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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숙현 Jul 15. 2023

8. 의선부인

"왕께서 선계에 드시신지 열흘이 넘었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으시네. 필시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어."

 알영 왕비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왕이 돌아오겠다고 한 날이 사흘이나 지났지만 선계에서는 아무 소식도 없었다. 왕을 찾는 신하들에게 핑계를 대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궁 안에는 왕이 중병에 걸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이제 더 이상 비밀로 할 일이 아닌 듯합니다. 우선 촌장들에게 알리고 의선 부인을 찾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남해 왕자가 말했다. 알영 왕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영 왕비의 얼굴은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이 답답해져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그래, 의선 부인이라면 선계의 소식을 알 수 있겠구나. 말이 난 김에 한 시라도 빨리 출발하자꾸나. 더는 견딜 수가 없구나."

 날랜 병사들이 여섯 고을로 흩어져 소식을 전했다. 남해 왕자가 명을 내렸다. 

 "각 고을의 촌장들을 신목 앞으로 모이시라고 해라." 


일행은 날이 밝자마자 서둘러 길을 떠났다. 왕자는 짐을 단출하게 꾸려 왕비의 마차에 함께 탔다. 왕비는 자꾸 마차의 창을 열어보았다. 

 "동해로 가는 길이 이렇게 멀게 느껴질 수가 없구나." 

 "잠시 눈이라도 붙이시지요."

 남해 왕자가 왕비의 손을 꼭 잡았다. 왕비는 말없이 고개를 저으며 왕자의 손을 맞잡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왕자가 이 사로국을 지켜야 해."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남해 왕자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왕비는 왕자의 손등을 가만히 토닥거려 주었다. 

 "안 그러려고 해도 자꾸만 불길한 생각이 드는구나."

 "의선 부인은 사로국 최고의 신녀가 아닙니까? 의선 부인이 방도를 알려줄 것이옵니다."

 "그래, 그래야지."

 왕비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왕비의 마차는 해가 저물 무렵이 되어서야 동쪽 바닷가에 도착했다. 바다는 언제나처럼 푸르게 넘실거렸다. 파도가 밀려와 하얀 포말을 만들었다. 가마에서 내린 왕비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어마마마, 드디어 동해구에 도착했습니다."

 남해 왕자는 멀리 신목의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인처럼 서 있는 나무를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어서 오십시오. 촌장들이 모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의선 부인이 왕비와 왕자 곁으로 다가왔다. 촌장들이 머리를 조아려 예를 표했다.  왕비는 촌장들 앞으로 나서서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왕비는 중간중간 말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었다. 

 "왕께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약속을 어기신 일이 없으십니다. 필시 선계에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습니다."   

 의선 부인은 묵묵히 조용히 왕비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는 땅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신목을 수호하고 제사를 담당하는 이였다. 하얀 얼굴에 유난히 붉은 입술이 도드라지게 보였다. 몸집은 작았지만 한 올도 흐트러짐 없이 빗은 머리며 서늘한 눈빛이 보는 사람을 움츠려 들게 했다. 

 "저도 불길한 꿈을 꾸었습니다. 속히 신목을 찾아뵈어야겠습니다."

 알영 왕비와 의선부인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남해 왕자와 여섯 고을의 촌장들도 그 뒤를 따랐다. 신목은 동쪽 바다를 향해 약간 고개를 숙인 듯 서 있었다. 

 일행이 막 신목 앞에 도착하자 그 주위로 어린 신녀들이 의선 부인을 빙 둘러쌌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모여들었다. 어둠은 먹물처럼 퍼져서 사람들 의 불안한 표정을 숨겨 주었다. 웅성이는 소리만이 바람에 섞여 들려왔다. 


 의선 부인의 일을 돕는 구용이 횃불을 밝혔다. 횃불 아래 사람들의 그림자가 어지러이 뒤섞였다. 

 의선 부인이 신목 앞으로 가자  '웅'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불지도 않았는데 수만의 나뭇잎들이 온몸을 뒤척이며 흔들렸다. 나무는 몸살을 앓는 것처럼 나부꼈다. 신목의 나뭇잎들이 하나 둘 떨어졌다.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놀라 숨소리를 죽였다. 의선 부인이 불길한 예감에 얼굴을 찌푸렸다.

 의선 부인은 서둘러 청동 거울을 꺼냈다.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청동 거울이여. 혁거세 왕의 모습을 보여 주소서."

 청동 거울의 가늘고 고운 선들이 조금씩 움직였다. 의선 부인의 입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이 흘러나왔다. 고운 선들은 물처럼 흐르며 봄바람처럼 부드러워졌다. 선들은 하나로 이어져 거울 안에서 빙빙 돌았다. 선들은 모여 출렁이는 그림을 만들었다. 

 신녀의 몸이 점점 청동 거울 쪽으로 쏠렸다. 보이지 않은 힘이 신녀를 잡아당기는 듯했다. 신비한 갈색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림 속에 혁거세 왕의 얼굴이 떠올랐다.

 "헉! 왕이시여."

 알영 왕비는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았다. 그림 속의 혁거세 왕은 이미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왕의 흰 말이 안타까운 듯 그 주위를 돌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변고가 일어났습니다. 어서 혁거세 왕을 모셔야겠습니다." 

 왕비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시녀들이 양쪽에서 부축했으나 왕비는 두 다리가 풀려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남해 왕자가 왕비 대신 의선 부인에게 다가갔다. 


 "서둘러주시오."

 의선 부인은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 절벽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뻗고 천문을 살피기 시작했다. 철썩철썩 파도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하늘에서 번쩍번쩍 섬광이 비췄다. 

