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지금 현재의 순간을 벗어나, 지나간 과거의 일은 물론 다가올지도 모르는 미래의 일에 까지도 생각의 꼬리를 물게 한다. 생각은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과거와 미래를 왕래한다. 음악이나 특정한 장소나 환경 등은 우리에게 지나간 기억속에 연계되어진 특정한 생각을 떠오르게도 한다. 이와 같이 생각은 과거나 미래의 일을 현재화 하는 시간의 제약을 넘어가는 탈시간성(beyond time)의 힘을 지니고 있다.
시간의 허상
시간은 실상도 아니고 허상도 아니다. 실상은 시간이 존재하기 전부터 있었고, 시간에 제약받지 않는다. 시간은 숫자를 사용하는 개념으로, 실상의 움직임에 숫자를 대입하여 허상의 세계를 형성한다.
실상은 지금 이 순간이며, 현재이다. 그러나 이 순간을 인지하는 그 순간, 이미 그 순간은 과거가 된다. 지금 이 순간에는 시간도, 인식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은 시간의 원점이자, 과거의 시작이다.
시간은 우리의 삶을 돕고, 지나간 일을 돌아보게 하며, 다가올 일을 준비할 수 있게 한다. 시간은 개념으로써 일에 연계될 뿐, 우리가 시간에 얽매이는 일은 없다. 우리는 시간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일에 얽매일 뿐이다.
시간의 객관성과 주관성
시간은 언어나 말이나 숫자와 같이 인간이 만든 개념의 하나로 우리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지적인 도구로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 시간의 신) 와 '카이로스'(Kairos, 기회의 신)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이에 준하여 헬라어에서는 시간을 뜻할 때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두단어를 사용한다. 직선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뜻 할 때는 '크로노스'를, 순간이나, 시절, 기회, 때를 뜻 할 때는 '카이로스'를 사용한다.
'크로노스' 시간은 과거부터 미래의 방향으로 일정한 속도로 기계적으로 흐르는 연속성을 지니며 순서를 따르는 직선형의 유한한 시간을 의미한다. 즉, '크로노스' 시간은 헤아릴 수 있는 객관적인 양(量)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우주의 시작을 150억년 전으로 보고, 40억년 전에 지구상에 생명체가 시작되고, 2백만년 전에 인류의 조상이 시작되고, 46만년 전에 북경원인이 출현하고, 4만년 전에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로 분류되는 현생 인류가 등장한다. 이와 같은 역사적 시간의 관점에서 우리의 삶을 볼 때 인간의 수명(壽命) 백 년(百年)이 역사속에서 차지하는 부분은 작은 점 하나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이에 반해, '카이로스' 시간은 어느 순간이나 인간의 주관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즉, '카이로스' 시간은 헤아릴 수 없는 주관적인 질(質)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우리의 삶을 인간의 생애를 중심으로 본다면 한사람 한 사람 각자의 생애는 유일무이한 고유성을 지닌 각자의 전체성 또는 완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간의 생애는 '크로노스' 시간의 역사적 관점에서는 작은 한 점조차 되지 못하는 미약한 존재이지만, '카이로스' 시간의 생애적 관점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난 영원의 세계와 연결되는 인생의 완성을 의미한다.
'크로노스' 시간의 객관성
시간이 가리키는 순간은 같아도 그 같은 순간의 표기가 다른 것이 표준시의 개념이다. 표준시는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준하여 경도 15도에 1시간씩 차이를 두게 된다. 지구가 둥글기에 지구 전체의 경도는 360도이고 경도 15도 마다 1시간씩 차이를 주면 24시간 하루가 된다. 따라서 땅이 넓은 캐나다의 경우에는 6개의 표준시를 사용한다. 이러한 시간의 이동이 복잡하기는 하지만, 우리의 생활을 편리하게 한다.
오래전 어린아이들이 불렀던 동요 중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르면 비행기 ~'라는 동요가 있다. 사실 비행기는 빠르다. 배로 가면 한달 넘어 걸리는 거리도 비행기는 한나절에 간다. 비행기는 시속 100킬로미터로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10배인 시속 1,000 킬로미터의 속도로 하늘을 나른다. 비행기 속도는 사실 소리의 속도 (1,224 km/h)와 총알의 속도 (900km/h)와 비슷한다.
지구는 둥글고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면서, 하루에 한 바퀴 씩 자전을 한다. 공전은 일년 걸리고, 자전은 하루 24시간이 걸린다. 24시간 동안 경도 360도로 나누어 놓은 지구의 둘레 약 36,000km를 회전하기 위해서 1시간에 경도 15도에 해당하는 1,500km를 회전한다. 예를 들어 카나다의 경우, 약5000km에 해당하는 대륙의 거리를 회전하는데 약4시간 정도가 소요되며, 이를 지역별로 나누어 편의상 6개의 표준시를 사용한다.
