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사색
< 노원마을 >
검색창에 ‘상계동 노원마을'이라 검색해 본다.
서울 중심가의 철거민들이 이주하여 형성한 마을, 도시 빈민촌.
1970년대에 그곳에서 태어나 2000년이 넘어 그 동네를 나왔다.
보일러가 없어 한겨울 온수도 안나오고, 연탄 난방이었으며, 재래식 공중화장실에, 정부미 쌀을 받아 먹었다.
성인이 되면서 그동네가 빈민촌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영세민'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 공순이가 될 뻔한 사연 >
인켈, 삼양라면, 미원, 시멘트 공장 등, 주변엔 공장이 많았다.
국민학교 동창 중에는 고등학교를 겨우 나와 인근 공장을 다니는 이들이 있었다.
부친은 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시키고, 딸들은 중학교만 졸업시키고 공장에 보내라 했다.
엄마는 고등학교는 나와야 '사람 구실'을 할수 있다며 아들 하나와 딸 둘을 전부 고등학교까지 보냈다.
엄마의 자식들은 고등학교 졸업때까지 상위권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 순진했지만 순종적이진 않았던 아이 >
열아홉 가을, 이른 나이에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내 월급 통장은 엄마가 관리하며 대부분 집안의 생활비로 쓰여졌고, 그래야 하는줄 알았다.
연차가 쌓이며 대학에 가고 싶어졌다.
부친은 "네 주제에 무슨 대학을 가느냐"고 했다.
학원비를 벌기 위해 주말엔 알바를 하고 퇴근 후엔 학원을 다녔고, 6개월 후 명문으로 손꼽히는 대학에 합격했다.
그때도 부친은 "여자가 무슨 대학을 가느냐, 그 돈 있으면 나를 달라"고 했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4년간 하루 5시간을 자면서 직장을 다니고 학교를 다녔다.
꽤나 인기가 많았던 젊은 시절, 집까지 데려다준 남자들의 행동이 전과 후가 달라진걸 느꼈다.
굳이 인사 드리러 온 남친들에게 부친은 "쟤를 데려가면 우리는 어떡하냐, 다달이 얼마나 줄꺼냐"를 물었다.
부끄러움이 아닌 자존심이 상했고, 남자를 만난다해도 부모님께 보여주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빈민촌이었던 그 동네를 나오며 집을 사자고 했다.
부친은 재개발 딱지를 우리 몰래 단돈 1천만원에 팔아먹어 놓고, "집을 뭐하러 사느냐, 그 돈 있으면 나를 달라"고 했다.
엄마가 10년간 내 월급에서 몰래 모아 두었던 돈과 퇴직금을 중간정산 받아 집을 샀다.
내나이 서른에 처음으로 혼자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구글맵도 여행어플도 없던 그 시절, 샤를드골 공항에 내렸을 때의 당황스럽던 기분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영어는 1도 못하지만 파리에서 베니스로, 베니스에서 로마로, 8일간의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
그 후로 1년에 2번은 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이 되었고, 부친은 내가 짐을 쌀 때마다 "그 돈 있으면 나를 달라"고 했다.
여행은 나의 유일한 도피처였고, 해외로 나가서 살고자 했으나 엄마 때문에 차마 떠나지 못했다.
< 모두의 정성으로 자란 아이 >
무남독녀 외동딸 오라비의 딸래미는 태어나면서부터 중학생때까지 엄마와 내가 정성으로 돌봤다.
엄마 몸이 힘들어지면서 부터는 외할머니가 이어받아 지금까지 돌보고 있다.
빠른 생으로 한살 빨리 학교에 간 아이는, 적당히 공부하고 적당히 놀며 꽤나 괜찮은 대학에 들어갔다.
우리는 누구도 아이의 학업을, 아이의 인생을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는 누구도 아이의 청춘을 저당잡아, 우리 일신의 영달을 꾀하지 않는다.
휴학을 하겠다 했을때도 그러라 했는데 갑자기 교환학생에 합격 했다고 연락이 왔다.
자기 주도적 인생을 살고 있는 아이의 미래에 걱정은 내려놓기로 한다.
과거의 내가 살고 싶었던 삶을 아이가 살수 있어서 무척이나 기쁘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더 많은 꿈을 펼칠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돌아오길 소망한다.
언제나 응원하며, 부디 몸조심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