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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숙현 Jul 15. 2023

10. 아효 공주

 해가 바뀌고 첫 번째 만월이 뜨는 밤이었다. 하늘의 달이 손에 잡힐 만큼 가깝게 보였다. 한껏 부풀어 오른 달 아래 산과 계곡이 모습을 환하게 드러냈다. 동쪽 바닷가에 사람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시조의 제사를 준비하는 신녀들이었다. 신녀들의 그림자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 분주한 움직임 가운데 경건함이 흘렀다. 말소리는 조곤조곤했고 그릇을 다루는 손놀림은 조심스러웠다. 


 남해왕이 왕위에 오른 지 3년이 흘렀다. 혁거세 왕과 알영 왕비를 잃은 후, 사로국의 백성들은 불안에 떨었다. 무길이 세운 이서국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무서운 소문이 흘러들었다. 이서국의 잔혹한 왕과 뱀의 눈을 가진 비도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서국 무길왕이 가진 칼은 청동 칼 열 개를 단번에 부러트린대."

 "비도가 한 번 쳐다보기만 해도 저 세상 사람이 된다며?"

 소문은 남해왕의 귀에까지 전해졌다. 고심 끝에 남해왕은 신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시조를 위한 사당을 세우라. 혁거세 왕의 보살핌이 있을 것이다."

 신목이 있는 동쪽 바닷가에 사당이 지어졌다. 단을 높게 쌓고 그 위에 사당을 지은 뒤, 삼색의 깃발을 내걸었다. 


 사당이 완성되자 남해왕은 제사를 모시기 위해 일가를 데리고 내려왔다. 운제 왕비와 유리 왕자, 맏딸인 아효 공주가 왕의 옆에 섰다. 양산촌, 고허촌, 대수촌, 진지촌, 가리촌, 고야촌에서 온 여섯 촌장들도 하얀 옷을 입고 왔다. 그들의 맏아들들이 조용히 뒤를 따랐다. 


 의선 부인이 천천히 신목을 향해 다가갔다. 파도가 어린 짐승처럼 출렁거렸다. 의선 부인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약간 비릿한 바다 냄새가 맡아졌다. 

 구용이 조심스레 의선 부인에게 다가왔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최고 신녀를 돕는 역할을 맡았다. 아버지를 닮아 몸집이 크고 손이 두툼한 사람이었다. 햇빛에 그을린 얼굴은 빈 틈이 없었으며 그의 손으로 못 만드는 물건이 없었다. 신녀의 곁을 지키는 사람답게 구용의 입은 바위처럼 무거웠다.


 의선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구용이 두 팔을 들어 제사의 시작을 알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신관들이 북을 치기 시작했다. 둥둥 북소리가 사람들의 심장을 빨리 뛰게 했다. 북소리는 점점 커졌다가 작아졌다. 그것은 바람처럼 자연스러워서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의선 부인은 손을 높게 들어 신목에 갖다 댔다. 여섯 방향으로 뻗은 뿌리의 기운이 의선 부인의 몸 속으로 흘렀다. 

 "땅 어머니시여! 땅 어머니시여! 혁거세왕을 불러주시옵소서." 

 아효 공주는 그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얀 얼굴에 얼굴에 두 눈이 유난히 반짝였다. 두 눈 가득 고여있는 눈물이 금방이라도 흐를 듯 했다. 

 '할아버지. 이 곳에 계신건가요? 지금 저희들을 지켜보고 계신 거지요?'

 아효 공주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로국 백성들에게 혁거세 왕은 위대한 성인이었다. 하지만 어린 아효 공주에게는 자신을 무릎에 올리고 귀이 여겨주던 자상한 할아버지였다. 

 잠시 후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나무줄기에서 작은 불빛이 흘러나오더니, 의선 부인의 손끝으로 옮겨간 것이었다. 불빛은 의선 부인의 손을 붉게 물들였다. 불빛은 점점 커져 의선 부인을 감쌌다. 아효 공주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의선 부인이 아효 공주에게 말했다. 

 "이리 다가오십시오."

