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와 함께 칭송받던 신하는
척추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 초기 문신_허조

by ANNE
"당시 정승의 지위에 있으면서 교화를 펼친 이는 황희와 허조 뿐이다"

-조광조-


"조선의 어진 재상으로 황희와 허조를 으뜸으로 일컫는다"

-김숙자-


진짜 허조 초상화.jpg

우리에게 '황희 정승'이라는 말은 참 익숙하다. 하지만 '허조 정승'이라는 말은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앞서 소개한 조광조와 김숙자의 말처럼 허조는 황희만큼이나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허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계단넓히기.jpg


허조는 척추 장애를 가지고 있어 걷기가 힘들었다. 그럼에도 수십년동안 네 분의 임금 태조, 정종, 태종, 세종을 모시며 꾸준히 일을 했다. 허조를 시기 질투하는 이들이 구부정한 허조의 등을 보고 '수응재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전해지는데, 수응재상은 '바싹 마른 매'라는 뜻이므로 허조의 겉모습을 보고 놀린 것이라 할 수 있다. 허조의 척추 장애와 관련한 일화가 하나 있다. 세종 시기의 어느 날 허조는 국가의 큰 제사에서 세종에게 잔을 주고 물러나다 계단에서 넘어졌다. 걷는 것도 불편한데 계단은 얼마나 불편했을까. 국가의 중대한 제사를 망쳤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허조를 매우 아꼈던 세종은 넘어진 허조에게 다치지는 않았는지 묻고, 계단을 넓히도록 명했다고 한다.


세종이 이리도 아꼈던 허조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1.허조의 삶


허조는 1369년(공민왕 18년) 4월 11일 생이며, 고려말에 17세의 나이로 진사시, 19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합격했다고 전해진다. 허조의 스승은 권근이었는데, 태조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인물이다. 스승의 영향을 받았는지, 허조는 조선이 국가 기반을 확립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고려는 불교의 나라였지만, 조선은 유교의 나라이기에 왕실의 각종 의식 뿐만 아니라 제사의 방식도 이전과 달라져야 했다. 여기에 허조가 20대의 나이로 참여하였고, 예악제도 정비의 스승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사실 유교 나라임에도 여전히 불교를 믿는 이들이 많았고 심지어 태조조차 불교를 완전히 버리지 못했었지만, 허조는 달랐다. 예악 제도를 정비한 후 부모의 제사도 불교가 아닌 유교 식으로 지냈다고 전해진다. 이 일화에서 허조는 언행이 일치하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허조ebs일러스트.jpg 허조, 출처ebs


하지만 허조는 단순히 언행만 일치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에게 '강직한 성품'이라는 말을 붙이는 이유는 따로 있다. 1399년(정종1년) 당시 30세의 허조는 잘못된 일이라면 왕의 가족이라 해도 탄핵을 했다. 정확한 사유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허조는 여러차례 정종의 동생이자 태종의 형인 이방간의 매부를 탄했했고, 이로 인해 파면되었다. 그러나 다음해인 1400년, 허조의 능력을 높이 산 이유인지 혹은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간의 기반이 약해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관직에 복귀하여 사헌부에서 일하게 된다. 사헌부에서 허조는 임금이라고 할지라도 옳지 못하다고 판단되는 행동에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와 관련해 한 일화가 있다.



응방인.jpg 응방인의 모습


태종은 허조에 대해 처음엔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그 이유는 허조가 고집이 세다는 것이었는데, 쉽게 말해 태종의 눈엔 허조가 '꼬장꼬장한 인물'로 보였던 것이다. 1401년 태종이 즉위한 해에, 궁에는 ‘응방’이라는 매를 기르는 부서가 생겼다. 태종이 매를 아끼기 때문이었는데, 이 부서에서 근무하는 이들을 '응방인'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태종을 믿고 위세가 등등했다. 응방인들이 패거리로 모여 못된 짓을 종종 했다고 알려졌지만, 태종은 눈을 감아 주었다. 아마 원칙을 중시하고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허조는 이를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어느 날 허조는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당시 허조는 사헌부 잡단이었는데, 원래 사헌부잡단이 지나가면 응방인들은 말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그러나 태종을 믿고 기세가 등등하던 응방인들은 허조를 보고 인사도 없이 그냥 지나갔고, 허조는 응방인들의 몸종을 감옥에 가두어버렸다. 이에 화가 난 태종은 허조의 종들을 모두 감옥에 가두어버렸다. 사헌부 관리들은 허조의 몸종을 풀어 위계질서를 바로잡아야한다고 주장했지만, 태종은 허조를 좌천시켰다.