비행기가 빠르다는데 지구의 자전은 그보다 1.5배 빠르다. 버스나 기차를 타고갈 때 버스나 기차의 속도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빠르게 회전하는 지구의 속도를 느끼지 못할 뿐이다. 사실 더 빠른 것은 지구의 공전이다.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비행기보다 100배 빠른 100,000 km/h의 속도로 공전한다.
'크로노스' 수명과 '카이로스' 일생
삶을 양과 질로 나누어 본다면, 삶의 양은 수명이고, 삶의 질은 일생에 해당한다. 수명은 수평적이며 직선적인 시간의 흐름을 뜻하고, 일생은 직선적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수직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생활에서 시간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 없다. 시간에 착오가 생기면 정시에 출발하는 기차를 놓치게 되고, 비행기도 탈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시계를 통해 시간을 확인하며 시간에 맞추어 생활을 진행한다. 이때 시간은 일정한 방향으로 기계적으로 똑딱똑딱 흘러간다. 역사적 시간은 객관적이고 직선적이며, 수평적인 연대표적 기간을 의미한다. 반면, 관광지에서 아는 사람과 헤어질 때는 "좋은 시간 가지세요"라고 인사한다. 이때 시간은 형태는 없지만, 마치 마시는 물처럼 감지할 수 있는 양적 또는 공간적 의미로 인식된다. 즉, 수평적이고 직선적인 시간의 흐름을 수직적으로 세워 그 안에 내재된 내용을 관찰하는 주관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객관적인 의미의 '크로노스' 시간은 현대 생활에서 매우 중요하다. 시간에 착오가 생기면 정시에 출발하는 기차를 놓치고, 비행기도 탈 수 없게 된다. 우리는 '크로노스' 시간을 시계를 통해 확인하며, 시간에 맞추어 생활을 진행한다.
주관적인 의미의 '카이로스' 시간은 우리의 삶을 이끈다. 중요한 회의에 갈 때, 친구가 "늦었다, 시간 없어, 빨리 가자"라고 말해주거나, 시험을 볼 때 시간이 부족해 끝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혹은 "좋은 시간 가지세요"라고 인사하기도 한다.
이처럼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시간은 수명과 일생의 차이를 설명해준다. '크로노스' 시간으로 보면 현대 의학의 도움으로 길어진 인간의 수명이 백 년이라 해도, 우주의 150억 년 역사에 비하면 티끌 한 점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카이로스' 시간으로 보면 우리의 일생은 햇수나 기간과 상관없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수많은 순간과 사건을 포함하는 '삶' 그 자체를 의미한다. 삶의 기간은 사람에 따라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다. "인명은 하늘에 달려 있다(人命在天)"는 옛말이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어진 삶이 얼마나 충실한가 하는 그 내용이다.
사고의 좌표 이동
생각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생각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사람도 없다. 다만 생각이 머리에서 나와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의 이동이 맞는지를 증명할 길 은 없다. 다만 가슴으로 내려오는 생각을 몸 밖으로 멀리 하늘로 또는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로 옮겨 버릴 때, 우리를 괴롭히던 강력한 힘을 지닌 생각과 근심은 하나의 작은 조각에 불과하게 된다.
다시 사는 새로운 삶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어떻게 사시겠어요?'하는 질문이 있다. 가볍게 답하던 이러한 질문이 중요해지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과제이다.
한평생을 60년으로 보던 시대가 서서히 사라지고 100세 시대를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에게 생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요구한다. 이러한 경우 60세에서 100세까지 40년의 세월이 우리에게 새로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장차 우리에게 주여지는 이 40년의 세월은 현대문명의 선물이며, 우리가 다시 한번 이 세상에 태어나 새로운 삶을 이룰 수 있는 시간일 수도 있다.