 부드럽지만 단호한 음성이었다. 아효 공주의 발이 저절로 움직이는 듯 했다. 아효공주는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자기 발을 쳐다보았다. 알 수 없는 기운이 자신을 감싸고 있었다.   


 갑자기 이마 쪽으로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의선 부인이 공주 쪽으로 손을 들어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의선 부인이 이마에 손을 대자 아효 공주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아효 공주는 열기가 온 몸에 퍼지는 것을 느꼈다. 몸이 가벼워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의선 부인은 공주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바람이 불어 아효 공주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겼다. 파도는 잔잔하고 바람은 향기로웠다. 의선 부인의 목소리가 동쪽 바닷가에 울려퍼졌다. 

 "신목이 아효 공주에게 명하십니다. 향로에 불을 붙이십시오." 

 향에 불을 붙이는 것은 아무에게나 허락된 일은 아니었다. 왕의 가족이라고 해도 땅어머니를 부르는 신성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효 공주는 아버지인 남해 왕을 바라보았다. 남해왕이 아효 공주의 눈을 따뜻하게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아효 공주는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제단 한 가운데에는 커다란 향로가 놓여 있었다. 아효 공주는 천천히 일어나 향로 앞으로 다가갔다. 신목을 향해 세 번 절을 했디.   

 등 뒤에서 의선 부인이 지켜보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나 실수라도 할까봐 바짝 긴장을 했다. 아효 공주는 조심스레 부싯돌을 집어들었다. 부싯돌을 '탁 탁' 하고 치자 불이 붙었다. 아효 공주는 자신이 피워 올린 불꽃을 바라보았다. 너울거리는 불꽃이 꺼지기 전에 향로에 불을 피웠다. 


 그윽한 향내가 풍겨왔다. 아효 공주는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향로의 연기는 서서히 퍼져 나갔다. 이제 언덕 아래에서도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효 공주는 허공 위를 걷는 것처럼 발밑이 가벼웠다. 어느 순간, 아효 공주는 자신이 신목 주위를 돌며 춤을 추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길게 뻗은 팔은 해가 뜨는 쪽을 가리켰고, 발 끝은 사뿐 사뿐 움직였다. 


 아효 공주는 점점 더 빠르게 움직였다. 긴 옷자락이 둥글게 퍼졌다. 공주는 두 눈을 지긋이 감았다. 자신이 마치 한 마리 해가 된 듯 황홀했다. 

 한순간 주위의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홀로 남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눈 앞의 모든 것들이 하얗게 지워져 있었다. 

 “아효 공주시여, 소리를 찾으십시오.”

 아효 공주는 의선 부인을 찾아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보았다. 하지만 의선 부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볼 수 없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자 희미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아효 공주는 그 소리를 따라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발길이 닿는 대로 걸어가자 동쪽 바닷가 신목 앞에 혁거세 왕이 서 있었다. 그는 돌처럼 굳어서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할아버지. 너무나 뵙고 싶었어요.”

 아효 공주는 한달음에 혁거세 왕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공주가 다가갈수록 혁거세 왕과의 거리는 멀어졌다. 마침내 공주는 혁거세 왕에게 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눈물이 빰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때 혁거세 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악의 주인을 맞으라.”

 아효 공주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제사를 마치고 나서 아효 공주는 신력을 갖게 되었다. 보통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듣고, 죽은 이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아픈 사람의 옷깃을 잡으면 그가 언제 병석에서 일어날지도 알았다. 


 하지만 그 댓가는 혹독했다. 귓가에 와서 수런거리는 망령들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전생의 고통을 고스란히 되살려 받아야했다. 밤마다 머리가 깨지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아효 공주님은 이곳에 머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땅어머니께서 신목을 돌보라 명   하십니다."

 남해왕은 의선 부인의 말 대로 아효 공주를 두고 금성으로 떠나기로 했다.


 왕의 가족이 모두 떠난 뒤, 구용이 다가와 의선 부인에게 말을 건넸다. 

 "바닷가에 배 한 척이 떠내려 와 있습니다." 

 길고 긴 밤이 지나고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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