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세기에 들어서 과학, 통신, 교통, 의술 등의 기술은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반면 우리의 생각은 이러한 주위 환경의 변화와는 달리 고정관념의 테두리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생각의 정체성 탈피는 시대적인 요구이며 과학 기술 등을 통하여 얻어지는 새로운 정보를 바탕으로 시야를 넓힐 때 우리 생각의 한계도 넓어진다.
고정관념(固定觀念)의 울타리
연못에 돌을 하나 던지면 동그라미를 그리며 퍼져 나간다. 이 물 무늬 또는 물둘레는 우리의 주위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 물둘레를 과학 기구를 통하여 수면 높이로 옆에서 관찰해 본다면 물둘레는 파도처럼 사인파로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사물이지만 보는 각도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예는 우리 주위에 많이 있다. 물 컵에 물이 절반 들어 있을 때, 어떤 사람은 '물이 절반 밖에 없네'라고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은 '물이 절반이나 있네' 라고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허공에 홀로 떠 있는 지구
멀리 떨어져 있는 밤하늘에 덩그러니 떠있는 달은 많은 사연을 안고 있다. 두 손 모아 소원 빌던 할머니 이야기, 고부갈등으로 말못하는 며느리의 하소연, 어릴 때 듣던 달님 이야기, 토끼가 방아 찧고, 이태백이 놀던 달의 이야기 등이 우리의 기억속에 남아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달에 미국의 아폴로11호 우주 비행사 암스트롱이 1969년 7월 21일 인류 최초로 달에 첫발을 디딘다.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는 지구 둘레의 10배에 해당하는 약40만km (384,400km). 아폴로11호는 시속 5500km ~ 40,000km의 속도로 3일 동안 우주를 항해한후 달에 도착한다. 달에 도착한 아폴로11호 우주 비행사들은 달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모습을 보았다. 지구는 달보다 4배 정도 크다. 따라서 달에서 보는 지구의 모습은 지구에서 달을 보는 달의 크기에 4배만큼 크게 보이게 된다.
과학의 발전이 우리 마음속에 간직하던 기억들을 빼앗아 가긴 하지만, 그 빈자리엔 새로운 사실들이 들어온다. 예를 들어 지구가 크나큰 우주 공간에 덩그러니 홀로 떠 있다는 사실, 지구와 달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중력의 끈이 작용하여 달이 지구에서 벗어나지 않고 지구 주위를 한달에 한 번씩 회전한다는 사실 등이다.
둥그런 원 그리기
지구는 우리의 집이다. 광활한 바다와 육지로 덮인 지구는 둥근 공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오랜 역사를 품고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한다. 끝없는 우주 공간에 떠 있는 작은 점 같은 지구는 거대하고 무한한 우주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어쩌면 우주 자체도 끝없이 펼쳐진, 경계가 없는 거대한 공과 같은 모습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은 이 둥근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통해 태양 주위를 돌며 그려내는 궤적 속에서 펼쳐진다. 지구의 자전이 그리는 원의 중심은 변하지 않고 지구 깊은 내부에 있으며, 공전의 중심은 지구 바깥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일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우리 조상들의 시대는 곡선의 시대였던 것 같다. 집도 거리도 길도, 산과 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에 따라 곡선을 이루며 형성되었다. 반면, 현대는 직선의 시대다. 빌딩도 거리도 길도 직선으로 설계되고 세워진다. 조상들의 사고방식이 곡선형이었다면, 나와 너의 경계가 흐릿하고, '나는 너'이고 '너는 나'인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의 사고방식은 직선형이다. 나와 너의 경계가 뚜렷하고,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이다. 사리에 밝고, 좋고 나쁨이 분명하며, 맞고 틀림도 확실하다.
매일 반복되는 우리의 삶 속에는 분명 원의 모습이 있다. 우리의 삶의 중심을 마음이라고 한다면, 그 마음의 원형은 폭풍이 이는 바다의 깊은 곳처럼 고요하고 움직임이 없다. 우리가 이 마음의 원형을 찾아 둥근 원을 그리며 그 중심에 머무르는 순간, 그것이 곧 행복한 마음의 순간이다.