 의선 부인의 주문 소리가 더 커졌다.      


 "어둠도 빛도 없는 곳에

 땅 어머니는 깊은숨을 불어넣으셨네.

 하늘이 열리고 별이 태어나고 달이 차고 기우네.

 눈부신 신목이여!  

 사로국을 위해 땅 어머니의 나뭇가지를 내려 주소서."      


 파도가 사나워지고 바람이 거세졌다. 의선 부인의 몸이 스르르 올라갔다. 높게 쳐올린 두 손안에 기다란 나뭇가지가 떨어졌다. 의선 부인의 손 안에는 여섯 줄 잎새가 달린 나뭇가지가 쥐어져 있었다. 

 "혁거세 왕이시여. 고귀하신 영혼이시여. 어서 사로국으로 돌아오십시오."

 의선 부인은 바다를 향해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바다가 솟구쳐 올랐다. 용트림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순식간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남해 왕자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왕의 팔이었다. 

 "왕이시여!"

 왕비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곧이어 하늘에서 왕의 두 다리가 떨어졌다. 왕의 몸통이 떨어졌다. 


 남해 왕자가 급히 달려갔다. 눈앞에 왕의 시신을 확인하고 비틀거렸다. 부릅뜬 왕의 눈이 허공을 향해 있었다. 남해 왕자는 부들부들 떨며 혁거세 왕의 눈을 감겨주었다.

 "왕의 오체십니다."

 의선 부인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여섯 마을의 촌장들이 땅에 무릎을 꿇고 슬피 울었다. 그들은 하늘처럼 떠받들던 성인을 잃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의선 부인은 모여선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어린아이처럼 작고 여린 백성이었다. 의선 부인이 발을 한쪽 구르며 소리쳤다.

 "모두 정신을 모으십시오. 불행히도 이게 끝이 아닙니다."

 의선 부인은 두 눈을 감고 바람이 부는 쪽으로 손을 길게 뻗었다. 온몸의 감각을 손끝에 모아 바람을 짚어보는 중이었다. 손가락 끝이 조금씩 구부러졌다. 의선 부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살(殺)의 기운이 점점 가까워집니다. 하늘을 뚫고, 땅을 울리며 그들이 찾아올 겁니다. " 


 사람들은 죄다 땅에 머리를 조아렸다. 부들부들 떠는 그들의 어깨가 애처롭게 보였다. 서로서로 옆에 앉은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어린아이 하나가 소리를 질렸다. 

 "저기 좀 봐. 하늘에 뭐가 있어요."  

 그 소리에 모두 놀라 하늘을 바라보았다.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가 빠른 속도로 하늘을 가르며 떨어지고 있었다. 길게 이어진 꼬리가 커다란 포물선을 그렸다. 


 한순간 주위는 환하게 밝아지면서 산과 계곡과 바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음 순간 거짓말처럼 배 한 척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클클클.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선계에서 새로운 왕이 오셨도다."

 비도가 무길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 목소리가 하늘을 울리고 땅을 흔들었다. 무길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떠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들은 배에 달린 부석을 떼어내고 땅에 가까이 다가갔다.   


 "으악! 괴물이다."

 비도의 모습을 본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비도는 더 이상 그림자가 아니었다. 인간 세상의 뜨거운 해는 그에게 육신을 갖게 해 주었다. 비도의 육신은 해에 그을려 얼굴빛은 검고 사지와 온몸도 모두 검은빛이었다. 턱수염과 머리카락은 검은 양모처럼 짧게 꼬부라져 있었다. 

 "내 모습이 마음에 안 드나? 해를 너무 많이 쬐었나? 클클클."


 비도에게 옛 모습이 남아 있는 것은 눈동자뿐이었다. 여전히 노란 눈동자에는 붉은 줄이 세로로 가 있었다.

 "클클클. 이제 자꾸 보면 마음에 들 거야. 우리가 이 땅의 주인이 될 거니까. 무길,   그렇지 않나?"

 대답 대신 무길은 칼을 공중에서 길게 내리그었다. 그러자 칼에서 불꽃이 튀며  '펑' 하는 폭발음이 들려왔다. 

 "하하하하."

 무길은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웃었다. 


 의선 부인은 신목의 가지를 품속에 넣었다. 그리고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아득한 절벽 위로 올라갔다. 긴 옷자락이 몸에 감겨 몸의 윤곽이 드러났다. 바람은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 휘몰아쳤다. 의선 부인은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땅 어머니시여! 가련한 저희를 도와주시옵소서. 신목의 기운으로 저들을 물리쳐주시옵소서."

 의선 부인의 목소리가 하늘과 땅 사이에 쩌렁쩌렁 울렸다. 하늘에 닿을 듯 우람하게 서 있던 신목이 몸을 부르르 떨며 빛을 내기 시작했다. 

 "땅 어머니가 사로국을 지켜주시고 있다."

 안도의 탄성이 터졌다. 여섯 마을의 촌장과 남해 왕자가 신목을 향해 세 번 절을 했다. 그러자 두려움에 떨고 있던 백성들도 신목을 향해 간절한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웅얼거리는 기도 소리는 점점 커졌다. 늙은이나 어린 아이고 할 것 없이 모두 기도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천지에 진동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지?"

 무길은 웅웅 거리는 소리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아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뭣들 하는 거야?"

 무길은 부석을 들어 올려 배를 절벽 가까이 대었다. 그는 단칼에 신녀를 벨 작정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의선 부인이 신목의 가지를 꺼내 들었다. 무길이 무슨 일인가 싶어 잠시 멈칫하는 사이, 의선 부인이 무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신목의 기운이 이들을 물리칠 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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