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제? 민주시민교육?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제도 아냐?
사회와 학교가 조직적으로 움직일 때 학생들은 파편화되어 각개격파되는 경우가 많다. 학벌주의, 무한경쟁, 양극화와 같은 사회문제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기성을 대신해 평범한 학생들이 세상을 바꾸려 할 때면 언제나 "공부나 해라"는 말이 그들을 따라다닌다.
그람시는 이를 헤게모니라고 불렀다. 공권력만으로 권력을 유지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피지배층의 '동의'를 얻어냄으로써 더욱 견고한 지배를 형성한다는 개념이다. 공부나 해라는 말에는 여러 함의가 있다. 그 함의 중 하나는 학생이 주권자로서 각성하려는 움직임을 또는 그러한 사조를 '학생본분을 벗어난 일탈'로 규정하고, 학생 스스로가 그 규정을 통해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드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그러한 검열이 학생들의 '이익'을 위하는 듯 보인다. 당장에 놓여진 시스템에 순종하면 좋은 대학, 안정된 미래, 성공적인 삶이 기다리고 있는데, 뭐 하러 깊이 고민하나.
그러나 민주사회에서의 공부는 다른 게 아니지 않을까. 함께 모여 이슈나 현안에 대해 토론하는 법을 배우는 것, 자신의 손으로 학교의 폐단을 바로잡아보는 경험만큼 더 중요한 공부가 어디 있겠나. 더욱이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민주공화국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일례로 사학재단에 속한 학생회는 힘 한 번 못 써보고 좌절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중·고등학교에서 교내선거를 실시할 때면 두발, 복장 '자유화'를 갈망하던 학생들이 재단의 수구성에 가로막히는 일이 많다. 자신의 투표로 학교를 바꿀 수 있다는 민주교육은 온데간데없고 학생들에게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만 각인시키는 셈이다.
나 역시 그런 경험이 있다. 고등학교때 학생회선거에서 친구가 출마했고, 나는 그 친구를 지지하며 선거운동을 거들었다. 공약은 명확했다. 두발규제 완화, 학생의견이 반영되는 교칙개정이 공약이었다. 친구들은 호응했다. 그 호응에 힘입어 친구는 당선되었다.
그러나 당선 이후에도 학교는 달라지지 않았다. 학생회장이 된 친구가 교장실을 찾아가도, 교감선생님과 면담을해도, 돌아오는 답은 똑같았다. '학부모들의 의견을 들어봐야 한다', '지역사회의 인식이 아직은', '재단의 방침이 있어서'와 같은 현실적인 한계를 언급하며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다른학교의 사례도 찾아보고, 친구들의 의견이나 조언도 참고했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노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친구는 체념하는 듯 보였다. 처음엔 '학생회를 열어 설득할 방법'을 고민하더니, 이내 포기하더라. 나는 멀찍이서 지켜만봤다. 나 역시 학교에서의 이미지가 좋지않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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