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변의 앙상한 겨울나무가 머지않아 도래할 봄을 기다리면서 시린 듯 서 있었습니다.
며칠 전 오후 시간이 나서 통도사의 작은 암자를 찾아갔습니다.
목표한 곳은 아니었는데 워낙 길치여서 잘못 진입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山寺의 맑은 공기를 마시니 상쾌함과 한적함이 좋았지요.
잔설이 채 녹지 않은 응달의 구리 빛 잔디에 이름 모를 새 한마리가 발이 시린 듯 콩콩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마치 평화로운 한 폭의 그림 같았지요.
세상엔 온통 잿빛 기사로 술렁입니다. ‘진리의 수와 오류의 수는 같다’고 하던데 아닌 듯 하기도 하고 ......
선비가 되어 세상을 살아가긴 힘들지만, 그것을 지향하는 삶의 방식에 懷疑가 들기도 합니다. 선생님께서도 연세가 꽤 드셨고, 저도 중년입니다.
살아온 날을 되돌아보니, 바쁜 일상으로 놓치게 된 生의 중요한 것이 하나둘이 아니네요.
잘한 일보다는 잘못한 일, 아쉬운 일이 더 많아 속상하고, 둘러온 뒷골목길이 저를 상심하게 하지만 퇴색되어버렸을 조그만 기억들이 되살아나 행복한 병이 되어 저를 찾아와 自慢으로 살던 자신을 반성하게 합니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생애에서 가장 힘든 시기에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학교 교육과정과 호국단의 규율에 구토하고 신경성 위염으로 적응치 못하면서도 꾸역꾸역 졸업까지 하게 된 것은 내성적인 성격, 그리고 인내력보다는 그곳에 선생님이 존재하셨기 때문입니다. 초라하고 궁핍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한낱 여학교 때의 치기일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갈등하고 어렵던 시기에 정신적인 버팀목이 되어 주신 소중하고도 귀한 분이셨습니다.
그 후로 선생님의 변하신 모습만큼 저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3년 다니던 은행을 그만두고 뒤늦게 시작한 공부, 2개월 준비로 진학하는 만용과 장학금의 수혜 속에서 대학을 마친 자만감,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맛보며, 제 신념이 옳다고 자위하던 시간들, 그 와중에서도 대학원 진학, 어머니의 뇌출혈, 위독, 그 반복의 갈등을 이겨내면서, 알량한 자존심으로 무장하여 묵묵하게 멋없이 살아 왔습니다. 부끄러운 자화상이지요.
교직을 선택한 이후, 제 나름대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생활하고 있지만, 학생들에게 어떤 이미지로 귀착될까 생각해 보면 자신이 없습니다.
따르는 아이들도 있으나, 선생님을 감히 따를 수는 없지요.
선생님,
그날 선생님을 뵌 후 전 작은 설렘과 함께 행복감에 젖어 있습니다.
아침은 차가운 바람이 피부를 스치더니 지금은 햇살이 내리쬐는 양지바른 책상 위치 때문에 꽂아놓은 열쇠꾸러미가 햇빛을 받아 작고 고운 무지개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자신의 관념이 자신을 형성하고 행동하게 하니 멘토는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