생각의 궤도
나무에는 결이 있고, 행성들은 태양 주위를 돌며 궤도를 이루고, 전자는 원자 주위를 회전한다. 이는 우주의 구성이 중심과 그 주위를 도는 궤도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음을 의미하는 듯하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 역시 마음과 생각의 원점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각기 고유한 상태의 궤도를 이룬다. 편안한 상태, 힘든 상태, 스트레스로 지친 마음의 상태, 고요한 마음의 상태, 무언가를 열심히 찾으려는 생각의 상태, 마음을 비우려는 생각의 상태 등의 궤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의 삶은 한 상태의 궤도에 계속 머무르기보다는,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끊임없이 이동한다고 볼 수 있다.
사고(思考) 실험
갈릴레오의 피사의 사탑 이야기는 잘 알려진 일화이다. 기울어진 탑으로 유명한 피사의 사탑(斜塔)은 이탈리아 피사에 있는 성당의 종루이며, 관광 명소로 유명하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물체의 자유 낙하 시간이 물체의 질량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피사의 사탑 꼭대기에서 크고 작은 두 물체를 동시에 떨어뜨려, 양쪽이 동시에 땅에 닿는다는 것을 실험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일화는 갈릴레오의 제자였던 비비아니(Viviani)가 구상한 사고(思考) 실험이며, 실제 실험은 1586년 네덜란드의 물리학자인 시몬 스티븐(Simon Stevin)이 행했다고 한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낙사고라스(Anaxagoras)는 기원전 400년경, 물체를 계속 쪼개다 보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마지막 남는 입자를 '원자'(그리스어로 a-tomos,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indivisible')라고 이름 붙였다. 20세기 물리학자 어니스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와 닐스 보어(Niels Bohr)는 이를 실험을 통해 증명했다. 러더퍼드와 보어는 원자의 모형을 태양계와 유사하게 묘사하여, 원자핵 주위를 회전하는 전자들의 집합체로 설명하였고, 이를 실험실에서 입증했다.
미시세계의 발견
그리스의 철학자 아낙사고라스(Anaxagoras)는 기원 전 400년 전 하나의 물체를 반으로 계속 쪼개어 나갈 때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가장 마지막에 남는 입자를 원자 (그리스어 a-tomos, 더이상 나누어질 수 없는 'in-divisible')로 이름하였고, 20세기 물리학자 러더포드(Ernest Rutherford)와 보아(Niels Bohr)가 이를 증명하였다. 러더포드와 보아는 원자의 모형을 태양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태양계와 같이 원자핵의 주위를 회전하는 전자들의 집합체로 묘사하고 이를 실험실에서 증명하였다.
20세기에 들어 원자핵 과 전자로 구성하는 원자의 구조 모형이 제시되고, 입자들에 대한 연구는 많은 발전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과 더불어 실험들의 결과는 맨눈으로 볼 수 있는 거시 규모(巨視 規模)의 세계에서 사용하던 종래의 고전역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모순을 지적하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역학 체계인 양자역학을 제시하게 된다. 즉 분자, 원자, 전자, 소립자와 같이 아주 작은 미시세계의 현상은 거시세계의 잣대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마치 내 생각만이 맞다는 견해를 벗어나, 내 생각과는 다른 사람들의 견해와 함께 공존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연의 섭리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예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다. 예를 들어 두대의 자동차가 나란히 같은 속도로 달릴 때 한 자동차 안에 탄 사람이 다른 자동차에 탄 사람과는 서로 손짓으로 대화할 수 있을 정도로 속도에 대한 느낌이 없지만, 멀리 보이는 물체를 볼 때는 자동차의 속도를 느끼게 된다. 즉 나의 속도는 절대적인 아닌 상대적이라는 설명이다. 이는 마치 내 생각만이 맞다는 절대적 논리에서, 내 생각이 다른 사람의 생각에 비해서 다를 뿐이라는 상대적 논리로 옮겨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우주 시공간의 원리로 볼 수 있다.
또한 양자역학은 양자도약의 이론을 설명한다. 양자도약은 원자 모형의 미시세계에서 원자핵 주위를 감싸고 있는 전자가 지극히 짧은 어느 한 순간에 빛의 에너지인 양자를 배출하면서 바깥 쪽 궤도로 도약한다는 이론이다. 이와 같은 이론은 어느 불자(佛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화두를 참구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정진하다가 어느 한 순간에 '탁'하고 깨친다는 참선의 신비를 새롭게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