12간지(十二干支)와 사주(四柱)에 따르는 60세 환갑, 태어나서 공부하고 일하고 자녀들을 키우며 지나간 60세를 한 생애로 보아왔던 우리의 전통적인 관념에서 벗어나, 60세에 시작하는 새로운 생애는 우리가 이세상에서 다시 한번 살 수 있는 거듭나는 제2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나간 시대관(時代觀)
이태리의 시대적인 철학자이며 과학자인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학설)을 지지하여 많은 고초를 당하게 된다. 그 당시에는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천동설을 믿었기 때문이다. 20세기 과학의 눈으로 보면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 당시에는 생각하기도 믿기도 어려운 학설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20세기에 사는 우리가 맞고 갈릴레오 이전 사람들이 가졌던 생각은 틀린 생각이었을까? 만일 우리가 알고 있는 어느 사실이 오랜 세월 후 틀렸다고 한다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 들이 틀린 생각일까? 여기에서 이 질문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흑백 논리처럼, 맞고 틀림을 구별하려고 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경우의 생각은 현대과학의 잣대를 기준하여 맞고 틀림으로 구분하기 보다는, 그 당시 사람들의 생각은 그러하였다거나, 혹은 그 생각은 그 당시 사람들의 시대관 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예는 우리의 주변에도 많이 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어린아이들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선물을 기다린다. 아이들이 성장해 감에 따라 조숙한 아이들은 부모에게 질문을 한다. '엄마,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진짜야?' 이때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답이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의 경우에는 답이 하나 이상이어야 한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신화를 벗어나고 싶어하는 어린이에게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이야기속의 인물로 생각하면 되겠지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믿는 어린아이에게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진짜로 그 어린아이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믿는 마음 속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른들도 때로는 이러한 동심의 세계에 젖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영원한 과거
영어에서 어려운 문법중의 하나가 동사의 시제이다. 문장의 시제에 맞추어 동사를 과거, 현재, 미래형으로 바꾸어 구사해야 한다. 여기에 불규칙 동사까지 끼게 되면 동사의 시제 변화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에게는 무척 부담스러워 지는게 사실이다. 우리말의 시제는 동사보다는 문장의 구성에 따르게 된다. 예를 들어 과거의 일인 경우는 '내가 그때는 ~', 현재인 경우는 '내가 지금은 ~', 미래인 경우는 '내가 앞으로는 ~' 등으로 표현한다.
때때로 지나간 일 중 되살아 나는 기억들이 있다. 특히 상처받은 기억은 생생할 정도로 되살아 나게 된다. 과거의 기억이 과거의 사건을 생생한 현재로 탈바꿈 시키는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영원한 과거' 또는 '과거의 노예'라로 부른다.
사실 상처받은 과거의 기억들을 잊어버리기는 쉽지 않다. 사건은 지나갔지만, 기억은 시간을 넘어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억을 없애려거나 잊으려는 노력보다는, 그 사건에 얽혀서 달라 붙어있는 감정들을 밖으로 내어 보내는게 효과적인 방법이다. 감정이 붙어있지 않는 기억은 사탄의 힘이 빠진 사건 자체의 기억일 뿐, 우리를 스트레스로 유도하지는 못한다.
그건 지난일이야
우리에게는 좋은 일, 나쁜 일, 슬픈 일, 기쁜 일 등 많은 일들이 있다. 기쁘고 좋은 일들은 간직하고 싶고, 슬프고 나쁜 일 들은 잊어버리고 싶다. 그런데 살다 보면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기쁘고 좋은 일에 대한 기억은 쉽게 사라지고, 슬프고 나쁜 일에 대한 기억은 우리의 주위를 쉽사리 떠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런 것이 우리 기억의 속성 일지 모른다.
세월이 감에 따라 우리의 기억은 아무리 나쁜 기억이라고 하더라도 그 강도가 점차 약해진다. 지난 일은 기억에서 점차 사라지고,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 일에만 몰두하면서 자연의 흐름에 따라 살아가던 시대도 있었다. 지금의 시대는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시간 까지도 되 돌이키며 살아가는 시대이다. 유투브와 같은 영상 기술은 지난 일을 쉽사리 지금 일처럼 만들 수 있다. 이러한 문명의 이기는 잊어버려야 할 기억들을 생생하게 되 살아 날수 있도록 만들 수도 있다.
지난 일이 지금 일로 계속 남으면 어떠한 결과가 남을까? 자연의 흐름에 역행할 때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는 없다. 지난 일은 지난일로 돌려보내야 지난 일에서 벗어나 지금에 충실하게 되며, 지금에 충실할 때, 우리의 마음이 편해지고, 우리의 삶은 자연의 순리를 따르게 된다.
옛 생각
우리는 기억을 가지고 산다. 즐거운 기억, 슬픈 기억, 마음 아픈 기억 등 수많은 기억들이 때때로 우리의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어려웠고 힘들었던 상처의 기억은 어느 다른 기억 보다 오래 가고, 지나친 경우에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기까지 한다.
우리는 기억의 주인이다. 하지만 기억이 기억만으로 남아있으면 삶이 무미 건조해진다. 기억이 추억이 되고 쌓인 추억이 삶의 활력소로 다시 태어날 때 삶의 진미를 맛 볼 수 있다. 옛 생각을 종이에 적어 내리면 우리의 마음도 정리되고, 우리의 기억을 삶의 활력소로 승화시키는 길도 보이게 된다.
기억은 꽃씨에 비유할 수 있다. 꽃씨가 땅에 떨어져 변화되어 땅을 헤치고 올라와 아름다운 꽃을 피우듯이, 우리의 기억도 변화되어 마음 속을 헤치고 올라와 멋진 삶의 작품으로 승화될 때, 그 작품은 변화의 힘을 가지며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영원한 예술 작품으로 변모 되여, 아름다운 삶의 신비를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