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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숙현 Jul 15. 2023

7. 혁거세왕의 죽음


 혁거세 왕과 회색 수염이 막 선계에 도착했을 때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회색 수염은 검은 학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합니다. 지금쯤이면 교대를 하러 선인군이 와야 할 시간인데. 이렇게 선계의 문을 비워두고 있다니……."

  회색 수염은 안개를 향해 손은 뻗었다. 손 끝이 시려오는 것이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회색 수염은 불길한 생각을 떨치려고 고개를 저었다. 

 그때, 구름 너머에서 검은 학을 탄 선인군이 급히 날아왔다. 어깨에 매달린 그물은 찢어졌고, 팔뚝에서는 피가 흘렀다. 

 "큰일 났습니다. 어서 이곳에서 피하셔야 합니다."

 선인군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선인군이 말을 마치자마자 검은 학이 푹하고 쓰러졌다. 선인군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회색 수염이 깜짝 놀라 부축했다. 회색 수염은 선인군의 팔에 난 상처를 보았다. 칼에 베인 상처였다. 어찌나 깊이 베였는지 뼈가 드러날 정도였다. 회색 수염은 옷자락을 찢어 상처를 동여매 주었다. 


 구름 사이로 불빛이 번쩍이고 비명 소리가 들렸다. 바로 머리 위의 허공 쪽이었다.  회색 수염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대체 무슨 일인가?" 

 "선계가 지금 비상입니다. 대장간에 있던 무길이라는 자가 칼을 훔쳐 달아났습니다. 그 잔혹무도한 칼로 진명 선인을 찌르고 도망갔습니다." 

 "무길이… 칼을 가지고 달아났다고?" 

 회색 수염은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회색 수염은 혁거세 왕을 급히 돌아보았다. 혁거세 왕 역시 무척이나 놀란 모습이었다. 

 "제가 가봐야겠습니다. 잠시 여기에서 기다리시면 얼른 돌아오겠습니다."

 "나도 같이 가보겠네."

 "여기 계시면 제가 금방 모시러 오겠습니다."

 인간계에서 온 혁거세 왕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었다. 혁거세 왕을 무사히 선계로 모셔오는 것, 그것이 바로 그의 임무였다. 


 회색 수염이 길게 휘파람을 불자 학이 곧장 위로 날아올랐다. 빠른 속도로 구름을 뚫고 올라갔다. 얼굴을 잔뜩 뒤덮고 있는 수염들이 사방으로 뻗쳐나갔다. 그 짧은 순간이 길게만 느껴졌다. 

 회색 수염은 무길의 얼굴을 떠올렸다. 무길의 눈은 언제나 뜨거운 화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     까?"

 회색 수염은 무길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가 마음에 걸렸다. 갈 길이 멀어 마음이 급했던 것은 아니었나 후회스럽기도 했다. 


 드디어 회색 수염의 시야에 무길의 모습이 보였다. 무길은 칼을 높이 치켜올리고 있었다. 손에 든 칼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길은 마치 춤을 추듯 움직이면서 정확하게 상대의 급소를 파고들었다. 칼이 움직일 때마다 선인군들의 비명이 길게 이어졌다. 선인군들이 낙엽처럼 쓰러졌다.    

 회색 수염은 길게 신음을 내뱉었다. 선인군의 말을 들을 때만 해도 설마 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일말의 기대도 사라져 버렸다.  


 쓰러져 있던 선인군이 사력을 다해 무길의 칼을 막았다.

 "챙 챙."

 칼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하지만 승부는 금방 갈렸다. 선인군은 무길의 앞에서 무릎을 푹 꺾으며 쓰러졌다. 무길은 냉혹하고 잔인했다. 쓰러진 선인군을 향해 마지막 칼을 날렸다. 

 회색 수염은 가슴 한가운데 통증을 느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자신이 대장간을 잘못 이끌어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라 여겨졌다. 무길의 기술만 믿고 그를 잘 단속하지 못한 것이다. 

 회색 수염은 자신의 등에 매달고 있던 방패의 끈을 천천히 풀었다. 회색 수염은 대장장이 이기도 하지만 그전에 무수히 많은 전쟁을 치른 선계의 군사였다. 회색 수염은 이를 악물고 무길의 흔적을 찾았다. 

 "무길 이놈, 네가 이러고도 살아남길 바라겠느냐? 내가 네놈을 상대해 주마." 

 회색 수염이 소리를 지르며 다가가자 무길이 멈칫했다. 무길의 눈빛이 흔들렸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림자 비도가 무길의 귀에 속삭였다. 낮고 빠른 말투였다.

 "두려워하지 말고, 너의 칼을 믿어라."

 무길은 회색 수염을 향해 돌아섰다. 

 회색 수염이 무길의 칼을 향해 몸을 던졌다. 무길은 한 발 뒤로 물러서 방패를 막았다. 회색 수염의 방패는 크고 강했다.  

 무길이 몸을 틀어 방패를 밀어붙였다. 

 "이얍."

 칼과 방패가 부딪치는 소리가 챙챙 울렸다. 둘의 싸움은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무길과 칼은 마치 한 몸처럼 움직였다. 뜨거운 분노와 증오가 칼을 움직이는 힘이었다. 회색 수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칼이 부딪칠 때마다 섬광이 번쩍였다.  

 "이건 보통 칼에서 나오는 기운이 아니다."

 회색 수염의 칼이 멈칫했다. 무길의 날카로운 눈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범처럼 날래게 몸을 날렸다. 회색 수염의 오른쪽 팔을 향해 온 힘을 다해 칼을 휘둘렸다. 


 "으악."

 회색 수염은 터져 나오는 비명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땅바닥에 몸을 구르며 쓰러졌다. 고통이 몸을 뚫고 지나갔다. 