태종이 즉위한 해에 발생한 일이니 서로의 첫만남은 불쾌했을 것 같다. 하지만 이후 태종은 허조를 매우 신뢰하게 되는데, 허조에게 이조전랑 자리를 맡기는 것은 물론, 세자의 교육도 맡기고, 후에 세종에게 자신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신하라고 소개한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일러스트.jpg 맨 왼쪽, 허조.


응방인과의 사건으로 좌천되어 있던 허조를 다음해인 1402년에 다시 불러들인 것은 황희였다. 태종은 황희가 맡던 이조전랑 자리를 뒤이을 인물을 찾고 있었다. 이조전랑은 품계는 낮았지만 각 부서의 당하관의 천거, 언론 기관의 관리 임명, 재야인사의 추천, 후임 전랑의 지명권 등 많은 권리를 가지고 있기에 중요한 자리였다.황희는 태종에게 “허조는 나라의 기둥이 될 자입니다. 군주는 간언을 올리는 강직한 신하를 곁에 두셔야 합니다”라고 말했고, 이에 태종은 허조를 다시 등용하게 되는데, 이때 태종은 허조를 보고 "내가 사람을 얻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후로 태종은 듣기 불편한 이야기일지라도 허조의 의견을 존중했다. 이와 관련해서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신의왕후 묘.jpg 신의왕후 묘


1407년(태종 7년)에 38세의 허조는 세자를 교육하며 함께 북쪽을 향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태종의 친어머니이자 태조의 왕비였던 신의왕후 묘역을 만드는 곳에 이르렀다. 그곳의 백성들은 신의왕후의 묘역을 만드느라 고통받고 심지어 죽는 일까지 생겼다. 이에 허조는 태종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태종은 황희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너희들은 도리를 아는 사람인데..(생략)...왜 나에게 고하지 않았는가? 나의 충신은 오직 허조뿐이로다.

태종의 생모였던 신의왕후의 묘역으로 백성이 고통받는다는 사실을 허조 외에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태종은 기분나빠하기 보다는 다른 신하들이 이 사실을 전하지 않은 것을 지적한 것이다. 이처럼 눈치를 보지 않고 할 말을 다하는 허조에 대해, 태종은 세종에게 "나의 주춧돌"과 같은 신하라고 소개한다.


1419년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를 한 후 허조는 세종의 곁에서 일하게 되었다. 허조는 시관이 되어 많은 인재를 발탁하였다. 시관은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시험관으로, 허조는 시관으로서 관리 등용을 위해 3단계 검증 제도를 만들었다. 1단계에서는 인사 실무를 담당하는 이조낭관이 관리를 추천할 때는 경력, 자질, 부패 등을 확인하도록 했다. 2단계에서는 이조의 각 담당관리들이 모여 앞서 모은 정보들로 평론을 했다. 3단계에서는 다른 부서 관리들이 모두 모여 전체적인 평점을 매겼다. 이렇게 3단계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부정한 청탁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허조는 공정하게 인재를 등용했을뿐만 아니라 등용된 인재를 향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앞서 허조는 왕에게까지도 할 말을 하며 지적하기로 유명했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이러한 허조가 등용된 지 얼마 안 된 어린 관리들에게는 너그러웠다고 한다. 등용된 인재가 작은 실수를 해서 비난을 받는 상황에서 허조는 항상 그 인재의 편을 들어주었다고 하니, 허조에게도 따뜻한 면이 있었던 것 같다.



1422년(세종 4)에 허조는 수령육기법을 제정해 전곡을 다루는 경관은 3년, 수령은 6년 임기를 채우도록 정하였다. 그 이전에는 한양에서 1년 6개월 근무하고, 지방에서 3년 근무 후 다시 한양으로 오는 수령삼기법이었으나, 이 제도로 인한 부작용이 많았다고 한다. 수령삼기법으로 인해 처음 한양에서 일하는 관원들은 곧 지방으로 좌천되어야한다는 생각에 일을 열심히 안 했고, 지방으로 간 관원들은 곧 한양으로 올라갈 생각에 일을 잘 안 했다. 이를 세종이 지적하자 허조는 수령육기법을 만들었고, 이 제도는 조선 말까지 이어졌다.


