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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숙현 Jul 15. 2023

9. 무길의 나라

 무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은 사라졌으나 가슴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길은 여전히 뜨거웠다. 무길은 뱃머리에 서서 시원한 강바람을 맞았다. 

 무길은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을 하나하나 곱씹어 보고 있었다. 비도의 말은 절반을 맞고, 절반은 틀렸다. 선인군에게 잡혀 암흑의 동굴에 갇힐 신세를 면했으나, 비도가 말한 것 같은 힘을 손에 쥔 것은 아니었다. 


선계의 문에서 혁거세 왕을 쓰러트릴 때만 해도 거칠 것이 없었다. 혁거세 왕의 몸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막았으니, 그가 다시 부활할 리도 없었다. 사로국에 들어가 동악을 차지하는 데 한나절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하지만 신목의 위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신녀가 나뭇가지를 자신에게 던졌을 때, 무길은 몸이 붕 떠오르며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겨우 나무 한 그루 때문에……."

 무길은 애써 잊어보려고 고개를 흔들었다. 


 비도는 노를 젓는데 온통 정신이 팔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노를 저을 때마다 팔의 근육과 힘줄이 움직이는 게 너무나 신기했다. 비도는 점점 더 빨리 노를 저었다. 비도와 무길이 탄 배는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강의 폭이 좁아지고 있었다. 

 배가 기다란 협곡 안으로 들어섰다. 한낮인데도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계곡이 길고 깊어서 한 번 들어오면 빠져나가는 데에만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곳이었다. 협곡 안으로 들어오니 가슴이 답답해 견딜 수가 없었다. 


 무길이 비도의 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심상치 않은 무길의 얼굴을 보고 비도가 잠시 배를 세웠다. 

 "왜 그래?"

 비도가 말했다. 무길은 그런 비도의 모습이 낯설기만 했다. 검은 얼굴과 구불거리는 머리칼. 그 모습은 무길이 알고 있는 그 누구의 모습과도 달랐다. 비도의 얼굴에 생기가 도는 것을 보자, 무길은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인간계로 와서 좋은 건 너 하나뿐이군."

 "그게 무슨 말이냐?"

 "이런 골짜기에 숨어들려고 인간계로 온 게 아니란 말이다."

 무길은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주어 뱉었다. 

 "어리석긴. 이제 막 시작인데 모든 것이 다 끝난 것 같은 말투군. 그저 좀 늦어진 것뿐이다. 사로국은 결국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되어 있으니깐."

 "선계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사실 나도 신목에 대한 얘긴 듣기만 해서 그 정도인 줄은 몰랐어. 하지만 우린 쇠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 그 비밀로 나라를 세우고 넌 왕이 될 수 있어. 너 무길의 나라."

 "더 이상 나를 가지고 놀면 가만 두지 않겠어."


 무길은 비도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허리에 찬 칼에 손을 갖다 댔다. 여차하면 칼을 들어 내리칠 심산이었다. 선계의 그림자 비도는 칼로 벨 수 없었지만 육신을 가진 비도는 한 칼에 도륙을 낼 수 있을 것이다. 무길의 입술 한쪽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비도는 무길의 뜻을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에 묻어있는 여유로움이 무길을 더 화나게 했다. 비도가 강 끝을 가리키며 물었다.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는 줄 알고 있나? 

 "나를 바보로 아는 거야? 그 신목인지 뭔지를 피해 도망가는 중이잖아." 

 "도망이라고? 우린 도망을 가는 게 아니라 힘을 찾으러 왔지."

 "이 강 끝에 뭐가 있는데?"

 "곧 알게 될 것이다."


 비도는 계속해서 노를 저었다. 배가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죽죽 나아갔다. 그러는 동안 배는 협곡을 빠져나왔다. 그늘을 벗어나자 멀리 갓 모양의 산이 눈에 들어왔다. 비도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배가 산기슭에 닿자 비도가 먼저 배에서 내렸다. 무길은 배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쪽으로는 깎아놓은 듯 가파른 산이 있고, 다른 쪽으로는 협곡으로 이어지는 작은 강이 있었다. 비도가 두 손을 펼치며 말했다. 

 "여기는 천연의 요새이지. 이 높은 산을 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야. 또 알다시피 협곡이 길어서 쉽게 배를 이용할 수도 없고."

 무길도 수긍을 할 수밖에 없었다. 


 주변의 산세는 선계의 야트막한 구릉들과는 딴판이었다. 가파른 산등성이에 오래된 전나무들이 무성한 숲을 이루었다. 여기저기 낭떠러지도 적지 않았다. 자칫하면  산봉우리를 넘다가 강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을 터였다. 

 비도는 무언가를 찾은 눈치였다. 발끝으로 땅을 굴러 보기도 하고, 주위의 바위를 자세히 살펴보기도 했다. 잠시 뒤에 비도가 뭔가를 집어 들었다. 

