만지작 만지작 하면서 연신 웃음을 지었다. 엄마와 이모는 그 모습을 보면서 참 좋아했다. 내가 봐도 행복해 보였다. 나도 그 모습을 보면서 웃음을 지었다.

  

그때였다. 엄마가 잠시 호텔로 들어간 사이였다. 아이는 여전히 모래 놀이를 했고, 중간 중간 그것을 입에 가져가려고 했다. 이모는 그 모습도 귀여워 보였는지 너무나 좋아하면서 무슨 말을 했다. 일본말이니 내가 알아 들을리 없다. 아마도 “이 귀엽다 아이 귀엽다” 뭐 이런 말이 아니었을까. 정말 그 모습이 천사처럼 아름답고 귀여웠다.

  

그 모습을 본 엄마는 달려왔고, 모래를 입으로 가져가는 손을 뿌리쳤다. 단호했지만, 무섭게 대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무슨 말을 했다. 당연히 내가 알아 들을리 없다. 아마도 “지지지지, 안돼” 뭐 이런 말이 아니었을까. 

  

그때 나는 알았다. 엄마와 엄마가 아닌 사람은 다른 것임을.      

  

돌이켜보니 나도 그 엄마처럼 아이를 대했던 것 같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첫째를 키웠던 것 같다. 아이는 구강으로 사물은 인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도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왕이면 모래 놀이터에서 노는 것을 꺼려했고, 조금이라도 깨끗한 곳에서 놀기를 바랬다. 음식을 먹다가 흘리면 내 마음에 지저분함이라는 단어가 나를 감싸면서 닦기 바빴고, 물을 먹다가 흘리기라도 하면 얼굴을 찌푸리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애착은 있어서 1월생인 첫째를 4살이 되어서 어린이집에 처음으로 보내기도 했다. 늘 내 품속에서 키우려고 했던 것이다. 

  

내 안에 어떤 이중성이 있음을 알게 되기도 했다. 놀이터에서 손발과 옷이 시커매진 “아이들을 보면서 역시 아이들은 저렇게 커야 해”라고 말하면서도 내 아이는 그렇게 키우고 싶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성장 과정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 사사껀껀 개입하면서 놀이를 방해하기도 했다. 


  

바닷가에서 만난 엄마와 이모 사이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돌아보게 되었던 것이다. 아이를 잘 키우는 것에 대한 특별한 정의는 없다. 그러나 본디 인간은 태어나서 수많은 실패를 하면서 배워야 그 실패 속에서 배움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 한명이었다. 방치가 아닌 방임의 자세가 부모에게는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부모가 되니까 그게 잘 안되었다. 너는 내 새끼니까 내가 아주 잘 보살피고 싶다는 어떤 강박이 내안에 있었다. 

  

나는 그것이 부모와 부모가 아닌 사람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내 자식과 네 자식은 다르다고 부모는 생각한다. 내 배가 아파서 낳은 아이이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소중하다. 그래서 그 소중함을 내가 보호해주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어디까지 보호해 주어야 하냐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걸어온 길 속에서 나를 되돌아보면서 추억을 기뻐하기도 하고, 때로는 후회하기도 한다. 수많은 기쁨 속에서도 부족했던 나를 찾고자 한다면 지나친 간섭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가끔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잘 키울 수 있을까?’ 정말로 잘 키울 수 있을까. 

  

공교롭게도 시간은 돌아갈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본 들 다시 돌아갈 곳은 없다. 그래서 둘째가 태어나면서 나는 첫째 때에 실수했던 부족한 나를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 가졌던 마음을 조금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아이가 실수해도 ‘그럴 수 있지. 그러면서 배우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 상황에 개입하지 않았다. 밥을 먹을 때에 흘려도 ‘그럴 수 있지. 너가 한번 스스로 해 봐.’ 라면서 마음을 비웠다. 방이야 한 번 더 치우면 되는 것이니까. 그러니 내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렇게 둘째를 키웠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나는 실패를 답습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를 잘 키운 것인지? 아닌지? 그건 잘 모르겠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면서 어떤 미련이라는 것은 없다.      

  

첫째는 이제 초등학생 2학년이다. 유아 시절의 첫째가 이제는 아니다. 더 이상 놀이로만 초등학생의 하루가 채워져서는 안 된다. 이제는 공부라는 것이 첫째에게는 중요한 화두다. 

  

공부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자니, 문제집에서 계속해서 틀리는 문제를 보고 있자니, 공부하기 싫어서 몸을 꼬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에게는 하나의 고민이 생겼다. 내가 어디까지 개입을 해서 아이를 다독여야 하는지? 유아 시절과는 또 다른 고민 속에서 나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건 그때 내가 가졌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만약에 내 친구가 비슷한 자녀의 고민을 상담한다면, 나는 어떻게 답해줄까? 생각할 것도 없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애들은 원래 그렇게 크는 거야! 너도 그랬잖아!”


  

그런데 이게 내 아이라면 다르다. 그러니까 내 아이와 네 아이는 다른 것이라는 생각이 똑같은 문제에 대한 서로 다른 대안을 만들게 된다는 점이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비합리적인 결론이다. 알면서도 그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 부모라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나 스스로에게 다시 묻게 된다. ‘아이를 다시 키운다면 잘 키울 수 있을까?’ 나는 지금 이 고민을 풀어야 한다. 그래야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다. 내가 그것을 느끼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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