같은해에는 죄인의 자식이라도 직접 지은 죄가 없으면 처벌하지 않도록 하는 법제를 만들었다. 다시 말해, 연좌제를 폐지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것은 매우 중요한 허조의 업적이라 생각한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6.25전쟁 후 연좌제가 적용되었다. 6.25전쟁 당시 실종되거나 북한에 납치된 이들의 가족들은 직장 취업이나 대학 입학에 불이익이 주어졌다. 간첩이 아님에도 서류 속 이름에 빨간 줄이 쳐져있어 삶에 지장이 많았다고 한다. 만일 조선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면 억울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억울한 사람들이 없도록 하기 위해 허조가 죄인의 자식이라도 직접 지은 죄가 없으면 처벌하지 않도록 하는 법제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1426년(세종 8)에 57세였던 허조는 다른 관리들과 함께 속육전을 편찬하여 세종에게 바쳤다. 여전히 건국 초기였던 당시에 조선에는 이부, 호부, 예부, 병부, 형부, 공부의 6부 제도와 그에 따른 법령이 필요했었다. 그래서인지 당시 세종은 속육전이 올라오자 "이 책은 만들기 어려웠을텐데, 경들이 제도를 정리해놓았으니, 천천히 읽어보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속육전은 후에 만들어지는 '경국대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세종의 곁에서 약 20년간 일하던 허조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태평한 시대에 나서 태평한 세상에 죽으니, 천지간에 굽어보아도 부끄러운 것이 없다. 내 나이 70이 지났고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으며 성상(당시 세종)의 은총을 만나 간언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시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말을 남기고 얼마 뒤, 허조의 형 허주가 허조의 방에 들어가 보니 허조는 혼자 웃음을 띄고 있었다고 한다. 이어 허조의 부인이 들어가도 허조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혼자 웃고만 있었으며, 아들 허후가 옆에 앉아도 마찬가지 였다고 한다. 이상하게 여긴 가족들이 허조를 자세히 살피니 허조는 웃음을 띤 채로 숨을 거둔 뒤였다고 전해진다.


어쩌면 허조는 자신의 나라를 위한 진심을 들어주고, 아껴준 왕들을 모시며 행복한 삶을 살아서, 떠날때도 웃으며 떠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담으로 허조는 형 허주와의 우애도 매우 깊었다고 전해진다. 이와 관련해 한 일화가 있다. 나이가 들어 벼슬을 내놓고 물러나 있는 형 허주에게 허조는 종종 찾아갔었다. 이때 척추장애로 걷는 것이 불편함에도 형을 찾아갈때는 말을 타지 않고 동네 어귀 멀리서부터 걸어 들어갔다. 형인 허주 역시 그가 올 것을 언제나 미리 짐작을 하고 허조가 잘 찾아올 수 있도록 집안에 등불을 환하게 켜두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형제와의 우애도, 임금의 총애도, 동료들의 존경도 받던 허조의 삶을 살펴보았다.



2. 허조의 고집


업적이 많았던 허조에게도 큰 단점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고집'이었다. 세종은 후에 허조에 대해 “허조는 고집불통이야.”라고 말한 바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먼저 허조는 질서, 원칙을 매우 중요시 여겼다. 여기에 한 일화가 있다. 세종이 장영실을 등용해 많은 발명품이 나온 것을 알 것이다. 하지만 맨 처음 세종이 장영실을 등용할 때 그의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반대를 한 신하들이 있다. 그 중 한명이 허조였다.


또한, 허조는 '부민고소법'을 제의하여 시행했다. 이 제도가 나온 배경은 다음과 같았다. 한양에서 지방으로 관리를 내려보내자, 지방 사람들이 한양에서 온 관리에게 텃새를 부리거나 얕보는 일이 종종 있었다. 허조는 한양에서 내려보내는 관리의 입지가 확고해야 왕권이 안정될 것이라 믿었고, 한양에서 내려간 관리를 고소하지 못하게 하는 부민고소법을 만들었다. 이에 대해 세종은 반대를 했지만, 결국 강력한 허조의 의견에 마지못해 법을 시행했다. 그러자 한양에서 내려간 관리들이 오히려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일들이 빈번해졌고 세종은 부민고소법을 다른 신하에게 수정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허조는 여전히 훌륭한 관리임은 부정할 수 없다. 사람들이 누구나 단점이 하나씩 있듯이 허조도 그럴 뿐이지만,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조금만 더 수용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3. 허조와 관련한 웹툰(출처: 순욱문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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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3.png 저작권 문제될 시 삭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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