"이건 쇠가 들어 있는 돌덩이다. 이 돌을 뜨거운 불에 녹이면 쇳물이 녹아내리지. 이곳에 사는 멍청한 인간들은 그 불의 비밀을 알 턱이 없지만."


 비도가 '어때?' 하는 표정으로 턱을 들어 올렸다. 무길이 비도의 손에 든 돌덩이를 빼앗아보았다. 검붉은 암석을 손에 쥐자, 손끝이 찌르르 저려 왔다. 바로 쇠를 만질 때의 느낌이었다. 

 무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검붉은 바위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땅에 묻혀 있는 바위들도 상당한 것 같았다. 무길의 얼굴에 처음으로 옅은 미소가 어렸다.  


 그때 등 뒤에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수 백 명의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둘을 에워싸고 이었다. 무길은 '헛' 하는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의 수가 많다고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여자와 어린아이였다. 얼마 되지 않은 남자들이 돌창을 들고 있었다. 


 우두머리인 듯 한 사람이 외쳤다. 

 "이 땅에는 이미 주인이 있다. 이방인이여! 어서 이곳을 떠나라."

 그는 청동 검을 들고 있었다.  무길이 청동 검을 든 이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냐?"

 "여긴… 땅 어머니의… 세상. 이서…군이요."

 겁에 질린 우두머리는 이미 무길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그래? 앞으로는 저 무길의 땅, 무길의 나라가 될 것이다."

 비도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비도의 검은 낯빛을 보자마자 우두머리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는 지옥에서 온 사자(使者)를 본 듯했다. 얼굴에서는 금방이라도 검은 재가 묻어 나올 것 같고, 온몸에는 구불구불한 털이 뒤덮여 있었다. 

 비도가 똑바로 걸어 우두머리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비도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람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비도와 무길을 둘러싼 둥근 원은 점점 흐트러졌다. 겁에 질린 어린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우두머리가 마지막 용기를 쥐어짜며 말했다. 

 "우리는 사로국의 형제이다. 땅어머니께서……."

 사로국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무길의 몸이 붕하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의 쇠칼은 청동 칼을 가볍게 부러트리며 우두머리를 죽였다. 우렁찬 목소리는 골짜기의 바위를 우르르 떨게 했다. 무리의 우두머리가 쓰러지자 모두가 땅에 무릎을 대고 머리를 숙였다. 

 "왕이시여!"

 "내가 이 땅의 중심이 되리라. 이제부터 나를 왕이라 부르라."

 무길이 칼을 높게 쳐들었다. 


 무길은 갓모양의 산 정상에 산성을 쌓았다. 땅을 평평하게 고르고 그 위에 돌을 쌓는 고된 작업이었다. 사내들은 그 고된 노역을 피할 수 없었다. 돌을 지고 가다 쓰러지면 비도의 채찍이 그들의 숨을 거두었다. 

 "이만하면 됐군."

 성이 완성되자 무길은 만족스럽다는 듯 말했다. 무길은 힘깨나 쓰는 장정을 모이게 했다.   

 "쇠로 만든 칼은 부러지지 않고, 쉽게 무뎌지지도 않는다." 

 무길이 꾹꾹 누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서국의 젊은이들은 두려움에 떨며 무길의 칼을 보았다. 청동칼이 간돌로 만든 무기를 부러트렸듯, 쇠로 만든 칼은 청동 칼을 넘어설 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알고 있는 이치였다. 

 "이 쇠로 만든 칼과 창으로 이서국은 강해질 것이다. 사로국을 치고 땅의 나라들을   하나하나 지배할 것이다. 그것이 나 무길왕의 법이다."

 젊은이들이 하나씩 나와 무길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 무길은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곁에 서 있던 비도가 말을 이었다. 

 "쇠를 낳게 하는 것은 바람과 불과 돌의 조화다. 뜨거운 불은 돌을 쇠로 바꿔버리지. 왕께서는 아무도 모르던 그 불의 비밀을 알고 계시다. 왕께서 새로운 나라 힘을 가져다주실 것이다. 누가 왕의 군사가 되겠는가?"

 비도가 노란 눈을 빛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젊은이들은 앞다투어 무길의 군사가 되겠다고 나섰다. 

 그들은 새벽별이 뜨기도 전에 일어나 무기를 잡았다. 골짜기에서 나는 돌들은 훌륭한 무기가 되었다. 군사들은 계곡과 계곡 사이를 한달음에 달려야 했다. 날렵하게 움직이는 법을 배우고 상대의 허점을 찾아 칼을 휘두르는 연습을 했다. 멈추어 쉬거나, 쓰러지는 자는 당장에 내쳐졌다. 강한 자가 남고, 남은 자는 더 강해졌다. 


 무길왕의 낮은 치열한 전쟁의 시간이었고 무길왕의 밤은 전쟁을 위해 잠시 쉬는 시간일 뿐이었다. 무길왕이 전쟁터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서국의 영토는 넓어졌다. 무길왕의 목소리는 골짜기의 바위를 우르르 떨게 했다. 군대가 지나간 자리에 피가 고이고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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