 "클클클, 제 스승을 쓰러트리다니 제법인 걸."

 비도가 쓰윽 다가와서 회색 수염을 보았다. 오른쪽 팔이 방패를 쥐 채로 잘려 있었다. 

 무길은 눈을 꼭 감았다. 그 순간 떠올리고 싶지 않은 장면들이 무길을 괴롭혔다.  무길이 처음으로 망치를 잡던 날, 회색 수염은 오른손으로 무길의 손을 꼭 쥐어 주었다. 대장장이에게 오른쪽 팔이 얼마나 중요한지 무길은 알고 있었다. 


 "으악." 

 무길의 꼭 다문 이빨 사이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회색 수염을 향해 다시 한번 칼을 날렸다. 

 회색 수염이 쓰러지자 무길은 광기에 사로잡혀 남은 선인군들을 모조리 배어버렸다. 무길의 칼은 피를 묻힐수록 더욱 강해졌다. 

 비도가 옆으로 쓰윽 다가와 말했다.

 "클클클. 회색 수염이 인간계의 왕을 데리고 왔을 거다. 어서 찾아봐."

 무길은 훌쩍 배에 올라 주위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부석을 이용하는데 익숙해지자 배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다. 

 "인간계에서 온 자여여! 어디에 있느냐? 숨어봤자 소용없다. 어서 이 무길의 앞에 나서라."

 무길은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이가 있다면 누구든 벨 작정이었다. 

 "사로국의 왕은 비겁하게 숨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혁거세 왕이 무길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무길은 흰 말 위에 올라탄 혁거세 왕의 몸을 훑어보았다. 그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지 않았다. 

 "빈 손으로 그렇게 큰 소리를 치다니. 어리석기 짝이 없군."

 "너야말로 칼을 내려놓아라. 그 칼은 나의 것이다. 상제가 사로국을 위해 준비해    주신 것이다." 

 무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혁거세 왕의 말은 끓고 있던 욕망의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무길이 이를 꽉 문채로 외쳤다.

 "이 칼은 오직 나, 무길만의 것이다."

 무길은 혁거세 왕을 향해 칼을 날렸다. 흰말이 날래게 몸을 피했지만 무길의 칼이 조금 더 빨랐다. 혁거세 왕은 땅바닥에 쓰려졌다. 그는 팔은 이미 그의 것이 아니었다. 

 "상제께서 너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혁거세 왕은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 

 "아니, 이제 너는 다시는 사로국에 갈 수 없을 것이다. 이곳이 너의 무덤이 될 거니깐."


 무길의 칼은 혁거세 왕이 쓰러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혁거세 왕의 두 팔과 다리가 바닥에 뒹굴었다. 몸의 주인을 찾아 꼼지락거리는 것이 보였다. 흰 말이 달려와 왕의 몸을 한 데로 모으려 했다. 

 "왕을 되살려보겠다는 거냐? 끝까지 주인을 모시겠다는 것이군. 하지만 그렇게 놔둘 수는 없지."

 비도는 품속에서 부적 한 장을 꺼냈다. 부적을 날려 혁거세 왕의 이마에 붙였다. 눈을 부릅뜬 채로 혁거세 왕은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두 팔과 다리가 힘을 잃고 늘어졌다. 흰 말이 히이잉 우는 소리가 선계의 하늘에 서럽게 울렸다.  


 무길과 비도가 탄 배는 선계의 문을 훌쩍 뛰어넘었다. 철통 같이 지키던 선인군들은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었다. 비도가 클클거리며 비웃었다. 

 "네놈이 선계를 떠난 최초의 정령이 되겠구먼. 대단했어."

 "그렇게 웃지 마. 네 웃음소리 기분 나쁘니깐."

 "클클클. 그러지 말고 이 순간을 맘껏 즐겨. 오늘이 네 생애 최고의 날이 될 거야."

 "……."

 "마지막으로 저 기둥을 베어버려라. 그래야 귀찮은 선인군들이 우리를 쫓아오지 못하지."

 "지금 이 칼로 돌기둥을 무너트리라고 말하는 거야?"

 "왜? 이 비도의 말을 의심하는 거야?"

 비도의 눈이 세모꼴로 변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무길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치켜  올라갔다. 

 "아니. 이제 난 네 말을 믿어. 내 칼은 보통 칼이 아니니깐."

무길은 칼을 쳐들고 단숨에 기둥을 내리쳤다. 기둥에 선명한 칼자국이 남았다. 잠시 후 균열이 생기며 기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사로국 동악으로 간다. 저 동해의 해가 맨 처음으로 비추는 곳. 우리가    동악의 주인이 되면 이 선계가 무너지는 것도 시간 문제지."

 비도는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지 자꾸만 발을 굴렸다.      

 동쪽 하늘에 둥근 해가 떠올랐다. 불타오르는 태양은 금세 바닷물을 붉게 물들였다. 뜨겁고 붉은 알. 아름다운 경치가 바다에 비치고, 천지가 환하게 빛났다. 

 시커먼 바다에서 떠오른 해는 붉다 못해 검은빛이 배어났다. 그것은 불에 달궈진 시우쇠처럼 사방으로 빛을 쏘아댔다. 무길은 그 붉은빛을 받으며 몸을 떨었다. 대장간에서 시우쇠를 두드릴 때처럼 아랫도리가 불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인간의 세상에서 원도 한도 없이 살아보는 거야.'

 무길은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비릿한 바다냄새에 섞여 인간들이 내뿜는 악취가 풍겨왔다. 

 선계(仙界)에서는 한 번도 맡지 못한 냄새였다. 인간이 내뿜는 탐욕과 거짓의 냄새, 무길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지금이야! 키를 꺾어."

 비도가 소리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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